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한 목자
본문<요10:11~21>
우리가 읽는 성경 66권은 장과 구절로 나뉘어져 있지만 원래는 이런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장과 절로 구분해서 찾아보기 쉽도록 했어요(예. 마10장 5절) 그러나 부작용도 있습니다. 장이 바뀌어도 내용은 앞의 내용과 계속 연결이 되는 것인데, 마치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서 따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살펴보는 요10장은 앞의 요9장과 연결된 내용입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주님이 흙에 침을 뱉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해서 낫게 한 후, 이어지는 내용이지요.
‘나면서부터 소경’- 이게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ㅎ님을 모르는 모든 인간의 영적 실상이 그렇다는 고발이지요. 9장의 결론은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인데, ‘너희가 보지 못한다고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여전히 있다’라고 일침을 주십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태어나는 태생적 죄인이라고 규정 합니다. 그래서 창1:2절부터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에 ㅎ님도 모르고 사단도 모르고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무지와 무식의 존재들,.., 그런 인간 자신이 아침 안개처럼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인 것도 모르면서 그저 한순간의 찰라적 영광을 쫓아 동분서주하며 허비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자신이 나면서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난 자인 것을 깨닫게 되어 ㅎ님의 긍휼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태생적 죄인임을 알게 될 때 ‘저는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죄사함 받고 구원의 반열에 참여케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죄가 없으려니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역설과 반어법이지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들이 ㅎ님 율법을 공부해서 훤히 꿰고 있고,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살고 있기에 ㅎ님이 칭찬하시는 자라고 여겨서, ‘구원은 떼놓은 당상이야’ 한다면, 이게 ’본다고 하는 자‘라는 말이고 이런 자는 죄사함을 주시는 IX가 필요치 않은 자이니 그 죄가 그대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요10장의 양과 목자,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절도와 강도라는 용어입니다.
지난번에 나눈 주요 내용이 ‘나는 양의 문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에 들어가는 자는 도적이고 강도’라고 하십니다. 이때 ‘양의 우리’란 뭐라고 했지요? 양을 보호하기 위해 가두는 우리란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안에 갇힌 양들에게 접근하려면 반드시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데, 문을 통하지 않고 담치기를 한다면 당연히 도적이고 강도겠지요.
즉 양으로 비유되는 율법이라는 가두리 양식장에서 보호되고 있는 ㅎ님의 백성에게 가려면 문이 되시는 IX를 통해 양들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IX를 통하라는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새언약이신 십자가 복음을 통해 율법 안에 있는 양들에게 꼴을 먹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행함이라는 율법 가치로 양들을 먹인다면, 그게 바로 도적이고 강도가 된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율법을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자키라고 준 게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고 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됩니까? 율법은 통으로 묶여져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율법을 잘 지키다가 한 개만 어겨도 허사라는 말입니다. 이게 ㅎ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른 점입니다. ㅎ님의 요구는 100% 완벽하게 지켜야 지킨 것으로 인정하는데, 사람은 상대적 지킴을 가치로 삼고 삽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 지키면 ㅎ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ㅎ님은 모든 율법 조항을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라고 실격처리 하십니다. 야고보서 2:10절에서 이를 증거 하고 있지요.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기는 것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가령 100개의 율법 중에서 99개를 지키고 하나를 못 지켰다면 사람들은 우쭐하며 자랑하겠지만 ㅎ님은 99개 모두가 무효라고 한다니, 이게 율법을 지키라는 말인가요? 항복하라는 말인가요?
인간 너희는 죽었다 깨나도 못 지킨다는 말입니다(이걸 아는 게 복인데, 모르니 저주지요)
율법의 상징인 십계명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십계명은 마지막 10번째 계명인 탐심에서 ㅎ님의 의도를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정신의 어떠함을 결론 맺고 있다는 말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집이란 거기 있는 모든 것을 말하는 거지요,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무릇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마라)..알고 보면 십계명의 결론으로 주시는 게 열 번째 계명입니다. 결국 지켜내겠다는 허망한 꿈을 깨라는 의도입니다.
