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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복음의 박사과정>의 줄거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박사 학위란, 특정 분야에서 혼자 공부해도 된다는 공적인 인가이며 그 주장에 합당한 이유와 절차가 전제되었을 것을 인정하는 공적 신뢰의 증표입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십자가복음을 자기 삶의 현장에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십자가복음 박사 역시 스승과 제자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십자가복음의 박사 과정
(마태복음 28:16~20)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복음의 박사 과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복음의 박사 과정’
박사란 쉽게 말해 특정 분야에서 혼자 공부를 해도 된다는 공적인 인가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주장을 할 때에 합당한 이유와 절차가 전제되었음을 인정하겠다는 공적인 신뢰의 증표인 것입니다. 같은 주장을 해도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신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복음에도 박사 학위가 있을까요?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예배당 모임이 힘들어지고 온라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좀 더 예배당 모임의 의미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십자가복음의 박사들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동안 십자가복음을 활발히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삶에서 얼마든지 복음을 붙잡고 적용해 나갈 수 있는 십자가복음 박사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키워야만 합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되었다면 예배당 모임이 힘든 지금과 같은 상황일수록 그 믿음은 빛나게 됩니다. 십자가복음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혼자서라도 십자가복음의 내용을 붙잡고 삶에 적용하는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본문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교육학에서는 이 말씀이 첫 번째 신조입니다. 이 말씀은 곧 제자로 삼는 사람마다 십자가복음의 박사로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흔히 제자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본문 말씀의 의미를 강조하자면 십자가복음 박사훈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고 또 십자가를 삶에 적용하며 복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복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복음이 모든 일의 해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아동심리학 박사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먼저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때에 아이 또한 제대로 키울 수 있게 됩니다. 훌륭한 남편이 되고 싶다고 해서 여성심리에 정통한 박사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때에 가장 훌륭한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장님이 경영대학원에 들어가서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서 훌륭한 경영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경영의 현장에서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때에 누구보다 훌륭한 경영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학 박사를 고문으로 둘 때에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때에 훌륭한 정치인 또한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복음 박사로써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대로 행해갈 때에 삶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본문 20절의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때로는 새로운 율법으로 오해받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문자들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라는 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로운 율법으로 삼는다면 율법을 지키지 못해 망하게 된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율법 위에 더 어려운 율법을 얹어놓는 셈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처럼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는 것은 전혀 복음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말씀들이 지켜지는 상황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때에 말씀은 애써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지켜지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실로 간단합니다. 두 가지 가르침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삶에서는 실천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산상수훈과 맞아떨어지는 행동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부모 앞에서, 친구 앞에서, 돈 문제 앞에서, 건강 문제 앞에서, 일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행동으로 나오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박사에게는 제자를 박사로 키워낼 자격이 있습니다. 스스로 십자가복음 박사가 되었다면 또한 제자들을 십자가복음으로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가르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늘에 대한 가르침과 땅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하늘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늘은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객관적인 기준으로 공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의 관계에서 하늘이 갖는 의미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이 나와의 관계에서 갖는 의미를 깨닫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나와 하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알아야만 하는 것은 마음의 구조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어떤 가치로도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은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채워질 때에 기쁨과 만족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평강을 누리던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며 풍랑 속에 잠드신 예수님의 모습이며 참수형을 기다리며 깊은 잠에 빠졌던 베드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평강을 누리던 모습은 땅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과 관계하며 생겨나게 된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땅에 대한 가르침은 삶의 주관자가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땅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 펼쳐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가르침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무게로 믿음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된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해답을 첫 번째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둔다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과 삶의 문제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렸기에 근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복음 박사들은 첫 번째 하늘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적용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는 마음의 평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깨닫고 하늘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복음 박사들이 보여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신학교 교수라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어도 십자가복음의 박사 학위는 없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성도들 앞에서는 온갖 가르침을 말하지만 정작 가족들 앞에서는 행복과 기쁨과 평강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복음의 박사 학위를 위한 첫 번째 가르침을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수 없다면 신학박사 학위도 소용이 없고 목사님이 성경공부를 잘 가르치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교리를 달달 외우는 것은 복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요약되는 성경의 내용이란 마음이 하늘로 가서 평강을 누려야 하며 이 땅은 하나님의 주권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되면 성경 66권 전체를 외우지 못할지라도 절반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한다면 또 나머지 절반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하는 가르침이란 하늘에 대한 가르침과 땅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하늘로 가서 평강을 누려야 하며 이 땅은 하나님의 주권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도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 