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專氣致柔(전기치유) : 기를 모아 부드럽게 함에
能嬰兒乎(능영아호) : 갓난아이처럼 되게 할 수 있는가?
滌除玄覽(척제현람) : 섬돌을 씻어 신비로운 거울이 되게 함에
能無疵乎(능무자호) : 한 점 티가 없게 할 수 있는가?
愛民治國(애민치국) :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能無爲乎(능무위호) : 무위(無爲)로 할 수 있는가 ?
天門開闔(천문개합) : 하늘의 문을 여닫음(성인의 도를 행함)에
能爲雌乎(능위자호) : 암컷처럼 할 수 있는가?
明白四達(명백사달) : 밝고 분명한 뜻을 온 천하에 알림에
能無知乎(능무지호) : 무지(無知)로 할 수 있는가?
生之畜之(생지축지) : 낳고 길러주면서,
生而不有(생이불유) : 낳았음에도 소유하지 않고(不有)
爲而不恃(위이불시) : 위하였음에도 기대하지 않고(不恃)
長而不宰(장이불재) : 다스리면서도 휘두르지 않는다(不宰).
是謂玄德(시위현덕) : 이를 일러 '현덕(玄德)' 내지는 '그윽한 덕'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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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을 실어 하나로 안음에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를 모아 부드럽게 함에 갓난아이처럼 되게 할 수 있는가?
섬돌을 씻어 신비로운 거울이 되게 함에 한 점 티가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위(無爲)로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을 여닫음에 암컷(雌)처럼 할 수 있는가?
밝고 분명한 뜻을 온 천하에 알림에 무지(無知)로 할 수 있는가?
낳고 길러주면서,
낳았음에도 소유하지 않고,
위하였음에도 기대하지 않고,
다스리면서도 부리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덕(玄德)' 내지는 '그윽한 덕'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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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혼백을 하나로 감싸안고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기기에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갓난아이 같은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지'를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
여인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밝은 깨달음 사방으로 비춰 나가
무위無爲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얼컬어 그윽한 덕玄德이라 합니다.
<노바당 역>
혼백을 하나로 감싸안고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기에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갓난아이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티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위”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천자의 입을 열고 닫음에
여인과 같을 수 있겠는가
밝은 깨닭음 사방으로 비춰 나가
무지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겠는가
낳고 기르시오
낳았으되 소유하지 마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고 하지 마시오
지도자가 되어 지배하려 하지 마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한다
<임채우 역>
10 정신을 하나로 모아
움직이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기운을 모아 부드럽게 만들어
어린아이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때를 깨끗이 닦아내어
흠 하나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자연이 변화하는 대로
저절로 따를 수 있겠는가?
사방을 환히 알면서도
작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며,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일을 하지만 뽐내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James Legge 역>
1. When the intelligent and animal souls are held together in one embrace, they can be kept from separating. When one gives undivided attention to the (vital) breath, and brings it to the utmost degree of pliancy, he can become as a (tender) babe. When he has cleansed away the most mysterious sights (of his imagination), he can become without a flaw.
2. In loving the people and ruling the state, cannot he proceed without any (purpose of) action? In the opening and shutting of his gates of heaven, cannot he do so as a female bird? While his intelligence reaches in every direction, cannot he (appear to) be without knowledge?
3. (The Tao) produces (all things) and nourishes them; it produces them and does not claim them as its own; it does all, and yet does not boast of it; it presides over all, and yet does not control them. This is what is called 'The mysterious Quality' (of the Tao).
<Lin Derek 역>
In holding the soul and embracing oneness
Can one be steadfast, without straying?
In concentrating the energy and reaching relaxation
Can one be like an infant?
In cleaning away the worldly view
Can one be without imperfections?
In loving the people and ruling the nation
Can one be without manipulation?
In the heavenly gate’s opening and closing
Can one hold to the feminine principle?
In understanding clearly all directions
Can one be without intellectuality?
Bearing it, rearing it
Bearing without possession
Achieving without arrogance
Raising without domination
This is called the Mystic Virtue5
<장 도연 역>
제10장 영혼과 형체를 하나로 묶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영혼과 형체를 하나로 묶어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氣)를 모으고 몸을 부드럽게 한다 하여
갓난아기가 될 수 있는가?
잡념을 없애고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 하여
흠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린다 하여
지교(智巧)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각 있는 기관(器官)을 열고 닫으면서
암컷처럼 부드러움을 지닐 수 있을까?
지혜가 밝아 사방을 통달하면서
억지로 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물을 낳고 기르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공에 기대지 않고
통솔은 하면서도 주재(主宰)하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덕(德, 수양)이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일상의 거처에서 하나를 안아 (이러한 상태를)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석>
이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장석창(蔣錫昌)은 왕필의 주를 이상하다고 비판하면서, 재(載)는 재(哉)로서 윗구절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이 구절의 뜻은 정신을 일념으로 모으는 것으로 보았으나, 주겸지(朱謙之)는 여기에서의 영백(營魄)은 체백(體魄)의 뜻으로 양신(陽神)에 대한 음귀(陰鬼)에 해당되며, 전체적으로 형체와 영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노자교고』(老子校詁), 54~56쪽 및 『노자교석』(老子校釋), 37~39쪽 참조.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재(載)는 처한다는 뜻이다. 영백(營魄)이란 사람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요, 일(一)은 사람의 참된 근본이다.(즉 사람의 정신은 항상 작용하고 있지만 정신의 작용이 그친 한결같은 상태가 본질적 근원이다.) 사람이 항상 거주하는 집에 처해서, 하나를 안고 정신을 맑게 하여(혹은 하나의 맑은 정신을 안고서) 항상 여기에서 떠나지 않으면 만물이 저절로 복종할 것이라는 말이다.
載, 猶處也. 營魄, 人之常居處也. 一, 人之眞也. 言人能處常居之宅, 抱一淸神能常無離乎, 則萬物自賓也.
기운을 모아 부드럽게 만들어서 어린아이와 같게 할 수 있겠는가?
專氣致柔, 能嬰兒乎?
전(專)은 맡긴다는 뜻이고, 치(致)는 지극하다는 뜻이다. 자연스런 기(氣)에 맡기고 지극히 부드럽게 조화를 이룸이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 욕심이 없는 것과 같은 정도에 이르면, 사물은 온전히 존재하게 되고 타고난 본성도 얻을 수(즉 자기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專, 任也. 致, 極也. 言任自然之氣, 致至柔之和, 能若嬰兒之無所欲乎, 則物全而性得矣.
현묘한 거울의 때를 깨끗이 닦아내어 흠 하나 없이 할 수 있겠는가?
滌除玄覽, 能無疵乎?
