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륜과 무악
( "가자 남으로"... 무악이 만세의 터전이다 )
원자(元子) 이제(褆)를 세자로 책봉한 태종 이방원은 세자로 하여금 종묘에 배알하라 명했다. 종묘가 어디에 있는가? 한양에 있다. 왕궁은 개경에 있고 종묘는 한양에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천도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양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고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이니 오래 비워 두고 거주하지 않으면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니다. 명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옮겨갈 터이니 응당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해야 할 것이다."
종묘사직을 천도 명분으로 삼았지만 태종 이방원에게 천도는 아버지에 대한 효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하루라도 빨리 개경을 떠나고 싶어 했다.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경인들의 눈초리도 거북했지만 사랑하는 아내 신덕왕후 강씨의 능과 막내아들 방석의 묘가 있는 한양으로 가고 싶어 했다.
개경을 떠나 "가자 남(南)으로"
성산군(星山君) 이직과 취산군(鷲山君) 신극례를 이궁조성도감(離宮造成都監) 제조(提調)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한양천도 문제에 착수했다. 기회를 기다리던 하륜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한양으로 가긴 가되 무악으로 가자'는 것이다. 하륜에게 천도는 패자 부활전이었다.
'나라의 기둥은 경제다'라는 지론을 견지하던 하륜은 조운선의 왕래가 편리한 무악을 강력히 추천했으나 무학대사의 인왕 주산론과 정도전의 백악 진산론에 밀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못했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주장하는 무악을 배척하고 정도전의 의견을 쫒아 백악을 진산 삼아 경복궁을 창건할 때 국운의 후퇴라 생각하며 안타까웠다.
그런데 기회가 온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고 현재는 태종이 왕이다. 그 임금의 오른팔이 자신이지 않은가. 왕사 무학대사도 국사에서 손을 떼고 회암사에 은거중이고 천하의 논객 정도전도 없다. 임금이 바뀐 이번이야 말로 절호의 찬스다. 이번에는 기필코 무악을 관철하고 싶었다.
무악에 도읍을 정하고 삼남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면 국가의 재정은 탄탄한 반석에 오를 것이라 생각했다. 얼마 전 경상도 조운선 36척이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애써 지은 곡식을 바다에 수장했으니 국가의 재정적 손실은 물론이려니와 다시 거둬들임을 당해야 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귓전을 맴도는 것 같았다.
하륜의 주청에 따라 태종 이방원이 무악(毋岳) 현지답사에 나섰다.
하륜, 조준, 남재, 권근과 대간(臺諫) 각각 1원(員)씩 호종한 임금의 행렬이 임진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 익안대군 이방의의 부음이 들려왔다. 이방의는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로 태종 이방원의 동모형이다. 임금 행렬은 발길을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장례를 치른 태종은 다시 무악 답사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남재가 빠지고 이천우가 동행했다.
태종이 무악산 중봉에 올라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사람을 시켜 한강가에 백기(白旗)를 세우게 하고 꼼꼼히 살펴봤다. 시야가 확 트여 한강에 접한 무악산 기슭은 가히 도읍지에 손색이 없었다.
시야가 확 트여 시원하구나
"여기가 도읍하기에 합당한 땅이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하륜)이 말한 곳이 백기의 북쪽이라면 가히 도읍이 들어앉을 만하다."
백기의 북쪽이라 하면 오늘날의 모래내 일대와 상암벌을 이르는 말이다.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종 이방원은 무악산을 내려와 서운관 관리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끝장 토론을 하자는 것이다.
"지금 경들이 본 곳 중에서 명당을 찾아라."
윤신달, 민중리, 유한우, 이양달, 이양 등 천문지리에 학문이 깊고 조예가 있다는 서운관 관리들은 머리만 긁적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거리낄 것 없이 각기 자기 말을 다하도록 하라. 이 땅과 한양, 어느 것이 좋은가?"
무악산 아래와 한양 중 하나를 찍어 라는 것이다. 서운관 제조 윤신달이 말문을 열었다.
"이 땅을 참서(讖書)로 고찰한다면 왕씨의 5백 년 뒤에 이씨가 나온다는 곳입니다. 이 말은 이미 입증되었으니 그 책은 심히 믿을 만합니다."
