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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3: 7 율법 조문의 직분 - 고후 3: 10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2. 새 언약의 영광 ( 3: 7 – 11 )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 7 율법 조문의 직분 -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
바울의 논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복음 사역은 단순히 사람들의 말과 글의 사역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전도자의 직분은 성령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참된 목사들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 목사들은 그 사역을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과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
1]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본 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석판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 34: 29-35의 장면이다.
* 출 34: 29-35 –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즉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이 없다.
* 롬 7: 10-12 –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단도직입적으로 '율법 조문'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도의 전이해(前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2]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본 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관한 유대교의 전승(Targum Ongelos)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유대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Martin).
3] 직분의 다양성
(1) 율법 조문의 직분
* 고후 3: 7 -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2) 영의 직분
* 고후 3: 8 -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3) 정죄의 직분
* 고후 3: 9 -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4) 의의 직분
* 고후 3: 9 -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5) 화목의 직분
* 고후 5: 18-19 –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6) 고난의 직분
* 고후 6: 4-10 –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7) 봉사의 직분
* 고후 9: 11-12 –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고후 3: 8 영의 직분 -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
그 사역은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죽게 하는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면, 살리시는 성령의 사역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것이겠는가!
1] 하물며 영의 직분은
율법 조문의 직분에 주어지는 영광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며 거기에 비취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빛'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빛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빛이다.
* 고후 4: 6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2]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는 구절은 미래형이나 이를 시간적인 미래로 보아 주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논리적인 미래로 보아야 한다.
영의 직분이 현재적 이듯이(1: 22) 그 영의 영광도 현재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후 3: 9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 -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
본 절에서는 '조문의 직분'(7절)이 '정죄의 직분'으로 '영의 직분'(8절)이 '의의 직분'으로 대체되고 있다.
1]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한다.
* 롬 3: 19-20 –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면해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게 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정죄의 직분에 영광이 있다면, 의의 직분에 얼마만큼의 영광이 있느냐?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2]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본문에 나오는 '의'(*, 디카이오쉬네스)의 개념은 바울이 그 말을 사용할 때의 용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윤리적인 무죄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의 성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기인한다(Barrett). 의의 직분 속에는 그것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한다(Kasemann).
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고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정죄(定罪)의 사역이다.
그러나 복음은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 롬 3: 21-24 –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의의 소식이다.
복음의 일꾼들은 죄인을 정죄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의를 선포한다. 전도는 죄인들에게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전하는 사역이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다면 의의 직분은 더욱 영광스럽다!
고후 3: 10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
본 절에서는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우월성이 극도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의 밝기가 묻혀 버리는 것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모세의 영광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인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1]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것은 바울로 인해 율법의 직능이 무효가 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율법 이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도들은 더는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다.
* 히 8: 7-13 –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2]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율법의 사역도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 사역은 더 큰 영광이 있다. 율법의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다. 구약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 체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그러나 복음의 영광은 한계도 없고, 폐지되지 않는 영속적인 영광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신 완전한 의(義)의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