현(玄)은 사물의 극치다. 비뚤어진 꾸밈을 씻어내버려 사물을 완전히 비추게 되어, 능히 외물이 그 밝음을 가리지 않고 그 정신을 병들게 하지 않을 수 있으면, 마침내 현묘함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玄, 物之極也. 言能滌除邪飾, 至於極覽, 能不以物介其明, 疵(之)其神乎, 則終與玄同也.
<주석>
현동(玄同)이란 말은 『노자』 56장에 나온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愛民治國, 能無知乎?
술(術)을 써서 성공을 구하고 수(數)를 부려서 감춰둔 것을 뒤지는 것이 바로 지혜(즉 꾀)란 것이다. 현묘하게 비추는 데에 흠이 없다면 성(聖)을 끊어버린 것과 같고, 나라를 다스릴 때에 꾀를 쓰지 않는다면 지(智)를 버린 상태와 같으니(즉 지혜를 버림으로써 오히려 사물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으니), 능히 지모를 부리지 않을 수 있다면 백성들이 편벽되지 않게(혹은 피하지 않으니)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주석>
윗사람들이 지혜를 쓰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고 어지러워지지 않아서, 결국 백성들이 백배나 되는 이로움이 있게 된다는 뜻이다. 『노자』 3장, 19장, 20장 참조. 혹은 『노자』 17장 왕필주에 “不能以正齊民, 而以智治國, 下知避之”에 의거하면 벽(辟)자는 ‘피한다(避)’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任術以求成, 運數以求匿者, 智也. 玄覽無疵, 猶絶聖也. 治國無以智, 猶棄智也, 能無以智乎, 則民不辟而國治之也.
하늘의 문은 여닫히면서 변하는데 암컷처럼 할 수(즉 저절로 따를 수) 없겠는가?
天門開闔, 能無雌乎?
<주석>
무자(無雌)는 『백서노자』 을본에 위자(爲雌)로 되어 있다.
천문은 천하가 말미암아 나오는 곳을(혹은 따르는 바를) 말한다. 열고 닫음이란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때를 말한다. 천하를 관통해서 혹 열리기도 하고 혹 닫히기도 하므로 ‘천문개합’(天門開闔)이라고 했다. 암컷은 응답하기는 하되 먼저 부르지 않고 따를 뿐 작위하지 않으므로,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음이 암컷처럼 될 수 있다면 사물이 저절로 귀순하고 거처가 저절로 편안해진다는 말이다.
天門, 謂天下之所由從也. 開闔, 治亂之際也. 或開或闔, 經通於天下, 故曰天門開闔也. 雌應而不[唱], 因而不爲, 言天門開闔能爲雌乎, 則物自賓而處自安矣.
사방을 환하게 알면서도 작위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明白四達, 能無爲乎?
지극히 밝아서 사방에 모두 통달하고, 미혹이 없으면서도 일부러 작위하는 것이 없으면, 사물이 자생자화하게 될 것이다. 이른바 도는 늘 무위하니, 왕후가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자생자화하게 된다는 말이다.
言至明四達, 無迷無惑, 能無以爲乎, 則物化矣. 所謂道常無爲, 侯王若能守, 則萬物[將]自化.
<주석>
이 구절은 『노자』 37장에 나온 말이다.
낳아주고
生之,
그 근원을 막지 않는다.
不塞其原也.
길러주며
畜之,
만물의 타고난 본성을 금하지 않는다.
不禁其性也.
낳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작위하지만 뽐내지 않으며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 것을 일러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그 근원을 막지 않아서 사물이 저절로 생겼으니 무슨 공(功)이 있겠는가? 그 본성을 금하지 않아서 만물이 스스로 제도되었으니 무엇을 뽐내겠는가? 만물이 저절로 자라고 넉넉하니 내가 부려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만물을 낳고 길러주는) 덕은 있으되 (소유하는) 주가 없으니 현묘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릇 현묘한 덕이라 함은 덕이 있으되 그 주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윽히 어두운 데서 나온다는 말이다.(즉 알 수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不塞其原, 則物自生, 何功之有? 不禁其性, 則物自濟, 何爲之恃? 物自長足, 不吾宰成, 有德無主, 非玄而何? 凡言玄德, 皆有德而不知其主, 出乎幽冥.
<Stefan Stenudd 역>
Can you make your soul embrace the One
And not lose it?
Can you gather your vital breath
And yet be tender like a newborn baby?
Can you clean your inner reflection
And keep it spotless?
Can you care for the people and rule the country
And not be cunning?
Can you open and close the gate of Heaven
And act like a woman?
Can you comprehend everything in the four directions
And still do nothing?
To give birth to them and nourish them,
Carry them without taking possession of them,
Care for them without subduing them,
Raise them without steering them.
That is the greatest virtue.
Modest Omnipotence
There is great power in attaining the wisdom Lao Tzu describes in his book, but anyone reaching that wisdom first and foremost learns the importance of modesty. This is a contradiction, almost a paradox.
It can be compared to what Jesus said about the meek: They are blessed,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Matthew 5:5).
Not that modesty is the moral obligation of somebody enlightened and elevated. Lao Tzu makes few arguments of that kind in the Tao Te Ching . Instead, modesty is the conclusion, the key to how the world works according to Tao. Without modesty, neither Tao nor the world can be properly understood.
“The One” in the first line of this chapter is no doubt Tao, the Way. If your soul grasps it, how can you keep your soul from escaping you? How can you remain sound and in control of your senses?
Modesty is the solution. You observe the inner workings of the universe, but you understand that there is little to do about it. Nothing has changed as a result of your understanding. So you remain grounded in yourself, although you have grasped the secret of the universe.
The secret lies in the calm primordial law that arranged all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effortlessness. The greater the power, the less its effort is. So, modesty surpasses pride and keeps you sane in the middle of the cosmic spectacle.
It’s the same with the power so grand that it allows you to open and close the very gates of heaven, as if you were a god. Still, you should have no ambition, but be caring like a mother and accept the yielding position which was traditionally that of the woman.
You should have no wish to rule, or to make use of the powers you have at hand. Then you understand when to do nothing, which is usually the best.
To Lao Tzu, this attitude is the female one, and he definitely prefers it – for men as well. Traditionally, men have sought power and were eager to use it in abundance, while women preferred to leave things be, in order to do the least damage. That’s the wisdom of doing nothing.
The Vital Breath
The vital breath that Lao Tzu mentions is ch’i (also transcribed qi ). He uses the term in chapter 42 and 55, too. This is a fundamental concept in the cosmology of ancient China. It’s a life energy filling the cosmos as well as mankind, an essence without which there is no life. It flows through us and around us, similar but not identical to the air we breathe. It’s what is treated in acupuncture, by stimulating its meridians inside the body. It’s also essential in the practice of qigong , the martial arts, and many other traditions.
The idea of such a life force is present in many other cultures. In India it’s called prana , in old Greece pneuma , in Israel and the Arab world ruach . The Latin word is spiritus , the spirit, as in the biblical concept of the Holy Spirit.
