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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나는 어떤 샐러드를 좋아하는가
마흔이 되기 전까지, 나는 내 관계가 끝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건 사랑에 대해 충분히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 남자와 파트너로 살았다. 관계를 끝낼 무렵 나는 우리가 의미 있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내가 아닌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끝없이 맞닥뜨리면서도 나는 내가 진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되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내 실수였다. 나는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사랑에 관한 내 지식은 얕았다. 내 인생에서 사랑에 대한 모든 철학적 사고는 책에서 얻은 것인데, 이론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훨씬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들이 대개 그렇듯, 나는 내 인생의 남자를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여겼다.
몇 년간 혼자 산 후, 나는 친밀한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관계의 문제가 친밀함을 두려워하는 상대 남자에게 있다고 느꼈다. 많은 상대를 만나보진 않았지만, 관계에서의 내 선택들 사이에 비슷하게 나타난 패턴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홀로 있기를 더 좋아하는 남자, 종종 정서적 교감을 거부하는 남자,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알코올중독자들을 선택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개 싱글맘 밑에서 자라며 어머니와 상당히 밀접한 애착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내 개인성을 기꺼이 존중해주는 점을 관계의 가장 큰 미덕으로 삼았다. 가장 길었던 이 관계를 끝내며 나는 우리가 함께할 공간을 만들고 유지하기보다 각자의 공간을 분리하는 데 더 능숙했다고 농담을 했다.
그 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면서 나는 스스로를 대면하고 친밀한 관계들을 점검할 정서적 여유를 얻었다. 곧내가 특히 친밀함의 영역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만을 파트너로 택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야만 상대를 맹신하거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친밀감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없는 남자와 지내는 것은 내가 그와 정말로 가까워질 필요가 없음을 뜻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진정으로 친밀감을 원하며 자기희생적이고 관용적인 여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관계'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자신을 보며 우쭐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밀감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은 우울감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을 완벽한 공격 대상으로 만든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존 그레이가끊임없이 말했듯 남자가 가까이 오기를 원하지 않으면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그들은 친밀한 교류를 위해 다가오는 당신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따뜻하고 개방적인 여자는 남자가 닫아버린 마음을 열어줄 촉매를 자신이 제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런 종류의 남자를 고른다. 그들은 마음을 열려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은 보통 실패한다. 양육자이자 보살펴주는 사람으로 훈련된 여성들은 종종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들은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믿도록 사회화된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친밀감을 피하는 남자와 친밀감을 원하는 여자라는 두 다른 가치 체계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감을 자극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만족스럽지 못한 작용들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친밀감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혼자 지내게 되면서 나는 친밀감의 측면에서 내 관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는 커리어나 소명과 같은 것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많은 여자들처럼, 남자와의 관계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대가를 치러야 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엄마가 아빠의 온갖 시중을 드는 가부장적 가정에서 자랐다. 아빠의 시중을 들지 않을 때면, 엄마는 자식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엄마 자신의 요구는 거의 충족되지 않았다. 좋은 엄마는 가족의 안녕 외에 자신의 욕망을 가지지 않는 존재라고 믿어온 엄마가 스스로의 요구나 욕망을 분명히 표현해본 적이나 있었을지 의문이다. 내가 봐온 대부분의 결혼이나 관계에서 여자는 언제나 보살피는 역할을 주로 맡았고 자신의 발전을 위한 시간은 거의 갖지 못했다.
