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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8장 33-40절
내가 왕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앞서 여러 번 심문을 받으셨는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세워서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누가 심문을 하든 거짓 증언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진리에 합당한 말만 하셨습니다. 오늘 보게 될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내용으로 있기 때문이요, 작정의 실행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할 것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의 일이지만, 예언의 모든 말씀은 시간이 들어오기 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때문에 말씀이 응했다는 것, 응하게 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심문을 받는 대상으로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당시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의 장로들 뜻대로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거기에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욥과 관련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욥이 어려움을 당한 것은 악인의 악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악인의 악한 마음을 사용한 사탄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사탄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악인의 악행만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가져야 할 사고방식은 제2원인, 가까운 원인이 아니라, 제1원인, 먼 원인, 좀 더 명확한 표현으로는 유일한 원인이신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심을 고백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만 모든 찬송을 올려 드렸던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 좋은 일도 있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은 일이 있을 때 자신을 주목합니다.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좋은 일이든 좋지 못한 일이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특별히 택자에게 그분의 속성에 합당한 것만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빌라도의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는데, 33절에 보시면 이렇게 묻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지난 시간에 봤지만 예수님을 데리고 온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사형에 해당할만한 그런 죄인임을 말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누가복음 23장에 소개하고 있는데, 이렇게 고발합니다.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눅23:1-3) 예수님에 대한 죄목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과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내용은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부분인데,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고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으로 어떤 인물이 로마의 속국으로 있는 왕으로 자처한다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손에서 예수님을 넘겨받고 관정으로 들어가서 심문하게 될 때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전체 내용을 다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심문의 내용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만큼 이 문제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봤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질문과 대답 사이에 다른 말들이 오고 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누구에게로부터 나온 것이냐고 묻습니다. 3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이후에 드러나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은 아니십니다.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런 분을 지금 유대인들은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고발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영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 중에는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내용도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그런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22장 21절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내용만 있을 뿐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이 고발하는 내용은 로마에 반기를 들 만한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마치 로마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처럼 거짓을 꾸며내서라도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저들의 메시아관과 다른 분이셨던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유대인들의 고발은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고발을 하는데, 고발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한번도 가르치신 바가 없는, 그런 의도 자체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 즉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고 있는 것처럼 하여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세금 문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왕이라고 고발한 것 자체도 거짓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스스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로 묻는 것인지를 되묻는 것은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임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스스로 궁금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잘 알고 계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봤지만 빌라도는 할 수만 있다면 유대인의 법대로 재판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라 처형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묻고 있는 겁니다. 이런 빌라도에게 네가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고발한 것으로 묻는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빌라도도 답하면서 묻습니다. 35절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간단히 말하면 나는 유대인이 아니며, 너희들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에 대한 답으로 내가 스스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님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그리고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무슨 일로 그렇게 하였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36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다른 복음서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곧바로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37절이 그 내용으로 있는데, 예수님께서 스스로 왕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왕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저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들과 맞지 않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고발이 가당치 않다는 것으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배신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칼을 빼 든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로 싸우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늘 그의 말씀으로 싸우는 방식을 취하셨던 겁니다. 진리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싸우셨던 것이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싸우고자 하셨던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세는 무엇을 나타내는가?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그의 모든 생애를 통해 칼의 방식으로 싸우신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를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물론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말씀으로 시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하여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답게 인용하기보다는 자기 입맛에 따라 인용하는 마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드러냄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어떤 원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칼을 빼든 베드로와 같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동안 열심히 따라다니던 예수님도 배신한 가룟 유다와 같지 않습니까? 사실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이 그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했지만, 정치적 메시아를 꿈꾼다고 할 때 그런 꿈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주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원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심각성은 예수님 시대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 시대 분명 하나님이 그들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으로 세우길 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8장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왕을 세우고자 한다면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나를 버리는 것이요, 나로 하여금 너희의 왕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호세아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하실 때 이런 마음으로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호13:11) 쉽게 말해 너희가 세상을 따라 왕을 원하면서 나를 버릴 때 너희 소원대로 행한 결과가 무엇인지 보자고 해서 하나님은 사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알리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삼상15:2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네 마음대로 행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을 이어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십니다. 이 다윗에 대하여 사도행전 13장 22절에서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리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라는 표현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은 죄가 있다는 것이요, 실제로 끔찍한 죄를 범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비롯하여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살인하는 죄 등 매우 심각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 이후 다른 모든 왕들은 거의 다윗과 비교한다고 할 때 다윗보다 더 나은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인데, 결국 아무리 선한 왕이라 할지라도 왕 제도 자체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왕으로 두지 않는 그런 내용으로 펼쳐지더란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왕임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기도 하는 왕도 있지만 거기에도 점과 흠이 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왕에 대하여 왕이 세워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신명기 1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17:14-20) 왕을 세울 때 형제 중에 택하고 타국인이 될 수 없다는 것, 병마를 많이 두지 않는 것, 아내를 많이 두지 않는 것 등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군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율법서의 등사본을 책에 기록하여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고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지지만 왕이 되었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되고 늘 자기 위에 하나님이 진정한 왕으로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율법서의 등사본을 곁에 두어 읽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 제도는 여기서 전체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나은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세상의 원리를 따라가지 성경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할 때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제사가 아니라,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제사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으로 오시면 예수님께서는 “네가 왕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씀하기에 앞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상적인 나라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고발은 마치 로마를 위협할 수 있는 그런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 앞에 데리고 왔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세상 나라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드러내셨던 겁니다. 