The Chinese concept is mainly, at least in Lao Tzu’s perspective, a nourishing power at man’s disposal, of which we can have more or less, according to how we exercise it. Its nourishing quality is evident in the components of its pictogram.
Ch’i consists of two parts. One is the sign for rice, and the other that for steam or air. This suggests boiling rice, the way to make the basic food of the East edible. Indeed, the boiled rice is what has kept the Chinese alive for thousands of years. So, the sign suggests essential nourishment without which one cannot live.
Lao Tzu seems to have had an uncomplicated and straightforward view on ch’i as a vital essence in man, stronger in some than in others. What he asks in the tenth chapter is whether you are able to remain soft and gentle, even if this spirit of yours is strong.
Power tempts us to express it, and this ambition hardens us. When we are eager to show our strength, our muscles stiffen and our movements get clumsy. Our behavior becomes rude, and we easily damage our surroundings as well as ourselves.
The flow of ch’i through one’s body may be weak like rain or strong like a waterfall, but our attitude should remain the same. Strength is no reason to use force.
Virtuous Caring
The last few lines of the chapter speak about “them,” meaning people, from the perspective of a parent, a leader, an elder, or a ruler. It’s all the same. Whatever your role, you must treat people as gently as if you had no power at all over them. Even if you are in the position to give orders, you should ask. Even though you are sure that you know what’s right for them, you must allow them to choose for themselves.
You can suggest and assist, but not command. That will only lead to opposition and conflict. Also, it robs people of the chance to come to their own sound conclusions. You should treat people around you like loving parents treat their children.
Parents, too, must understand not to use force on the children in their care. Gentle guidance should be enough, preferably so that they are unaware of being guided. Children as well as adults need to feel that they have their future in their own hands. Only then are they able to listen to advice wholeheartedly, and follow them without frustration or remorse.
The greatest virtue of such a respectful attitude is its gentleness, its refusal to use the power at hand. This is in accordance with Tao, the Way, which acts in the same discreet manner. No virtue is greater than to be like Tao.
In chapter 51, Lao Tzu describes this very gentleness of Tao, ending it with the exact same phrase about the greatest virtue. Of course, Tao is nothing but the greatest virtue.
The Chinese word translated to virtue is te , which is also in the title of the book. I will return to it in coming chapters.
<사봉 역>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혼(魂)과 백(魄)을 하나로 묶어
能無離乎( 능무리호)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專氣致柔(전기치유)
기를 모아 몸을 유연하게 만들기를
能孀兒乎( 능영아호)
어린아이같이 할 수 있겠는가?
滌除玄覽(척제현람)
마음 거울을 씻어
能無疵乎(능무자호)
먼지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愛民治國(애민치국)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能無爲乎(능무위호)
무위로 행할 수 있겠는가?
天門開闔(천문개합)
감각기관을 맘대로 열고 닫는
能無雌乎( 능무자호)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明白四達(명백사달)
온 세상을 밝게 이해함에 있어
能無知乎(능무위호)
배움 없이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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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이고 하나를 껴안되
능히 떨어짐이 없겠는가.
기운을 고르게 하여 부드러움에 이르되
능히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
거뭇한 거울을 닦아서
능히 흠을 없앨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살리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도
능히 암컷처럼 할 수 있겠는가
명백히 알아 사방으로 통달하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아주고 길러주되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길러주면서도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戴營魄抱一, 能毋離乎. 專氣至柔, 能嬰兒乎. 脩除玄監, 能毋疵乎. 愛民活國, 能毋以知乎. 天門啓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毋以知乎. 生之畜之, 生而弗有, 長而弗宰也, 是謂玄德.
[戴營魄抱一, 能毋離乎]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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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건건 해석의 차이가 드러나는 章
전반부의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滌除玄覽(척제현람) 明白四達(명백사달) 能無爲乎(능무위호)에서 그렇고
후반부의 生之畜之(생지축지) 生而不有(생이불유) 爲而不恃(위이불시)에서 그렇다
전반부의 경우,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도 번역하기 어려운 글자가 있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로 하고
후반부의 경우,
生, 畜, 有, 爲와 같이 누구나 알고 있는 글자임에도 번역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단순히 글자의 어려움을 넘는 문제인 듯 싶다
후반부를 살펴보면,
生之畜之(생지축지)
- 창조(생성)하고 육성하시오
- 낳고 기르시오?
- 살면서 쌓으시오?
- 짐승같이 자연스럽게 사시오?
* (生) 낳느냐 사느냐의 차이
* (畜) 기르느냐, 쌓느냐, 짐승이냐의 차이
生而不有(생이불유)
- 살지만 소유하지 마시오?
- 살지만 드러내지 마시오?
* (有) 소유하느냐 드러내느냐의 차이
爲而不恃(위이불시)
- 爲하였지만 기대지 마시오?
- 꾸밈에 기대지 마시오?
* (爲) 하느냐, 꾸미느냐의 차이
그런데 도덕경의 어떤 버젼에는 無爲(무위)와) 無知(무지)의 위치가 서로 바뀌어 있는데 이를 어쩌나
愛民治國 能無知乎 vs 愛民治國 能無爲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vs 明白四達 無知乎
또 能無雌乎(능무자호)의 경우 어떤 버젼에서는 無雌(무자)가 아니라 爲雌(위자)로 되어 있는데 이건 또 어쩌나
天門開闔 能無雌乎 vs 天門開闔 能爲雌乎
어쨌거나,
이 장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자구,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一 도덕경 비교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11장) 三十輻共一穀, 當其無, 有車之用
(14장) 故混而爲一, 其上不교, 其下不昧
(22장)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도덕경 비교
(2장)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10장)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17장) 悠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34장) 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 而不爲主, 可名爲大
(51장) 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元德
(77장)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弱(柔) 도덕경 비교
(3장) 實其腹, 弱其志
(10장) 專氣致柔, 能嬰兒乎
(36장) 將欲弱之 / 柔弱勝剛强
(40장)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43장)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52장) 見小曰明, 守柔曰强
(55장) 骨弱筋柔而握固
(76장) 人之生也 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 强大處下 柔弱處上
(78장)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莫之能勝 / 弱之勝强, 柔之勝剛
無爲 도덕경 비교
(2장)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3장)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10장) 明白四達 能無爲乎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38장)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43장)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57장)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63장)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64장)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無知(學) 도덕경 비교
(3장)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20장)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64장)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生 도덕경 비교
(2장)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7장)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10장)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15장)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료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30장)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34장)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 而不爲主, 可名爲大,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39장)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 萬物無以生, 將恐滅
(40장)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46장) 天下有道, 卻走馬以糞,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47장)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50장)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시虎, 入軍不被甲兵, 시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夫何故, 以其無死地.