탐심은 인간 내면의 마음의 상태이고 생각의 영역입니다. 여기서 죄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은 행동을 저질러야 죄인 줄로 알고들 있지만, ㅎ님은 사람이 탐심을 품었다면 그게 죄라고 규정하신다는 말입니다. 탐심이 없는 자가 있습니까? 실제로 인간은 탐심의 존재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탐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야망이고 꿈이 아닌가요? 무엇에 대한 욕구가 비록 선한 욕구일지라도 그게 탐심이거든요. 사람들이 왜 공부하고, 왜 좋은 직장을 선호하고, 왜 출세하려고 합니까?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이웃이 가진 것을 나도 좀 가져보고픈 탐심이고 욕구인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죄라고 하니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창6장에서 모든 인간은 어려서부터 그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 본성적으로 자기계발, 자기 확장이라는 욕구를 가진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탐심의 존재라는 말이지요. 이건 구원 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심으로 똘똘 뭉쳐진 너 인간아, 너는 죄인이야’라는 폭로를 하는 이게 율법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죄를 모르는 자들 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7:7절에서 토로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했으면 내가 탐심이 죄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말함) 이렇게 탐심이 죄인데, 탐심으로 조성된 인간이 어떻게 십계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탐심의 존재라는 말은 인간 자기가 신이고 우상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해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자가 무슨 수로 제1계명을 지키고 2계명을 지킵니까?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마라.(내가 나를 제일로 중요시 여기는데요? 나는 나를 제일로 사랑합니다. 이게 내가 신이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진 자가 ㅎ님을 마음에 둔다면 몇 번째 정도일까요? (돈, 건강, 자녀, 배우자, 세상 낙, ㅎ님?) 겨우 5번째나 될까요? 이게 어떻게 증명되지요? 그들의 기도가 그들의 신앙입니다. 무엇 때문에 새벽부터 나와서 기도합니까? 세상 복 달라구요.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니 제1계명은 자동으로 어기며 사는 겁니다.
제2계명이 무엇이지요?(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마라). 너를 위하여 만든 신, 지금 자신이 ㅎ님을 섬기는 이유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이지요. 그들이 ㅎ님을 찾고 헌금 내고 섬기는 목적이 자기를 위한 ㅎ님이니까, 말로는 ㅎ님 부르고 예수님 부르고 십자가 외치지만 속내는 복 달라는 거잖아요. 자기를 위한 탐심으로 ㅎ님 섬기는 거 아닌가요? 성경은 말씀 합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복달라고 돌부처에 절하고 무속을 쫓는 자들과 뭐가 다르지요?
실상이 그러하니 제 3계명도 자연히 어기는 꼴이 되는 겁니다(ㅎ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내 소원 들어주는 ㅎ님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마치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부르고 있는 게 망령되이 여기는 죄악이지요. 이처럼 탐심을 가진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설사 지킨다고 해도 하나 어기면 다 어기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사랑, 탐심의 인간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자기가 태생적 소경임을 모르니까 지키겠다고 덤비지만, 이 역시 탐심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계명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99개=1개)
이것을 파악한 사도 바울이 롬7장 말미에서 탄식하잖아요.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만 행하는도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면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7장 마지막 구절이지요.
우리 주 IX 말마암아 ㅎ님께 감사하리로다(비록 마음으로는 ㅎ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즉 마음과 달리 죄 짓는 인생 말종 같은 자이지만 감사한다고 하면서)~
- 감사의 이유가 8장에 나오는데, 우리 육신은 연약해서 율법을 못지키니까, 대신 ㅎ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사 우리 죄를 대신 지게 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도다, 그러므로 IX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좌함이 없느니라(찬송을 부릅니다/대 반전이지요. 이게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러한 십자가 복음을 주시려고 오셨는데, 소경된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몰라보니 너희가 바로 양들을 잡아먹는 이리 같은 절도요 강도라고 질타하는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10:11-13>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을 풀이 있는 초원으로 인도하여 풀을 먹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양들을 노리고 덤벼드는 맹수들로부터 보호하는 일입니다. 모든 목자들이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자들로 보입니다. 그런데 맹수가 등장할 때 이들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양들을 맹수로부터 지키려는 선한 목자가 있는 반면,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양들을 내버려두고 도망치는 삯꾼 목자들이 있습니다. 맹수의 등장으로 선한 목자와 삯꾼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질 못했지만 얼마 후 자신을 십자가에 스스로 내어 주심으로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말씀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양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 선한 목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 그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고 있는 절도요 강도들이고 아차 싶으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삯꾼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주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10:3-4절)을 보면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합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삯꾼은 자기 양들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양들을 알고 계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근본을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요6:37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양들이 모두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들이 아버지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자신의 형제로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십니다. 즉 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양을 자녀 삼으신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7-39)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삯꾼은 양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양들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양들이 아니라 자신의 생계이고 자신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입니다. 선한 목자에게 양들을 치는 일은 사명입니다. 그러나 삯꾼에게 양들을 치는 일은 직업일 뿐입니다. 삯을 기대하고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꿈은 자기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해야 성공한 목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목사들에게 양들은 교회 부흥의 도구일 뿐입니다. 목사들의 눈에 신자들의 머리수는 십일조와 헌금으로 보입니다. 목회의 목적은 그들이 떠나지 않고 교회를 잘 다니게 하는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행사들과 모임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서로 한 가족으로 엮어 놓아 지상 천국을 맛보게 하여 절대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신학교에 목회학 있음)
양과 목자의 참 관계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의 피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고유명사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선한 목자의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선한 목자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린 적도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장을 보면 신자들이 여러 파로 쪼개져 있음을 봅니다(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고린도 교회가 나뉘진 이유는 그들이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리더를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교리적이고 지적인 설교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달변가 아볼로를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좋아하여 서로 파당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두 자기 입맛에 맞는 목사를 찾아 교회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이 최고야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니라 우리 목사님의 증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된 교회를 자기들 스스로 찢어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서로 나뉘어질 수 없는 한 몸으로 존재합니다. 한 몸일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지체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공급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머리를 붙들지 않고 사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적이 있더냐?”라는 말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있을 때 사람을 자랑하게 되어 있고, 사람을 자랑할 때 교회는 나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어리석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선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께 붙어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가 선한 목자임을 맛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양들입니다.