결코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정치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37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정치적 메시아,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왕, 지상에 세울 왕국과 상관없다고 하시자, 이제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비록 정치적 메시아, 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금 질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고, 이를 위해 태어났고 이를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왕이 될 목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고, 왕이 될 목적으로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진리에 대한 증언과 관련된 것이지, 세상 권세를 위한 그런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면서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 10장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목자에게 속한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타인의 음성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인도하기 위하여 목자로 오셨는데, 모두가 아닌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에 한해서 그렇습니다. 그들만이 진리에 속한 자요, 진리에 속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듣고 믿는 것과 듣고 믿는 바에 따라 행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듣기만 해서는 목자의 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것,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이것이 그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듣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 되신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그분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주의 백성들이 참된 믿음과 그 믿음에 합당한 순종으로 주를 따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으로 가시면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6:15).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고 말씀하십니다. 표적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을 따라야 하는데, 단순히 이적을 보고 세상적인 근심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할 때 이런 모습으로 따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할 때 우리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처럼 예수님은 이런 왕이 되어 주십사 요구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이런 형태입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신데,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하니 그 자리에 누구를 대체시키는가? 하나님 아닌 다른 피조물들을 대체시킵니다. 이것이 로마서 1장의 진술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시편 2편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2:1-3)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할 때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분명 있습니다. 위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들은 늘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첫 타락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뱀이 유혹하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그러자 말씀을 가감하게 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말씀으로 바꿔버립니다(창2:17, 3:3). 이때 뱀이 결코 죽지 않는다(창3:4),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고 하자 결국 금하신 열매를 먹게 되는데,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자리하더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신 자리에 나도 앉아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자고 말합니다. 세상을 보면서 우리도 세상처럼 왕으로 세워보자는 것입니다.
피조물이면 피조물의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만드신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만물의 으뜸일 뿐 창조주 하나님 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만 하나님을 대적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이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왕을 주십시오. 이런 요구들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마쳐야 합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의 뜻보다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때로는 요청이 아닌 협박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는데, 인자는 아버지께서 인 치신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7). 그리고 이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바로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의 말씀,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너희의 참된 양식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믿고 그 음성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 소리, 세상 원리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38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는데, 아무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지만,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진리를 알고자 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속한 자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시자 그럼 진리가 무엇이냐고 비꼬듯 경멸적으로 물은 것입니다. 칼빈은 빌라도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을 적잖은 모욕으로 여겼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병은 인간에게 있는 공통적인 것으로 무지하지만 그런 무지를 인정하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진리를 배척합니다. 또한 늘 진리에 대해 경멸합니다. 이것이 지금 빌라도의 자세요, 세상 사람들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대인의 고발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부당한 고발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심문 후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는데, 39절에 보시면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죄가 없다면 그냥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종교지도자들과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행악자로 여기고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유월절 절기를 맞아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815 광복절 특사처럼 예수를 놓아주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40절에 보시면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아볼 수 없지만, 백성들 때문에 마치 죄인처럼 여기도록 하고 죄인을 풀어주는 전례를 따라 풀어주자고 하지만, 백성 쪽에서 반대를 한 것입니다. 대신 누구를 풀어주도록 요구하느냐 하면 바라바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강도입니다. 실제로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단순한 죄가 아니라 강도입니다. 사람을 죽은 자입니다. 비교하자면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살리는 쪽으로, 나아가 단순히 육체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 오셔서 진리를 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내어주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반면 사람을 죽인 사람에 대해서는 살려주고자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행동입니까?
그런데 그 모순적인 행동을 누구도 예외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불신자의 경우 누구도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안과 밖으로 하나님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을 심으시고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계시의 충분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충분성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 죽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는 것이 불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신자는 어떠합니까?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분명 거기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만 하느냐 하면 항상, 늘 순종만 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신자의 모습에 대하여 야고보서는 어떻게도 말씀합니까? 특별히 3장에서 혀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3:9-12)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가짜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야고보서는 교회를 향한 주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러한 모습이 사실은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이고, 이런 모습으로 있지만 이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교훈하심으로 우리를 주의 말씀에 합당한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죽이되 강도는 살려주자고 하는 이 내용에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진리에 속하는 자는 내 음성을 듣지만, 진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는 자들의 완악함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만 아니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라고 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만 아니면 그것이 강도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아니면 죽은 신이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 앞에 무릎 꿇고 빌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완악함입니다. 그러나 그런 완악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진리에 대하여 업신여기는 빌라도라 할지라도 그의 입을 통해 분명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는 말을 하게 하십니다. 아무리 완악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진리를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앞에서 시편 2편을 언급했지만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 그리고 세상의 군왕과 관원이 나서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서워하시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그들의 대적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시편 2편은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2:4)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시2:3)고 할지라도, 그것을 위해 발버둥 치면서 발악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그들을 비웃으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늘 진리만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온갖 악함으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늘 진리에 속한 것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말씀에 합당한 것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핍박해도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댈 수 있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어떻게 삽니까? 억울하다고 여기면 거기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은 복수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런 일조차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께서 참된 것만을 말씀하신 것처럼 늘 참된 것만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진리에 합당한 순종으로 세상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위하여 애써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따라 죄를 지을 수 있을지라도 다시금 돌이켜 주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도록 할 목적으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신 목적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목적으로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엡1:4-5).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세상과 구별되셔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되셔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과 구별되셔야 합니다. 진리에 속한 자라면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가 우리의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그분의 음성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