(51장) 道生之, 德畜之 /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元德
(55장)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59장)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64장) 合抱之木, 生於毫末
(72장) 民不畏威, 則大威至, 無押其所居, 無厭其所生
(75장)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76장)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兵, 强大處下, 柔弱處上
嬰兒 도덕경 비교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20장)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沌沌兮若無所歸
(28장)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抱 도덕경 비교
(10장)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19장)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22장)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
(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54장)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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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17
10장 장이부재(長而不宰)와 지도자의 덕망
<혼백이 하나를 품고, 그 하나를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氣)를 전일(專一)하게 하고 더없이 부드럽게 하여, 능히 갓난아기 같을 수 있겠는가? 어두운 거울(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씻어 능히 흠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꾀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1) 애민치국(愛民治國)의 조건
(1) 포일(抱一) : 포일은 글자그대로 ‘하나(一)’를 껴안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는 무엇을 뜻하는가? 해석이 여러 가지일 수 있겠지만, 왕필의 해석을 따른다면 ‘하나’는 사람의 진리(眞理)를 뜻한다(一, 人之眞也). ‘하나’를 사람의 진리라고 하지만 더욱 확대 해석해 본다면, 진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 하여 일과 다를 포괄적이고도 통전적으로 설명하는데, 하나 속에 내포된 비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에서 ‘하나(一)’는 천지인(天地人)을 모두 내포한다. 하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모두 아우르는 정신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하나’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뜻인 하나에 대한 인격적 존칭이다. 이 한 분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가 된다. 예수의 표현 속에서 찾아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복음 10:30).” 하늘 아버지의 뜻과 아들 예수의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의 신분이 되면서 천하가 그에게로 말미암고 또 그에게 통일된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 1:15-17).”
사도 바울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복음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라고 권면 했다(빌립보서 1:27, 2:2). 복음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복음은 생명, 평화 기쁨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뜻이 다를 수 있는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나가 되고 진리인 하나를 품으며 산다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다자(多者)를 일자(一者)로 품을 수 있는 것은 그 만큼 그릇이 커야한다. 하나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도량이 넓어져야 한다. 그릇만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포일(抱一)의 세계는 내가 하나를 품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 속에 편입되고 동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진리를 품는 것이기도 하지만 진리가 나를 품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 된다. 이른바 주객의 세계가 완연한 일치를 보는 단계다. 이 단계는 곧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단계다.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며, 지상에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곧 일심동체(一心同體)의 세계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세계가 아닐까?
그리스도인이 하나를 품는다는 것은 진리를 품는다는 것이며, 진리를 품는다는 것은 복음을 품는다는 것이다. 복음 속에는 모든 차별과 다양성이 하나로 포섭된다. 복음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는 하나님의 전모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을 위하여 넓은 도량을 가지고 하나를 품는 ‘포일(抱一)’의 정신세계를 지니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도자에게 있어서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애민치국’의 조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부드러움(柔) : <도덕경>에서 ‘부드러움(柔)’은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로 간주된다. 그래서 26장에서 부드러움은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柔弱勝剛强)고 한다. 43장에서도 ‘천하에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 지극히 견고한 것을 이긴다(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고 했고, 76장에서도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놓이지만,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놓인다(强大處下, 柔弱處上)’고 했다. 모두가 같은 맥락이다.
기(氣)를 오로지 전일하게 함으로써 지극한 부드러움을 이룬다(專氣致柔) 할 때, ‘부드러움’은 강함보다 우선시 되는 덕목이라 하겠다. 이러한 부드러움을 <도덕경>에서는 영아(嬰兒)에 종종 비유하고 있다. 28장에서 갓난아이인 영아(嬰兒)를 돌아가야 할 상태의 도(道)에 비유하고 있는 것도, 그 부드러움의 특징을 두고 이르는 것이다. 예수가 청종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마태복음 18: 3)”고 한 예를 생각나게 한다. 예수의 어린아이 비유는 제자들 가운데서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던 와중에서 주어진 대답이었다. 예수의 대답은 분명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3) 거울(覽)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라는 거울을 지니고 산다.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씻어 흠이 없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본문에서 ‘척제현람(滌除玄覽)’을 말하는 까닭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흠(疵)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能無疵乎). 흠이 있는 자는 지도자의 자리에 설 수 없다. 성서에서도 팔복 가운데 하나를 마음의 청결에 두고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라고 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지만, 마음으로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볼 수 없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지도자의 자격으로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사랑’(디모데전서 1:5)을 강조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윗도 시편에서 여호와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거짓맹세 하지 않는 자(시편 24:4)”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요건은 마음의 청결이다.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떳떳할 수 있는 자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곧 ‘애민치국’의 길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사랑하고 다스리는 일을 ‘꾀(知)’로 하지 않는다(愛民治國 能無知乎). 그렇다면 이상적인 지도자상과 애민치국의 상태는 어떤 것일까? 본문 속에서 두 가지의 상태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2) 애민치국의 이상적 상태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과 같을 수 있겠는가? 명백하게 사방으로 통달하여 인위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天門開闔 能無(爲)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1) 암컷(雌)의 비유 : <도덕경>은 도(道)에 대하여 수컷(雄)보다는 암컷(雌)을 들어 비유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6장에서 보았듯이 곡신(谷神)의 현빈(玄牝)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도를 수컷보다 암컷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각도에서 해석 할 수도 있지만, 앞서 보았듯이 강하고 단단한 것 보다는 부드러움을 더 소중히 여긴 것처럼, 여성적인 특유의 부드러움과 생산성 그리고 수용성을 도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본문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을 때, ‘하늘 문(天門)’이 암컷에 비유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암컷의 움직임이 열리고 닫히는 데는 억지나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움과 수용성에 기초하여 만물이 생성한다.
성서에서 ‘하늘 문’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 야곱이 베델에서 꿈을 꾸며 경험한 하늘 문(창세기 20:17), 모세가 광야에서 경험한 메추라기와 만나의 하늘 양식(출애굽기 16:4), 그리고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 그리고 땅과 만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신명기 10:14)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생성과 축복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하늘 문’이 열릴 때 가능한 것이다. ‘천문개합’이 암컷의 수용성에 있듯이, ‘하늘 문’도 하나님의 의지의 수용성에 따른다.
하나님은 그의 의지를 따르는 자에게 하늘 문을 어떻게 여시는가?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여시어,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 할 것이요(신명기 28:12).”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했다(28장 15-19). 솔로몬의 기도처럼, “주(主)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공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실 것(왕상 8:32)”이다.
