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힐의 저서 《유럽의 약속》은 국내에서 번역되지 않은 책이라 2001년 우장춘 박사님의 채종포가 있던 보배섬(진도)에 육종재배 연구사로 발령받아가서 인연을 맺었던(26년 차) 교보문고를 통해 미국에서 원서를 열흘 만에 받아보았습니다. 이에 원서 사진을 게시합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우석훈 성공회대 강사의 한미 FTA 관련 도서와 천규석 한살림 운동 대구공동체 조직인의 ‘쌀의 문화사’와 관련된 책에서 접한 지식을 지인분들과 공유하고저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래스고 대학의 철학교수로 학문활동을 시작했고,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였고, 칼 맑스 역시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헤겔이 활동했던 예나대학에서 에피쿠로스학파에 대한 철학논문으로 학문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철학적 의미에서의 형이상학(metaphysics)의 반대말은 과학이다. 한편 메이지 유신이 끝나고 일본은 젊은 엘리트들을 유럽에 신사유람단으로 파견했다. 이들이 가지고 온 귀국 보고서의 결론은, 독일과 프랑스를 기본 모델로 해서 유럽의 강대국과 같은 대국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소수의견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 같은 강소국의 모델을 채택해야 한다는 또다른 발전방안이 제시되었다. 결론적으로 독일 모델로 결정된 셈인데, 철학적 격론을 통한 것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철학적 토론을 통해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정한 것이다. 과연 한국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이 질문은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의 몫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경제학자들이 여러 설득력 있는 수단을 제시하고 이를 다시 철학자가 판단하거나 사회구성원들이 모여 판단하는 경우이다. 그래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같이 제시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20세기 경제학인, 경제원론에 나와 있는 표준경제학의 정신이다. 그리고 국가의 기본 시스템에 관한 선택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포괄적으로 고려한 통합적 결정이다. 그렇기에 이 선택을 ‘철학적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철학자들의 몫이 여전히 남아있다. FTA 체결 이후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원래 한국은 일제 강점기부터 ‘상중상’ - 땅을 먼저 사고, 자기가 살 땅을 개발하게 만드는 사람 – 에 대해서 사회적 제재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국가다. 그리고 토지투기와 농지투기, 아파트 투기를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칭찬하는 풍습이 있다. 늑대와 양의 비유를 한미 FTA 협상에 적용하면, 늑대는 미국이고 양은 한국의 (4인 가족 기준) 연소득 6천 만원 이하의 국민들이다. 이 시스템에서는 양이 국민경제의 재분배에 의한 심한 벌칙을 받게 된다. 따라서 투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과 자신의 노동력만으로 성실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몰락하는 경제는 어떤 미사여구를 앞에 가져다 붙여도 지옥일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천국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지옥이 펼쳐지지 않기를 더 희망한다. 그래서 바보 같아 보이지만 ‘나는 투기를 하지 않는다’는 ‘하중상’ - 잘 모르고 자신 없기 때문에 땅을 사지 않는 사람 – 의 전략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경제는 평범한 사람들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나마 멕시코 시스템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면적으로 붕괴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그들의 국가혁신 시스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대학과 그런대로 믿을 만한 지식인 그리고 세계 최고수준의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이러한 국가혁신 시스템은 물론이고, 최후의 버팀막이라고 할 예술가와 철학자도 별로 없다. 불안하지 않은가? 한미 FTA가 진행됐을 때 소득이 상위 2%에서 10%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공무원을 포함해 20% 정도의 국민들은 큰 타격없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나머지 80%의 국민들이 바로 양떼다. 그들은 자신이 한심스럽거나 태어난 것이 괴로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아직 취업하지 않은 대학생들과 더 어린 국민들의 경제적 운명도 그리 밝지 않다. 이 정도라면 ‘양극화’라는 별 의미 없는 단어보다는 ‘해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냘프지만 그래도 존재하는 희망은 9차 개정헌법이 완전히 전복되어 대통령 직선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87년 체제’의 안전장치 – 대통령 임기가 5년 단임제라는 것 – 가 결국에는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FTA가 통일을 앞당기는 뜻밖의 효과를 만들 수도 있다. 북한의 외교관들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외교관들과 함께 세계최고의 협상력을 인정받고 있는 협상의 일류들이다. 그리고 주변에 힘있는 나라들이 우글댄다는 점은 앞길을 사사건건 막아서기도 하지만, 한국의 붕괴를 막아낼 안전판일 수 있다. 세상은 지금 ‘견제와 균형’의 패러다임을 넘어서 ‘협동과 진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그마가 아니라 상식이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질문이다. 그야말로 ‘이 폭주가 멈추는 날, 진화가 시작되리라’는 새로운 경구가 필요한 순간이다.”