에버그린 주립대의 총장이었던 제인 저비스는 '삶을 구성하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다 가지긴 어렵다'라는 연설에서 중년의 나이에 생화학 학위를 받으며 모범을 보이고 자녀들이 고등교육을 받도록 격려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처음에 제인은 엄마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다른 여성처럼 결혼 후 남편의 그늘에 살기를 택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서른몇 살이 되어 부엌 캐비닛을 뒤지며 살던 때를 기억합니다. ・・・) 그 안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 인생의 캐비닛 속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어요. 애들 중 홀리는 참치 샐러드 속에 든 양파는 싫어했고, 샐러리를 좋아했죠. 신디는 양파를 좋아하고 샐러리를 싫어했고요. 켄은 양파와 샐러리를 다 좋아했어요. 그래서 나는 늘 세 종류의 참치 샐러드를 만들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은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무엇보다 그녀의 발전은 대학 새내기 때 사랑에 빠지면서부터 멈춰 있었다. 문제는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상호 간 성장과 발전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결혼 관계 속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여전히 상호간 성장을 결속의 원칙으로 삼는 이성애적 관계는 너무나 드물다. 적어도 내가 대학에서 본 바로는 그런 상호적 사랑을 보여주는 예는 없었다.
좋아하는 여성 작가들의 삶을 공부하며 나는 그 문학적 멘토들이 사랑을 향한 나의 탐구에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열렬한 팬인 나는 그녀가 아이들이 깨기 전 새벽 일찍 일어나 시를 써야 했다는 구절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또한 플라스가 작가,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여러 욕구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다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울어버렸다. 이렇게 역할모델이 부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떤 길을 택해야할지 몰랐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동시에 의미 있는 관계도 원했다. 여러 관계 사이에서 함몰되고 소모되다가 내 예술적, 지성적 능력이 분산될까 두려워한 나는 정서적으로 많이 요구하지 않고 나의 노력을 지지해주는 남자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나는 정서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그들의 특성이 곧 개인적 성장 미숙이나 정서적 관용의 부족과 관계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그들도 나처럼 두려웠을지 모른다. 싱글맘의 과보호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를 두려움, 여성이 자신들의 선택이나 행동을 지나치게 통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상대를 고를 때 무엇보다 어려운 건 어떻게 파괴적 행동 패턴이 나타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돌봄 능력을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주된 사랑의 요소로 여기도록 키워졌기 때문에, 쉽게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설득당한다. 여자들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자에게 양육된 적이 없으므로, 상대 남자의 보살핌에 몹시 끌리게 된다. 내 상대들은 각기 내 지적이고 창의적인 작업들을 지지해주었고, 나는 그걸 지금도 고마워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의 미숙한 정서적 반응은 내 정서적 성장을 지연시킨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주된 정서적 양육자라는 사실에 도취된 여자들은 마음의 문제에 있어 거만하다. 여자들이 사랑하는 법을알고 있으며 욕망과 행동을 동일한 것이라고 믿게 하는 성차별적 사회가 만든 신화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본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까지 수많은 관계의 실패를 겪을 것이다. 많은 여성이 존 그레이나 수전 제퍼스, 바버라디 앤젤리스, 팻 러브나 다른 인기 자기계발서 작가들이 사랑에 대해 쓴 책을 집어 든다. 이성애적 관계를 제대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다. 그런 책들이 수백만 부씩 팔린다는 사실은 일면 독자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 책들은 친밀한 관계에 대한 실용적 논의를 전해주는 주요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런 책은 정작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만 제공한다. '사랑을 만들어가는 것은 관계가 작동하게 하는 것과는 다른데 말이다.
사랑에 대한 주제를 다룬 훌륭한 책 중 하나는 1992년에 처음 출간된 존 브래드쇼의 『사랑 만들기』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에 관한 책으로 가장 잘 알려진 브래드쇼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식 사랑에 대한 충고에서 벗어나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는 데 가부장적 사고가 미친 영향에 대해 과감하게 논한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만큼 현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독자들은 책을 샀지만,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한 가부장적 방식을 타파할 용기를 내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자들에게 스스로를 남자들보다 사랑에 적합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남자들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를 애정을 갈구하는 여자들 탓으로 돌리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도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브래드쇼는 자기계발서들의 규범이 되어버린 상호보완적 성차라는 유행어에 갇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심지어 우리의 부모조차 종종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이제는 학대라고 부르는 것과 사랑을 혼동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심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문화적 토대를 이루는 가부장제의 지배를 학대와 연결하면서 사랑보다 권력의 내러티브를 높이 사는 전반적인 문화적 경향을 조명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가정폭력을 겪지는 않았으며, 대부분 가부장적 사고를 옹호하고 높이 사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여자들이 배우자인 남자들보다 사랑을 주는 데 능숙하다고 믿도록 교육받으며 가부장적 추정들을 수용하는데, 이런 추정은 친밀한 관계 내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 방식을 형성한다. 여성이 사랑에 더 적합하다고 믿는 남성과 관계를 맺는 여자들은 남자의 정서적 결핍을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남자가 수동적이리라 예상한다고 해서 곧 남자가 정서적으로 더 적극적이길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도 기대한다. 이때 발생하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는 가부장적 사고가 남자들에게 정서적 수동성을 남성성이라 믿게끔 사회화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훈련은 남녀 간의 차이를 만들어내 우리가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며, 이는 동시에 갈등의 토대를 이룬다.
