稀少價值
<自傳에세이. 7>
"미국에 가고 싶습니까?"
"네! 기회만 있으면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선발고사 통지서를 학교에 보낼 터이니 그때 응시하십시오. 그 대신 교장선생님께 잘 보여야 추천해 줄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Swiger여사와 인터뷰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59년 1월경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로서는 이름도 생소한 사서교사(司書敎師) 강습회가 연세대학교에서 열렸었다. 그 모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어느 날이었다. Swiger여사가 수강자들을 한 사람씩 그의 방으로 불러서 인터뷰를 한 것은. 수강자는 전국 17개 사범학교에서 차출된 교사들이었는데 도미유학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Swiger여사는 피바디(Peabody) 사업단의 과학담당관인 Swiger박사의 부인으로서 이 강습회의 주관자였다. 그때 여사는 50대 초반쯤으로 여겨졌다. 동양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지명(知命)의 연치답다고나 할까. 원숙하면서도 세련된 인품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오래 전에 소식이 끊어져서 지금은 생존 여부도 알 길이 없다.
피바디사업단은 6·25 동란 후의 피폐한 우리나라의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미국 국무부가 파견한 교육사절단이었다. 태내시주의 주청소재지인 내쉬빌 시에 위치한 피바디 사범대학에 그 임무를 위촉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붙은 것이다.
사업 가운데는 교육의 각 분야에 걸쳐서 해마다 몇 사람씩 선발해서 미국의 본대학에 파견하는 계획도 들어 있던 것 같다. 우리수강자 중에서도 2~3명을 선발한다는 고지가 있은 뒤에 인터뷰를 시작했기 때문에 분위기는 술렁거렸다. 수강자 모두의 얼굴에는 긴장과 흥분이 역력히 감돌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외국 왕래를 이웃집 드나들 듯하고 이민을 식은 죽 먹듯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세상에 시대가 다르지만 미국 한 번 다녀오는 일을 가지고 큰 벼슬이나 하는 것처럼 내세운 것 같아서 찜찜하다. 긴장이니 흥분이니 하면서.
그래서 그동안 나는 이런 이야기는 되도록 자제(?)해온 터였다. 그런데 근래 시덥잖게 시작한 글이 '자전 에세이' 의 고정난의 필자처럼 되어버려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자신이 경험한 시대라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사연도 적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하여 밑도 끝도 없이 지난날 인터뷰 하던 기억을 더듬어 본 것이다.
도미유학—, 그때로서는 그것은 사실 하나의 환상이나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가냘픈 한줄기 빛이었다고나 할까. 초청받을만한 뾰족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아놓은 재산이나 튼튼한 배경도 없는 나 같은 시골의 훈장에게는.
당시의 우리나라 국민 1인당 GNP는 수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70달러가 되느니 못 되느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어렵게 살던 시절에 우리 한 사람에게 드는 경비는 3천 달러가 넘는다는 말을 들었다. 선발만 되면 이 경비의 일체를 미 국무부에서 장학금으로 지급한다니 신기루처럼 느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이 꿈같은 일이 나에게도 현실로 나타났다. 강습을 마치고 나서 7개월 뒤의 일이다. 나는 가족들과 Swiger여사, 그리고 동료교사들의 환송을 받으며 김포공항을 떠났다. 일행은 19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제에 부연하면 김포공항은 처음에는 미군의 군용비행장으로 쓰던 것을 1958년 1월에 국제공항으로 개방했다고 한다. 우리가 떠나기 1년 반쯤 전인데 그때는 아직 공항이란 낱말도 들어본 것 같지 않다. 그저 흔한 말로 김포 비행장이었다. Z기도 취항하기전이어서 미국의 서북 항공사의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떠났다. 그때의 가슴 뿌듯하던 감동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말할 나위도 없지만 사람은 누구나 희비가 엇갈리며 살아가게 마련인 것 같다. 그 속에서 인생관이라고나 할까. 얼마나 굳건하게 난관을 극복해 가며 살아가느냐가 문제이겠지만.