밖에는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고 마음은 다시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땅은 하나님의 주권이 펼쳐져야 할 곳이지 나의 주체성이 펼쳐져야 할 곳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늘에 대한 가르침과 땅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해나갈 때에 누구나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때에 배우자를 대하든지 자녀를 키우든지 나가서 일을 하든지 만능의 사람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활동은 창조적 주권과 교정적 주권으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창조적 주권은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하는 하나님의 주권행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을 통해 행사하시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뜻과 계획이 거침없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창조적 주권이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반면 삶에서 십자가복음이 실천되지 않을 때에는 교정적 주권행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지 못하고 땅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쥐고 이끌어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적 주권행사를 하실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땅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교정적 주권행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에 중언부언하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구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언부언이란 안 해도 되는 말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이 땅의 삶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다는 것은 이러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중언부언을 보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나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은 엉킬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교정적 주권을 행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정적 주권이 작용하는 동안 주권의 충돌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지치고 힘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이 작용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하늘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가르침이란 마음의 평강은 하늘에서만 주어진다는 것이고, 땅에 대한 가르침은 이 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펼쳐지는 장소라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이 땅을 등지고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이 한 가지 가르침은 예배당 안에서는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에서 삶의 현장 어느 곳에서든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평강은 하늘에 있고 땅은 하나님의 주권의 장소임을 기억하고 삶에서 적용하는 사람들이 십자가복음 박사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십자가복음을 전하며 그들 또한 박사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음이 세상을 떠날 수 있고 삶은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행사의 장소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본문 20절 하반부에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마음은 세상을 떠나고 삶에는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행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장갑과 가면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셨으니 이미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내가 준비될 때에 두 가지 가르침은 적용되고 실천되어지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의미가 지켜지게 되고 실천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을 살펴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의 의미는 명확해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마주하고 있는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묻힌 자입니다. 나의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고수할 수 없다면 예수님과의 동행은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가족을 대할 때에도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삶의 현장 어디서든지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나는 동일시되어야만 합니다. 이를 악물고서라도 나의 주권이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내 주변에 대한 섭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 삼으시고 육체를 가면 삼으셔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 10절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과 일치하는 십자가복음 박사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할 때에 또한 부활과 승천과 보좌우편에 계신 예수님과도 연합하게 됩니다.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계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고 그 결과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듯 사람들을 모아놓고 등급을 나누고 반복학습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드러난 두 가지 가르침을 보여줄 수 있으면 됩니다. 마음의 평강은 하늘에서만 주어진다는 하늘의 가르침과 이 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펼쳐지는 장소라는 땅에 대한 가르침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돈 없어 죽겠다는 사람에게 돈은 기쁨과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평강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시 할 수 있어야함을 가르쳐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십자가복음 박사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십자가의 예수님, 무덤의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의 장소로 만듭니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은 비단 피부색이나 문화나 관습으로 구분되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계층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불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마찬가지로 제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또한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머지 부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는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 즉 날마다 세례를 강조했습니다. 세례는 곧 예수님의 죽음과의 연합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에 담은 이름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마음에 명품백을 담은 사람은 실제로 명품백을 사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하고, 마음에 자녀의 서울대 입학을 담은 사람은 실제로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함을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합니다. 세례는 이러한 마음에 대해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세상을 담았던 마음을 죽일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긴 마음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나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워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써 이 땅의 삶에는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주권의 행사 자리가 됩니다. 삼위일체 되심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는 하늘의 복지가 땅에는 육체의 복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할 때에 두 가지 가르침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십자가복음 박사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보좌 우편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늘에서는 평강을 누리고 땅은 하나님의 주권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이 실천되는 동안에 마태복음은 물론이고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나의 삶에서 지켜지는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정확하게 알면 예수 믿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고 십자가복음 박사 학위를 받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복음의 박사 학위를 받고 또한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을 제자삼아 박사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복음의 박사들이 되게 하시며 또한 만나는 사람들을 제자 삼아 복음의 박사로 만들어가는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