성서에서 ‘하늘’은 하나님의 의지가 감행되는 처소에 비유된다. 따라서 ‘하늘’은 축복의 창(창 49:25, 출 16:4, 신 28:12)이자 동시에 진노의 시작을 알리는 문(신 11:7, 수 10:11, 삼하 22:14, 왕하 1:10)으로서, 심판의 자리(시 11:4, 14:2, 50:6, 97:6, 102:19)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을 향하여 빌기도 하고(신 32:1, 40, 왕상 8:22, 54, 시 123:1) 감사의 노래(시 136:5, 26, 148:1)를 부르기도 한다.
축복과 저주가 ‘하늘 문의 열리고 닫힘(天門開闔)’에 있다면, 암컷의 비유처럼 수용성과 순종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道)의 움직임이 아니겠는가? 암컷의 수용성이 하늘의 의지와 상통 할 때는 무한한 생성력의 창조적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암컷의 비유를 수동적인 기능으로 본 나머지 여성성의 열등성을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수용성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그 순응성은 무한한 창조성으로 연결되기에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무위(無爲): 애민치국의 이상적 상태로 앞서 살펴본 암컷의 비유 외에도 무위(無爲)를 들 수 있다. 3장에 이어 두 번째로 무위(無爲)의 개념이 본문에 다시 등장한다. 무슨 일에나 밝고 밝아서(明明白白) 사리에 두루 통하므로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인위적인 작위와 같은 무리수를 쓰지 않는 무위(無爲)가 가능 하겠는가 하는 문제다.
< 도덕경>에서 도(道)의 속성을 한마디로 언급한다면 ‘무위’다. 무위에 기초한 도는 자생자화(自生自化)의 세계다. 스스로 말미암으니 걸림도 없다. 자유의 세계요, 자발적 봉사의 세계다. 조건 없는 사랑의 세계요, 거짓 없이 투명한 진리의 세계다. 3장에서 말하는 대로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爲無爲則無不治).’ 그러므로 지도자가 무위를 터득하면 곧 애민치국에 이르게 된다.
3) 현덕(玄德)에 이르는 길
<낳고 기르며, 낳으면서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일을 해주지만 기대지 않고, 어른이라고 해서 주재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일컬어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1) 무소유(無所有) : 낳고 길렀지만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무소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무소유의 정신은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비움과 나눔의 정신과 상통한다. 자식도 내 소유가 아님은 물론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것(롬11:36)이다.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내어 놓음으로써 상대와 세계가 비로소 풍성해지는 법이다. 성서에서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고 했다. 이를 황금률이라고 한다.
(2) 기대지 않음(爲而不恃) : ‘생이불유 위이불시(生而不有, 爲而不恃)’ 이 본문은 이미 2장에서 언급된바 있다. 2장과 10장 본문에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아 <도덕경>이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고 편집적인 손질을 거쳤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동일한 문장이라 해도 각 장의 전후 내용과 문맥에 따라 상이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의는 동일하다. 기대지 말라는 것이다. 무소유 정신과 기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성숙한 인간만이 가능하다.
(3) 주재하지 않음(長而不宰) : ‘장이부재’라 할 때의 ‘장(長)’을 기른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다. 기르는 일과 어른의 일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러주지만 부리지 않는 경우나, 어른이지만 부리려고 하지 않는 것, 어느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특히 지도자의 경우에 있어서 권위형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다. 예수는 권위를 부리며 행세한 지도자가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등의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두벌 옷 이상을 가지지 말라는 무소유의 정신과 자식을 낳고 길러도 내 자식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부모요 형제라고 하는 생각, 그리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지만 거기에 기대지 않는 마음자세와 어른의 지위에 있어도 남을 부리지 않고 섬기는 정신이야 말로 애민치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현묘한 덕성을 지닌 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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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이고 하나를 껴안되 능히 떨어짐이 없겠는가
戴營魄抱一, 能毋離乎
이 문장은 이제까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설이 있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속시원하게 다른 설을 압도하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 현종의 신하들은 이 문장의 모호함을 해소하기 위해 맨 앞의 글자(통행본의 '載')를 '재(哉)'로 고쳐서 앞글(9)의 마지막에 갖다 붙이는 기발한 착상을 선보여 황제를 즐겁게 했고, 그후에 "천 년의 의혹을 풀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백서를 보면 맨 앞의 글자는 '재(載)'가 아니라 '대(戴)'여서 천 년의 의혹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재(載)'를 '재(哉)'로 고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戴)'는 그렇게 고치기 어렵다.
첫 글자는 모든 통행본에 '재(載)'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보통 싣는다는 뜻이다. "수레로 사람을 태우는 것을 재(載)라고 하는 것은 고금·세속의 통언이다(주희, 동사정 참조)." 그렇지만 과거에는 이설이 많았다. 가령 '부(夫)'와 같은 발어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고(육희성), 마치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고(여혜경), 더해진다〔加〕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오징). 그외에도 여러 다른 견해가 있다. 백서에는 '대(戴)'인데 이것은 머리에 인다는 말이다. 의미상 싣는다는 뜻과 통한다. 어렵게 풀이한 여러 해설보다 평범한 의미를 채택한 것이 옳았음을 백서가 방증해준다. 왕필은 이 글자를 처한다〔處〕는 뜻으로 보았는데 이 문장에서는 싣는다는 말과 뜻이 통한다. 하상공은 싣는다는 의미로 보았다.
더 문제가 많은 말은 '영백(營魄)'이다. 이 말의 해석에는 특히 '영'의 해석을 둘러싸고 너댓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영'은 영혼이다. 따라서 '영백'은 영혼(혼)과 육체(백)를 의미한다(하상공·임희일·범응원). 둘째, '영'은 '백(육체)'을 형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영백'이란 육체를 의미한다(소철·동사정·오징). 셋째, '영'은 밝게 빛난다〔熒〕는 뜻이다. '백'은 실제로는 혼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백은 영혼이라는 뜻이다(설혜). 넷째, '영'은 동사다. 따라서 '영백'은 육체를 경영한다 또는 육체를 보호한다는 뜻이다(육희성). 이외에도 '영'을 정해지지 않은 모습이라고 보는 등(초굉) 여러 설이 있으며, 특히 왕필은 '영백'이 사람이 항상 거처하는 곳이고 한 사람의 진수〔眞〕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번째 견해를 따라 '영백'을 몸으로 옮겼다. 이때 '영'은 군영(軍營)이라는 말에 군대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머문다는 뜻을 가지며(소철), 육체가 일정한 형상을 가졌다는 것을 표현해주는 말이다. 『문선』에 수록된 육기(陸機)의 「증종형시」에서도 "영백은 이 땅을 품에 안고, 정상(精爽)은 날아오르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한다"고 하여 영백을 '정상', 곧 마음과 대비시키고 있다.