나의 경우 생애를 뒤돌아 볼 때 가장 절망적인 일은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갈 때와 일본의 육형(陸形)에서 복역한 일이다. 그때 우리가 동족의 헌병놈에게 끌려간 사연은 다른 글에서도 적은바 있다. 반면 가장 기뻤던 일은 조국 광복으로 육형에서 석방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표현력이 미흡해서 그날의 감동을 절실하게 적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밖에 사법학교 평교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학업을 이수하고 돌아온 일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그때 장도에 오르면서 느낀 가슴 뿌듯한 감동 또한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피바디 사업단의 본거지인 피바디 사범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국'을 떠난 것이다. 일제시대 우리는 그들의 탄압 때문에 '고국'이니 '조국'이니 하는 친근한 낱말들을 마음 놓고 쓰지 못했다.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우리는 동족인 그 주구(走狗)들의 행패에 더 치를 떨었었다.
언제나 독재자나 침략자 자신보다는 앞잡이들이 더욱 고약을 떠는 것은 동서고금의 통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직접 그들에게 시달려본 사람이 아니면 실감이 나지 않을는지 모른다.
시간이 좀 엇갈리는데 '조국'이란 말에서 연상되어 내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 일본에서 만난 한 친구가 머리에 떠오른다. 우리는 그때 조국의 불운한 현실을 들먹이고 있었는데 그가 분연한 어조로 힘주어 한 말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무리 남의 어머니가 잘났어도 어찌 못난 나의 어머니에다 견줄 수 있느냐"라고.
허리가 잘리고 동란의 상흔으로 온 강토가 멍이 든 조국을 그는 못난 어머니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자유당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나라 안은 날마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인 양 데모로 지새우던 때였다. 이첨저첨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조국이 우리에게는 다른 어느 부강한 나라보다도 더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다는 그의 주장에 공감했다. 그래서 나는 숙연한 자세로 그의 뜨거운 주장을 경청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도덕 교과서에 집어넣어도 손색이 없는 교훈적인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지금 태평양을 넘어서 부자 나라에 정착한 지 오래다. 우리나라처럼 국토가 좁은 나라로서는 이민도 애국이고 국력의 신장이라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런 논리에 대해서는 소생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외우(畏友) 김병권 형이 지금도 고국의 품을 얼마나 포근하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의 안부가 사무치게 그립다.
지금은 미국 도처에 우리의 교민들이 이주해서 자리 잡고 사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실제로 지난해에 잠시 돌아본 몇몇 큰 도시에서는 한글간판이 자주 눈에 띄었다. 어떤 거리는 한글간판 일색이어서 우리나라의 어느 거리를 방불케 했다.
L.A. 일대만 해도 우리 교민이 50만 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30년이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그동안 미국 사회가 너무 달라진데 놀랐다.
우리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는 어디에서도 한글간판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미국 내의 여행길에서도 한국 사람을 만날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그 당시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우리나라 사람은 2천 명을 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어떤 조사에 나타난 숫자라고 한다. 그 조사가 정확한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지금과 견준다면 수치상으로는 비율도 따지기 어려울 만치 희소가치는 있었던 것 같다.
매사를 따지고 계산하는 각박한 세상이 된 때문일까. 요즘은 수치나 비율을 앞세우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으로 여기게끔 되었다. 그리하여 소생도 수치를 들먹여 본 것이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것도 가치라고 ‘희소가치’ 운운하고 보니 쓴웃음이 앞선다.
김포공항에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타고 떠나는 대목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이야기가 빗나가고 말았다. 다행히 항공기가 방향을 잃은 것은 아니어서 그때 우리는 무사히 앵커리지를 거쳐서 첫 기착지인 시애틀에 안착했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서 우여곡절 끝에 선발시험을 치른 경위와 미국에서의 뒷이야기는 다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隨筆文學,19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