<10:14-15>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는 자기 양을 압니다. 양들도 목자를 압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마7:22이하를 보면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한 무리가 등장하여 많은 공적을 자랑하며 자신들이 예수를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위해 선지자 노릇도 하고, 예수를 위해 귀신도 쫓아내고, 예수를 위해 많은 권능을 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알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향한 짝사랑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양과 목자의 관계는 서로 아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목자를 알고 있다고 하는데 목자는 이들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의 관계는 양과 목자의 관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 짝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주는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바울과 예수님의 관계를 통해 양과 목자의 관계를 접근해 보겠습니다.
(딤전1:15-16절)을 보면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과, 이러한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는 양을 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것에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이 예수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평생 예수를 믿어도 이들은 마지막 날에 예수에게서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만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알게 된 이후 바울의 삶에 나타난 변화는 그가 예수를 따르는 자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요10:4절 후반부를 보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릅니다. 목자를 따른다는 말은 목자가 자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계산하지 않고 그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는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아까 이 우리란 율법이라는 가두리 양식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밖은 율법과 상관없는 자들인 이방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ㅎ님이 유대인을 택하여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한 집단을 택하여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여 세상에 알리려고 한 것이지 그들에게만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받은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지요? ㅎ님이 남편이 되어 옆에서 친절하게 조력하였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지구에서 사라진 게 그 증거입니다. 율법 지킴을 목숨처럼 여기며 산 그들이 실패한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율법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지요.
구원은 ㅎ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를 거부한 이스라엘에게서 ㅎ님의 촛대가 옮겨져서 이방인에게로 갔습니다. 롬11장에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고함으로(공짜로 주어지는 은혜구원은 필요 없다, 우리 힘으로 율법 지켜서 구원을 얻을 거야라는 율법신앙은 교만이지요).. 참 감람나무에서 잘려나갔습니다. 그리고 ㅎ님의 구원의 영역이 이방인에게로 접붙임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 2천년이 이방인의 시대입니다.
그 후 온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지요. 물론 가라지도 같이 퍼져 나갔구요. 천주교가 가장 큰 가라지 독버섯입니다. 어쨓든 전세계에 복음이 전해져서 지금은 복음이 편만하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는 다시 이방인 교회가 교만해지게 된다고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운명처럼 반복됩니다. 참 감람나무에서 잘려지고 그 자리에 다시 이스라엘이 접붙임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이방인 중 ㅎ님 백성과 유대인 중 ㅎ님 백성이- 모두 택함 받은 자들) -다 구원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기독교가 다 세속화로 변질되었잖아요.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화란 불가능합니다. 정화란 아주 조금만 더러워졌을 때에 가능한 일이지 거의 전체가 썩었으면 버려야지 정화는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계18장에서 권고하잖아요. 음녀교회 큰성 바벨론은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가 되었다. 거기는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소굴이니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거기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들이 아닌 자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거기서 주야장창 있는 겁니다. 삯군에게 속아서지요, 유유상종이라고 하잖아요. 끼리끼리 모이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은 단으로 묶인다고 말합니다. 가라지는 가라지끼리 묶이고 알곡은 알곡끼리 묶입니다.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ㅎ님의 일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십자가 복음이 다시 육적 이스라엘에 들어가면, 그들 중에서도 택하심을 받은 적은 무리가 또다시 IX를 영접하여 ㅎ님이 예정하신 충만한 수가 차면 역사는 막을 내립니다.
지금 16절은 주님이 그 말씀을 한 겁니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자들, 이방인들도 구원 받아 내 음성을 듣는 안식의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그 당시는 이방인들의 구원은 꿈에도 꾸지 않던 생소한 일이었지만, 보다시피 2천년이 흐른 지금은 이미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구원 얻을 자가 거의 다 차서 끝났기에 배도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역으로 다시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지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지는 때입니다(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가면 끝이 되는 셈/ 그래서 이 방향성을 알라고 바울이 최초로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서쪽으로 시작을 유도했던 것이지요./ 행16장 )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이스라엘로 가면 ㅎ님의 구속사는 막을 내립니다.
<10:17-18>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7절을 보면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택한 자녀들에게 내어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그들이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사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예수님이 계획하신 일이 틀어져 어쩌다 그렇게 되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의도하신 일이었습니다.
마26:53-54절을 보면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몰려온 군사들에게 칼로 대항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에겐 하늘의 천사들을 호령하여 자기를 체포하러 온 군사들을 그 즉시 멸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계획에 정면으로 맞서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순히 자신을 군사들에게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죽으러 오셨기에 정해진 길로 가신 것입니다.
ㅎ님과 본체이시지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이라는 고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 이십니다. 이 무한한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여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