도참서를 인용한 아부성 발언이다. 잠시 말을 멈춘 윤신달이 말을 이어갔다.
"참서에 의하면 눈앞에 세 강(江)이 끌어당기기를 만월과 같이 한다고 하였는데 이 땅의 눈앞에 세 강이 있으니 또한 참서와 합치합니다. 태상왕 때 이 땅을 얻지 못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웠던 것 입니다."
윤신달이 거론한 세 강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 주목한 것이 하륜이었
다. 듣고 있던 유한우가 나섰다.
"한양은 전후에 석산이 험하고 명당에 물이 없으니 도읍할 수가 없습니다. 지리서에 말하기를 '물의 흐름이 길지 않으면 사람이 반드시 끊긴다.' 하였으니 불길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땅도 또한 규국(規局)에 바로 합치하지는 아니합니다."
규국은 도참 지리서에 나오는 용어로서 도국(圖局)에 길지(吉地)로 획정하는 범위 안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잠자코 있던 민중리가 말했다.
"도읍을 정하려고 한다면 천리의 안쪽에 산수가 빙 둘러싸고 있는 곳은 모두 찾아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삼각산에 올라가 사방으로 바라보고 명승지를 찾는다면 혹은 요행히 얻을 듯 싶습니다."
무악이고 백악이고 접어 두고 조선 팔도를 새롭게 다 뒤지자는 것이다. 원론적인 얘기만 늘어놓은 서운관 관리들의 말을 듣던 태종 이방원이 심기가 불편한 것을 감추지 않은 채 민중리에게 되물었다.
"이 땅의 규국을 말한다면 괜찮은가?"
다른 땅 끌어들이지 말고 이 땅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를 말하라는 것이다.
"이 땅도 또한 규국에 바로 합치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외산이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성질 급한 태종 이방원의 성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양이 답답하다는 듯이 나섰다.
"이 땅은 한양에 비하여 심히 좋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듯이 이양달이 나섰다.
"한양에 비록 물이 없다고 말하나 광통교 이상에는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목멱산 너머에는 물이 사방으로 빙 둘러싸고 있으므로 웬만큼 도읍할 만합니다. 이 땅은 규국에 합치하지 못합니다."
이양달이 말하는 광통교는 훗날 태종이 건설한 청계천의 광통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내자동과 효자동 어귀에 있던 광통교를 말하는 것이다. 갑론을박 원점에서 맴도는 서운관 관리들의 의견에 짜증이 난 듯 태종 이방원이 언성을 높였다.
난상토론 끝에 불똥은 엉뚱한 곳에 떨어지고
"내가 어찌 신도에 이미 이루어진 궁실을 싫어하고 풀이 우거진 이 땅을 좋아하여 다시 토목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려 하겠는가? 한양은 석산이 험하고 물이 끊어져 도읍하기에 불가한 까닭이다.
내가 지리서를 보니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 하였다. 만약 지리서를 쓰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쓴다면 한양은 물이 없는 곳이니 도읍하는 것이 불가한 것은 명확하다. 너희들이 모두 지리를 아는데 처음에 태상왕을 따라 도읍을 정할 때 어찌 이러한 까닭을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태종실록>
난상토론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왜 불가함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자 윤신달이 변명하고 나섰다.
"신은 그때 마침 친상을 만나 호종하지 못하였습니다."
궁하면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이 관리들의 생리다. 이러한 변명으로 면책될 수 없다고 판단한 유한우가 서운관 관원의 한계를 들고 나왔다.
"신 등이 말하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전단(專斷)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태종 이방원이 이양달을 지목하며 되물었다.
"네가 태상왕을 따라갔을 때 한양은 물이 끊어지는 땅이어서 도읍을 세우는데 불가하다는 사실을 왜 알지 못하였느냐? 어찌하여 한양에 도읍을 세우고 크게 토목의 역사를 일으켜서 부왕을 속였는가?"
이양달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새로운 도읍지를 찾으러 왔다가 옛 도읍지 때문에 목이 달아날 위기에 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