여자들이 더 노력함으로써 남녀 간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성차별적 사고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는데도 여자들은 가부장제에 기꺼이 헌신하려 한다. 자신이 변화하면 남자도 더 헌신하리라는 생각에 매달리는 여자들은 브래드쇼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때 가부장제는 강화되고, 남녀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세계는 더욱 요원해진다. 따라서 남녀 모두가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 것만이 지속 가능하고 의미 있는 상호적 사랑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다.
궁극적으로 사랑받고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여자들은 성차별적 전제를 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역 또한 성립한다. 기본적으로 남성의 정서관을 존중하면서 사랑에 대해 접근해야만 그가 아직 사랑하고 사랑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다. 『구명구』에서 저명한 심리치유사인 저자 해리엇 러너는 “남녀가 진정으로 평등한 다른 세계에서는 남자 혹은 여자와의 친밀한 관계가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해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진다.
오만하고 순진하게도 나 역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다정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우리 여자들은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찾으며, 발견하면 축하하는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사랑에서 비롯한 실망에 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집단이었다. 이성애적 사랑과 로맨스의 경우, 우리는 남자가 문제라고 확신했다. 콧대 높은 오늘날 페미니즘은 정서적 영역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여성 대부분은 양육자, 보살피는 사람으로 훈련받은 스스로를 더 나은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중 많은 이가 강압적이고 종속적이며 미성숙한 여성, 때때로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언어로 학대하는 여성에게 길러졌으면서도 여전히 '친절한 존재라는 여성의 이미지에 매달렸다. 1980년대 초에 출간한 내 두 번째 책 『페미니즘:주변에서 중심으로』에서 나는 한 챕터를 할애해 성인여성의 아동 학대를 언급하며 여성이 남성보다 덜 폭력적이고 잘 보살피는 존재라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나는 어머니가 아이를 학대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폭력적 행위에 대한 트라우마를 최소화하고 자신을 이상화하기 위해 반대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언어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학대의 주된 주체인 아버지는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돌보지 않았으며 이상화되지도 않았다. 희생적인 순교자로서 엄마들은 거의 항상 아이들을 돌보며, 심지어 지배와 보살핌을 동시에 행했다. 실제로 종종 가학적 모성애는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에서의 사도마조히즘적폭력과 사랑을 혼동하게끔 세뇌시켰다. 종종 남자들이 상대여자에게 행하는 언어적 모욕은 여성들이 경험한 가부장적 엄마들의 지배와 처벌의 양식과 닮아 있다.