채택하지 않은 견해 중 첫 번째 것은 '영'의 글자 뜻에 부합하지 않고(주희), 네 번째 것은 이미 '대(戴)'라는 동사가 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최근에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도 꽤 많은데, 그 강력한 근거는 『초사』 「원유」의 "영백을 싣고 구름 위로 오른다〔載營魄而登霞兮〕"는 구절에 대한 왕일(王逸)의 주였다. 왕일은 이 구절이 "영혼(靈魂)을 안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곧 '영백'이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사배의 발견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상 『초사』의 이 구절 및 왕일주를 먼저 언급한 것은 설혜다.
그런데 설혜는 현행 『초사장구』와는 달리 왕일이 해당 초사의 구절을 "영백(靈魄)을 안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해설했다고 하였다. 현행본처럼 '영혼'이 아니라 '영백'이다. 이어 설혜는 이것이 "대개 육체라는 것만을 지적한 것이다. 주자의 주도 왕일의 주와 같다"고 하였다. 곧 유사배는 왕일을 보고 '영백'이 영혼을 가리킨다고 하였지만 설혜는 왕일과 주희를 들어 그것이 육체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현행본 『초사장구』는 유사배의 인용처럼 되어 있지만 설혜를 보면 청대에 와서 글자가 바뀌었거나 다른 판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원유」에 대한 왕일의 주를 감안해서도 '영백'은 몸으로 옮길 수 있다. 사람이 항상 거처하는 곳을 의미한다는 왕필의 견해는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므로 몸으로 보는 견해와 대립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포일(抱一)'이라는 말도 문제다. 여기에서 '하나〔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는 여러 견해가 있다. 태화의 정기(하상공), 양기의 정수(왕진), 도의 자식(육희성), 도의 하나(범응원), 합일함(소철·임희일), 집중함(설혜), 영혼(주겸지), 육체(고형) 등. 앞에서 나는 이미 『노자』의 하나(일) 개념을 해설했다(다음 참조). 이때 '하나'는 숫자 1의 성질에 부합하는 그 어떤 것도 대입할 수 있는 대입항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노자』는 하나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무엇인지 규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단순히 하나라고 옮기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의미는 좀더 불분명해지겠지만 억측으로 오해하는 것보다는 낫다.
결국 이 문장에서 『노자』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꼭 껴안아 떨어지지 않을 것을 권유한다. 그 무엇(하나)은 도도 될 수 있고, 『노자』적 삶의 교훈도 될 수 있고, 정신도 될 수 있고, 생명도 될 수 있고, 덕도 될 수 있고, 신령 같은 것도 될 수 있을 테고 여러 가지다. 『장자』 「재유」는 아마도 그것을 신(神)으로 본 것 같다.
신(神)을 껴안아 고요함을 간직하면 형체는 저절로 올바르게 된다. 반드시 고요하고 반드시 청정하여 네 형체를 수고롭게 하지 말고 네 정기를 동요하지 않으면 장생할 수 있다. ……나는 그 하나(일)를 지켜 조화로움에 처했기 때문에 몸을 닦은 지 1천2백 년이 되었지만 내 형체는 아직 늙지 않았다.
이 문장에서 "신(神)을 껴안아 고요함을 간직한다"는 말은 그 뒤의 "그 하나(일)를 지켜 조화로움에 처했다"는 말과 뜻이 같다. 그러므로 이 문장에서 '하나'는 신(神)을 가리킨다. 이때 '신'은 정신·영혼·심리상태 등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후대 도교 양생술에서는 기(氣)·정(精)·신(神)을 불사의 생명력을 만들어내는 '대약삼품(大藥三品)'으로 부른다. 세 가지가 모두 물리적이면서도 영적이지만 그래도 고르라면 셋 중에서 '신'이 가장 영적인 요소다. 「재유」가 말하는 '신' 개념은 후대의 도교적 양생술에서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곧 「재유」는 『노자』의 이 문장을 양생술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장자』 외·잡편의 『노자』 해석을 『노자』 자체가 아닌 『노자』의 전개로 파악한다. 그래서 『노자』를 통치술(처세술)로 이해하는 기본 관점에 맞추어 여기의 '하나'가 통치(처세)의 요체, 곧 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기운을 고르게 하여 부드러움에 이르되 능히 어린아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
專氣至柔, 能嬰兒乎
모든 통행본은 '지(至)' 대신 '치(致)'를 썼지만 서로 통하는 글자다. '전(專)'은 백서에 단(槫)으로 되어 있으므로 『관자』 「내업」의 유사한 문장을 감안하여 '단(摶: 모으다)'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렇게 되면 "기운을 모은다"는 말이 되어서 정기 양생론에 좀더 가까이 가게 된다. 하지만 '단(摶)'이라는 글자 자체가 '전(專)'과 통하는 글자다(『관자집교』). 이때 '전'은 가지런히 한다(소철) 또는 고요히 안정하여 흔들지 않는다(범응원)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보아도 양생론과 연결하려면 할 수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모든 양생 수양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출발점은 우선 생활의 지혜에서 온 것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정기나 원기를 배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생활의 안락함을 선물하기 때문에 좋다. 경계는 맞닿아 있지만 선을 넘어가는 것은 좋지 않다.
『노자』는 인위적 노력을 통해 생명을 연장하는 일(양생)의 부질없음, 나아가서는 해로움을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백성들은 살고 또 살려고만 하니 몸을 움직여 사지로 가는 것이 또 십 분의 삼이다(50)."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한다(55)." "무릇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귀하게 잘 여기는 것이다(75)." 이렇게 생명을 연장하려는 노력을 단호히 비판하는 『노자』를 양생론에 접목시킨 것은 송대 성리학이 『논어』를 형이상학으로 이해한 것만큼이나 극적인 전환이다.
막 소개한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한다"는 말 뒤에는 "마음이 기를 억지로 하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나는 이 말이 "기운을 고르게 하여 부드러움에 이른다"는 말의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고 본다. 마음이 기를 억지로 한다는 것은 상황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상황을 조정하려고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하면 우선은 뜻이 굳세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씩씩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부러지고 만다. 『노자』가 보기에는 그런 것이 기운을 고르게 하지 못한 것이다. 상황에 순응하지 못하고 상황을 뜻대로 움직이려고 한 것은 그 뜻(기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러지지 않으려면 "기운을 고르게 하여 부드러움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글(55)에서 『노자』는 이미 이렇게 해서 지극한 부드러움에 이른 상태, 두터운 덕을 머금은 상태를 갓난아이에 비했다. 지금 문장에서 『노자』가 이런 '부드러움'을 어린아이에 비기는 것과 같다.
『노자』는 또 다른 한 곳에서 이런 식으로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언제나 덕이 떠나지 않는다. 덕이 떠나지 않으면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28)." 이 글에서도 역시 『노자』는 암컷처럼 퇴양과 인순의 덕을 갖추면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아이는 유약의 극치이지 어떤 순수한 정기의 결집체가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늘려보겠다는 적극적 사유는 『노자』의 본령이 아니다.