우석훈(성공회대 경제학 강사) 저.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발행) 중에서 -
“우리 밥상의 절반 이상을 이미 수입식품들이 점령해간다고 한다. 시중에 파는 가공식품이나 생선, 고기 등으로 밥상을 차린다면 밥말고 거의 모든 반찬이 수입 또는 반수입이니, 과장도 틀린 말도 아니다. 쇠고기도 마찬가지다. 수입이 자유화된 수입쇠고기의 소비가 80%로 이미 국내산 쇠고기 소비를 압도한데다, 설사 국내산이라고 해도 순수 한우고기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먹거리의 세계화는 어떤 나라 국민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안 지고 있는 몇몇 다국적기업의 손아귀에 세계인류의 생명이 종속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인 몬산토, 콘아그라, 필립모리스, 아처 대니엘 미드랜드 등 농업관련 5대 다국적기업들은 대규모 은행의 대주주인 동시에 최대액수의 대출 수혜기업이라고 한다. 이 같은 식품 기업의 공룡화는 온 세계의 식탁은 물론, 당연히 정치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GATT, WTO 등의 규정을 만드는 데 세계 최대의 곡물교역사인 카길이 지나치게 큰 역할을 담당했고, 역대 미국 행정부의 무역과 농업관련 정책의 자문단은 대부분 이런 기업의 중역 출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족소농 즉 자경농민의 종말은 농민층 분해라는 고통과 비극에서 끝나지 않고, 그 자경농의 토대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온 지역자치주의의 전통에마저 종말을 고하는 반민주적 조종(弔鐘)이기도 하다. 한편 현행의 유기농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닐 사용이다. 비닐을 안 쓰는 쌀농사도 오리나 우렁이에게 제초를 의존하는 한 제대로 된 유기농, 지속가능한 생태농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7월부터 9월까지 두달 남짓한 제초기간을 위해 9개월이 넘게 다국적기업의 수입사료로 오리와 우렁이를 양식해야 하는 사료낭비와 외부의존 문제, 그 농법이 전국화되었을 경우 야기될 수 있는 생태계 문제 등도 고려하고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생태적이고 공생적인 제초방식은 사람의 손으로 하는 노동집약적 제초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동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면한 운동은 생협운동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생태농 공동체를 꾸려내기 위한 귀농운동이다. 수입사료에 의존하는 축산업을 정당화하는 유기농의 퇴비 문제도 지금쯤은 극복할 때가 아닐까 싶다. 지금 쇠고기의 수입개방으로 한우사육농가들이 설 자리를 잃고 이미 소규모 사육농가는 사라져가고 없다. 물론 가슴아픈 일이지만, 이 나라의 농민들치고 그 아픔으로부터 영원히 면제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의 축산업에 의존한 유기농을 축산업에 의존하지 않는 유기농 생산방식으로 일대 전환을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비료도 외부퇴비도 넣지 않고 제 땅에서 나온 보릿짚이나 볏짚만으로 짓는 전통적 순환지속농법으로는 쌀의 생산량이 지금의 약 3분의 1쯤 준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이미 쌀이 남아돌아 모든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이비 유기농 쌀 세가마 값을 그 지속가능 유기농법으로 생산한 두가마 쌀에 얹어서 주는 것이 WTO의 지역소농 공격에서 우리 소농을 지켜주는 현실적이고 가능한 대안이 아닐까? 그리고 농협이 농민 속에서 자생한 협동조직이 아니고 일제의 금융조합 전통을 이은 관제 금융사업기관이기 때문에 농민의 조합일 수 없다면, 도시 소비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생활협동조합은 어떻게 농민의 이익을 대신해 줄 것인가? 아울러 바로 이웃에 사과와 단감을 지천으로 두고 멀리 제주도에서 밀감을 비행기로 실어다 먹는 것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협동운동일 수 없다. 그런가하면 미국의 인류학자 아서 니호프(Arthur Niehoff)는 그의 책 《사람의 역사》에서 약 1만년 전 신석기시대를 ‘노예시대’라고 명명했는데, 우주적 · 생태적 생명평등주의 관점에서는 생명의 생명에 대한 지배는 분명히 노예사역과 같다. 훗날의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사역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동식물을 노예로 사육한 데서부터 출발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노예를 갖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고대사회와 지금의 노예사역의 다른 점은 옛날의 노예사역은 자신이 노예인줄 자각할 만큼 노골적이었지만, 오늘의 그것은 자기자신이 노예화되고서도 그 노예상태를 자각할 수 없도록 그 방법이 매우 교묘하고 지능적이라는 것이다. 외형은 자유인인데 일차적으로는 노동으로 자본에 예속되고, 다음으로는 상품 구매를 통해 자본과 시장에 다시 예속되는 이중의 노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지 않고 또 사람이 사람의 노예가 안되기 위해서 동식물을 노예로 사육하고 재배해야 한다면, 더욱이 우리는 우리 쌀과 우리 농업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자기 먹거리를 지키지 않는 자유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농사에 이런 깊은 메시지가 없다면, 우리보다 공업기술이 훨씬 앞선 선진 강대국들일수록 농업을 버리기는커녕 끝까지 농산물 수출국 지위를 고수하기 위해 다른 산업을 희생하고서도 농업에 갖은 지원과 보호정책을 쓸 리 없다. 그런데 스스로 노예가 되기 싫으면 자신도 노예를 가져서는 안된다. 자유인은 자신도 물론 노예가 아니지만, 노예를 부리는 자 역시 진정한 자유인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동물사육과 사역도 안하고 식물재배(농사)도 안하는 인간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어떤 형태의 노예든 노예사역 없는 인간 삶이 불가능하다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농사, 땅과 하늘의 섭리를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생명농사, 그것만이 노예를 부리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 삶의 업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일한 삶의 길이리라.”
천규석(한살림 운동 대구공동체 조직인) 저. ‘쌀과 민주주의’(녹색평론사 발행)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