오랫동안 나는 엄마를 성차별적 가부장 남성에 의한피해자로 보면서 이상화하고 우상화했다. 한참이 걸려서야 사실은 엄마 또한 가부장제를 믿었기에 더 강력한 남성에게 희생당하는 동시에 그 희생을 통해 가부장제와 결탁했음을 깨달았고, 그제서야 두 가지 방식으로 엄마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방식이 가능할 때조차 가부장적 사고를 계속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엄마가 자발적으로 선택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때로 엄마가 강압적이고 난폭해질 때 아빠 탓만 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여성적 이상이나 미적 기준에 미달할 때 딸들을 멸시한 건 아빠가 아니라 엄마였다. 엄마는 기준을 상정했고 우리가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처벌할 척도를 정했다. 낸시 프라이데이는 『미의 권력』에서 특히 모녀관계를 통해 이상화된 여성성을 벗겨내야 한다고 강조하며 모성적 사디즘에 관해 기록한다. "소녀들이 엄마의 딸이지만 엄마의 복제품이 아닌 개별적 인간으로 키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다른 여성의 반감을 살까 봐 두려워하며 승인을 갈구할 것이다." 모성적 사디즘과 그것이 여성의 자존감에 가한 충격, 그것이 사랑에 대해 알 능력을 억제한 방식은 금지된 주제로 남아있다. 가부장제는 너무 오래 여러 측면에서 엄마들을 비난해왔기에, 부정적인 전형을 강화하지 않고 엄마들을 비판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보살피는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이상형은 사회에서 너무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건 가부장제가 승인해준 여성에 관한 몇 안 되는 긍정적 자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이런 자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거나 싫어한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만약 여성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특성이 그것이라면,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특성이 그것 하나라면,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 믿음을 붙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는 나이를 막론하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사랑의 기술을 쉽게 배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에 관심을 갖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을 들여 사랑을 배우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남성보다는 더 지지받을 것이다.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들보다 더 사랑을 원하고 사랑에 적합한 존재라는 추정은 종종 사랑이나 친밀함과 관련해 생기는 문제들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여성이 중년이 되어서야 사랑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너무 사랑하는 여자』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책 대신 여성이 어떻게, 왜 사랑하는지에 관한 책을 읽었다면 우리의 문화와 사랑의 의미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상상해보자. 만약 그랬다면 여성들은 자기계발을 가장해 자신들을 비난하는 책을 읽는 대신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 위해 자기 마음과 정신에 집중했을 것이다. 거짓과 가장이 아닌 현실을 직면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사랑을 찾는 여성 중 “소수만이 가전제품이나 차를 살 때처럼 명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파트너를 평가하고 고른다"라는 해리엇 러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성들이 사랑의 기술을 제대로 배운다면 현실은 달라질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이끌어냈음에도 여성이 주된 양육자가 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 양육자 역할과 우리가 아이에게 사랑에 대해 실제로 가르치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과 같은 가치는 엄마가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면 학교나 텔레비전 등을 통해 습득된 것일까? 물론 여성이 사랑을 너무도높이 평가한다면 아들에게든 딸에게든 사랑의 중요성을 가르칠 것이다. 여성들 역시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원하는 만큼 그런 욕망을 진지하게 연구할 대상으로 보지않는 건 분명하다.
여성은 친밀함의 속성과 관계를 잘 이끌 방법을 배우는 데 남성들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을 들인다. 놀라운 건 그럼에도 여성들은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지도, 사랑을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줄 지식 집단을 만들지도, 사랑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다양하게 생산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이제 여성들이 사랑의 사회적 재평가를 요구할 때가 되었다. 그것은 사랑을 저평가하게 된 구체적인 역사를 알고자하는 의지에서 시작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라는 성차별적 전형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아무리 어렵고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랑의 작업을 수행하겠다는 확실한 의지에 근거해야 한다.
제인 저비스는 페미니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내가 어떤 참치 샐러드를 좋아하는지를,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요리해서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원한다면 그 방식대로 가정의 요리법을 정해도 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른네 살에 대학원에 입학했고, 이혼했으며(“남편은 내 새로운 열정에 기뻐하지 않았어요"), 마흔 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자신을 찾았고, 정서적으로 준비가 되었기에 상호적인 사랑을 찾았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면서 상호적인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우리 자신, 우리가 가장 잘 알고 변화시킬 수 있는 스스로의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이다.
결코 나를 떠나거나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여성인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서 사랑의 탐색은 시작되어야 한다. 이 여정은 친밀감과 진정한 사랑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사고와 믿음을 재검토하는 데서 출발한다. 여성이 천성적으로 사랑에 적합한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고 사랑을 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주체성과 개인적 성장, 정서적으로 열린 마음을 얻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사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