거듭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중에는 『노자』를 정기 양생론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나타났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발전일지 모른다. 아마도 이런 흐름은 통일 중국의 문화가 막 형성되어 가고 있을 때 등장한 진 시황과 한 무제라는 두 절대 군주의 장생 취미에 강력하게 영향받았을 것이다. 중국처럼 국가, 곧 황제 권력이 막강한 곳에서는 문화의 발전 방향 자체가 황제(국가)의 의도에 심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노자』를 정기 양생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한대에 오면 충분히 나타난다고 본다. 이미 『장자』 「재유」를 소개했고, 『관자』 「내업」도 거론할 수 있다.
기운을 고르게 하여 신과 같아지면 만물이 모두 마음속에 갖추어진다. 능히 고르게 할 수 있는가? 능히 하나로 할 수 있는가? 능히 점치지 않고서도 길흉을 알 수 있는가? 능히 멈출 수 있는가? 능히 그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거듭 생각하라. 생각해서 통하지 않으면 귀신이 통하게 해 줄 것이니 귀신의 힘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정기의 지극한 작용이다.
"기운을 고르게 하여 신과 같아진다"는 말은 『노자』를 염두에 둔 것이고, 글 전체 형식도 지금 『노자』와 같다. 「내업」의 이 글과 유사한 글이 『장자』 「경상초」에도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노자가 등장한다.
노자가 말하였다. "삶을 보호하는 길〔衛生之經〕2)은 능히 하나를 껴안는가, 능히 잃지 않는가, 능히 점치지 않고서도 길흉을 알 수 있는가에 있다. 능히 멈출 수 있는가? 능히 그칠 수 있는가? 능히 남에게서 구하지 않고 자기에게서 구할 수 있는가? 능히 소연하게 할 수 있는가, 능히 통연하게 할 수 있는가, 능히 어린아이와 같을 수 있는가?"
「경상초」는 이 글 뒤에 "어린아이는 종일토록 울어도 목이 잠기지 않으니 화기가 지극한 것이고, 종일토록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에 힘이 빠지지 않으니 그 덕을 간직한 것이며……"라고 하면서 『노자』의 글(55)을 원용하고 있으며, 「내업」도 "도라는 것은 입으로도 말하지 못하고,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한다"라고 하여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어슴푸레하다고 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니 어렴풋하다고 하고, 만지려고 해도 그럴 수 없으니 두루뭉실하다고 한다(14)"는 도에 대한 『노자』의 묘사를 각색하여 전해준다. 『노자』를 재해석하는 이런 글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을 것이다.
그에 따라 부드러움의 극치였던 『노자』의 어린아이의 이미지는 「경상초」에서 위생, 곧 양생의 길과 결합되었고, 「내업」에서는 그 특유의 정기론과 결합한다. 중국의 양생론은 『포박자』 이전에는 체계화되지 않지만 이 정도면 이미 기틀을 갖춘 셈이다. 이런 『노자』의 '발전'은 가능한 일이었고, 또 실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노자』의 본령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노자』에는 양생론도 없고, 정기론도 없다.
『노자』의 주해서 중에는 아무래도 하상공·고환본 같은 도사 계열의 판본이 이런 글을 정기 양생론과 좀더 가깝게 놓는다. 가령 하상공은 "정기를 한결같이 지켜서 어지럽히지 않으면 몸이 그에 응하여 유순해진다"고 하였고, 고환본에 인용된 장주(張注)는 "사람이 그 정(精)을 가지런히 하고 기를 아껴서 유화의 도를 얻은 이후에 안으로는 분별을 없애고 밖으로는 앎과 말〔知道〕을 끊으면 몸은 몸을 보지 못하게 되니 그 몸 또한 사라지게 되고, 마음은 마음을 알지 못하니 그 마음 또한 고요해진다"고 하였다. 그에 비해 왕필은 "자연의 기운에 맡겨서 지극히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 문장을 이해했고, 소철은 "정신을 다스려서 함부로 성내거나 기뻐하지 않는 것"으로 이 문장을 이해했다. 도사의 『노자』가 있고, 문인의 『노자』가 있다는 구분은 이런 데서 가능하다.
거뭇한 거울을 닦아서 능히 흠을 없앨 수 있겠는가
脩除玄監, 能毋疵乎
'수(脩)'는 통행본에 '척(滌: 깨끗이 하다)'으로 되어 있지만 전자는 '수(修)'와 통하고, '수(修)'에는 더러운 것을 치운다는 의미가 있으므로(왕성) 서로 통한다.
'현감(玄監)'은 통행본에서는 '현람(玄覽)'이다. 통행본의 '현람'에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마음을 의미한다(하상공·왕진·육희성). 둘째, 뛰어난 통찰력을 의미한다(왕필·소철). 셋째, 궁극적으로는 제거해야 할 뛰어난 견해이다(임희일·동사정·오징·설혜). 첫 번째 견해와 관련해서는 고형의 의견도 참고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통행본의 '람'은 '감(鑑)'과 같다. 『초사』 「이소」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람'은 거뭇한 거울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은유하는 것이다.
고형의 설은 백서의 발굴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을본은 통행본처럼 '현람'이 아니라 본문처럼 '현감'이기 때문이다. '감(監)'은 '감(鑑)'과 통하는 글자다. 고형에 따르면 옛날에는 대야에 물을 받아서 거울을 대신했는데, '감(監)'은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야의 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이다. 『상서』에 인용되어 있는 "임금은 물거울〔水監〕로 자신을 보지 말고 백성의 거울〔民監〕로 자신을 볼 것이다(「주고」)"라는 옛말도 그런 용례다.3) 고형의 설이 백서에 부합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상공 등을 좇아 '현람'을 마음으로 본다. 단지 본문에서는 비유를 그대로 살려 거뭇한 거울이라고 풀었다. 거뭇한 거울은 모든 것을 밝게 비추는 깨끗한 거울과 다르다. 깨끗한 거울이 지혜를 상징한다면 거뭇한 거울은 못과 같이 깊고(8) 텅 빈(3) 마음을 상징한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살리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힐 때도 능히 암컷처럼 할 수 있겠는가. 명백히 알아 사방으로 통달하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愛民活國, 能毋以知乎. 天門啓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毋以知乎
'활(活)'은 현행본에 모두 '치(治)'로 되어 있다. '활국(活國)'이라는 말은 고전에 잘 나오지 않으므로 오자가 아닌가 하는 설도 있지만 『노자』에는 고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 많이 있으므로 그대로 따른다. 뜻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육덕명에 따르면 하상공본에는 원래 '활'이었다고 한다.
이 문장에서 '지(知)'는 본문처럼 지혜〔智〕로 옮길 수도 있고, 앎〔知〕이라는 뜻으로도 옮길 수 있고, 다스림〔治〕이라는 말로도 옮길 수 있다. 본문에는 똑같은 구절이 두 번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옮겼다. 특히 앞구절은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65)"이라는 말을 감안했다. 하지만 반드시 이렇게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이 싫은 사람은 어느 것 하나를 다른 뜻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 이런 문제는 한 가지로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통행본의 경우는 대체로 '이(以)'가 생략되고(부혁·범응원본 제외) '무위(無爲)'와 '무지(無知)'가 번갈아가면서 한 번씩 나온다. 백서를 통행본처럼 변화시킨 것도 중복이 싫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백서는 중복도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본문처럼 한다.
'천문(天門)'에도 여러 설이 있다. 첫째, 모든 변화가 나오는 곳이다(왕필·육희성·소철·동사정). 둘째, 북극 자미궁을 의미하며, 인체에서는 코를 가리킨다(하상공·왕진). 셋째, 마음이다(초굉). 그런데 이 말은 『장자』에도 나온다. "마음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에는 천문도 열리지 않는다(「천운」)." "삶도 있고 죽음도 있고 나오는 것도 있고 들어가는 것도 있다. 들고남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천문이라고 한다(「경상초」)." 앞의 문장에서 '천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뒤의 문장에서 '천문'은 방금 소개한 세 가지 뜻 중 첫 번째 것으로 쓰였다. 지금 『장자』는 우·주의 변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비유를 그대로 살려 하늘의 문이라고 옮겼지만 의미로는 모든 변화가 나오는 곳으로 본다. '계(啓)'는 '개(開)'와 같다.
"능히 암컷처럼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변화가 무쌍한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암컷으로 상징되는 퇴양과 인순의 미덕을 지닐 수 있겠느냐를 반문하는 것이다.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28)"는 말과 통한다. 일부 판본에는 '위(爲)'가 '무(無)'로 되어 있는데 이미 여러 차례 지적이 있었던 것처럼 잘못된 것이다.
「도응훈」은 "명백히 알아 사방으로 통달하면서도 능히 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장자』에 나오는 설결(齧缺)과 피의(被衣)의 고사에 연결시킨다. 설결이 피의에게 도를 묻자 피의가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결은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 피의는 크게 기뻐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침침하고 컴컴하며, 아무런 생각〔心〕도 없어서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으니 저가 어떤 사람이던가!" 『문자』는 설결과 피의 대신 공자와 노자를 등장시키고 고사 전체를 노자가 공자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베푸는 것으로 각색했다(「도원」).
일부 주해에서는 앞의 세 가지 일을 수신과 관련된 것으로, 이 부분의 세 가지 일을 치국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한다(육희성·동사정). 『노자』에서 수신과 치국은 서로 의존하는 것이지만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수신과 치국이 완성되면 이제 만물을 낳고 기르는 일이 가능해진다.
낳아주고 길러주되 낳으면서도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길러주면서도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生之畜之, 生而弗有, 長而弗宰也, 是謂玄德
이와 유사한 문장은 이미 다른 글(51)에서 나왔다. 그 글에서 주체는 도였지만 여기에서는 덕을 체현한 성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현덕이라는 말은 여기말고도 다른 두 곳(51·65)에서 나온다. 각각의 해설을 참고하길 바란다(51장과 65장 해설 참조).
기운을 고르게 하여 신과 같아지면
만물이 모두 마음속에 갖추어진다
능히 고르게 할 수 있는가
능히 하나로 할 수 있는가
능히 점치지 않고서도 길흉을 알 수 있는가
능히 멈출 수 있는가
능히 그칠 수 있는가
―『관자』 「내업」
[戴營魄抱一, 能毋離乎]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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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1>
제10장
원문
載營魄抱一,能無離乎?專氣致柔,能如婴兒乎?滌除玄覽,能無疵乎?愛民治國,能無爲乎?天門開闔,能爲雌乎?明白四達,能無知乎.
원문번역:
육체에 영혼을 담아 하나가 되되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느뇨? 기를 모아 연하게 하되 아기처럼 될 수가 있느냐? 마음을 모아 의문을 풀되 잡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있느냐? 백성을 사랑해 나라를 다스리되 무위(無爲)로 할 수가 있느냐? 콧구멍으로 숨을 쉬어 호흡을 하되 조용할 수가 있느냐? 모르는 것이 없으면서도 모르는 것 처럼 할 수가 있느냐?
키워드:
愛民治國,能無爲乎
백성을 사랑해 나라를 다스리되 무위(無爲)로 할 수가 있느냐? 중국어발음: 아이 민 즈 궈, 능 우 웨이 후(ai4 min2 zhi4 guo2, neng2 wu2 wei4 hu. 애민치국, 능무위호)
明白四達,能無知乎:
모르는 것이 없으면서도 모르는 것 처럼 할 수가 있느냐? 중국어발음: 밍 바이 스 다, 능 우 즈 후(ming2 bai2 si4 da2, neng2 wu2 zhi1 hu. 명백사달, 능무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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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2>
第十章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孀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爲乎.
天門開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無知乎.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천하를 하나로 끌어안고도, 능히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에 온 몸을 내맡겨 부드러움에 이르러 능히 어린애와 같을 수 있는가?
씻어 내고 제거하여 현묘하게 보아 능히 허물이 없을 수 있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능히 무위로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데 능히 암컷과 같을 수 있는가?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하면서도 능히 무지로울 수 있는가?
낳고 기르며,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고,
하면서 자랑하지 않고, 기르면서 주재하지 않으니,
이를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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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3>
◆ 심오한 덕, 玄德
여기서의 현(玄)은 어질 현(賢)이 아니다. 어질게 세상을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숨어있는 덕, 보이지 않는 덕을 말함이다.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의 마음이 세상에 어질게 펼쳐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보이지 않는 덕은 온 세상을 덮고 있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영백을 실어서 하나로 품고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專氣致柔 能嬰兒乎 (전기치유 능영아호)
기를 오롯이 하여 부드러움에 이르고 어린아이처럼 같아질 수 있는가?
滌除玄覽 能無疵乎 (척제편람 능무자호)
제(除)를 씻어내고 잘 살펴서 능히 상처가 없게 할 수 있는가?
愛國治民 能無知乎 (애국치민 능무지호)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무지(無知)하게 할 수 있는가?
天門開闔 能無雌乎 (천문개합 능무자호)
하늘 문이 열리고 닫힘에 자(雌)가 없이 할 수 있는가?
明白四達 能無爲乎 (명백사달 능무위호)
사달(四達)을 밝힘에 무위할 수 있는가?
生之畜之 生而不有 (생지축지 생이불유)
낳고 기르고 살리지만 소유하지 않고
爲而不恃 長而不宰 (위이불시 장이부재)
행하되 교만하지 않고 어른이되 군림하지 않으니
是爲玄德 (시위현덕)
이를 오묘한 덕이라 한다.
출처 : 일요주간(http://www.ilyoweek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