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차 역사문화지리 트레킹 안내
회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52차 역사문화지리 트레킹은 서울 도성길 걷기, 남산코스 및 남산 둘레길 일원입니다.
서울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조선시대 도성의 일부인 남산코스 및 남산 둘레길을 걸으며 조상의 슬기로운 지혜와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그윽한 향기에 취하며 힐링할 수 있는 그곳, 그길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세부 일정
◯ 만남일시 : 2022년 12월 24일(토요일) 10:00
◯ 만남 장소 : 전철 1, 4호선 서울역 4번 출구
◯ 트레킹 코스 : 숭례문⇨ 남산 백범광장⇨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남측 순환길⇨ 숲길/힐링 코스⇨ 국립극장⇨ 장충단 공원⇨ 지하철 4호선 동대입구역
◯ 소요 시간 및 난이도: 트레킹 약 2시간 30분(휴식, 간식), 8km(난이도: 중하)
◯ 진행자: 지종학, 김현회, 김남선
◯ 길 안내 및 해설: 세계일보 서울포럼 회장 외
◯ 복 장 : 계절 복장(보온의류, 선글라스, 장갑, 모자, 스카프)
◯ 준비물: 간식, 식수, 기호식품, 돗자리
◯ 트레킹 중 안전에 대하여
역사문화지리트레킹은 순수 비영리로 운영되며 카페운영진과 트레킹 진행자는 같은 회원으로서 일시적으로 봉사하는 것으로 트레킹 중 일어나는 모든 사고는 참석한 회원 각자의 책임이며, 어떤 경우에도 카페운영진이나 진행자에게 민, 형사상의 법적, 금전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 항상 회원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에 최대한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참석 신청 자체가 위 사항을 확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 진행자 측 차원에서는 보험이 없으므로 필요시 개인적으로 여행자 보험에 가입해 주시면 됩니다.
◯ 기타 사항
- 정시에 출발
- 회비는 없음
트레킹 종료 후 식사 경우 1/n 원칙
- 당일 트레킹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역사문화지리트레킹 카페 주소(http://cafe.daum.net/trekking7)을 참고 바랍니다.
상세 설명
서울한양도성(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대: 조선전기
-문화재 지정: 사적 제10호
-건립시기: 1396년(태조 5)
-면적: 467,922.6 평방미터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전기 한양 방위를 위해 축조한 성곽. 도성. 사
개설:
서울 한양도성은 서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으로, 도성의 둘레는 약 18㎞이다. 이곳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1~3번지 일대로, 남대문과 동대문 등의 성문과 암문(暗門), 수문(水門), 여장(女墻), 옹성(甕城) 등에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고 서울특별시청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내용:
조선 건국 초에 태조는 한양 천도를 위하여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1395년(태조 4) 9월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성터를 측정, 조사하게 하였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을 비롯하여 인왕(仁旺), 목멱(木覓), 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사산(四山)을 연결하는 5만 9500척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의 민간인 장정이 무려 11만 8,000명이나 동원되어 600척을 한 단위씩으로, 축성구역을 97구(區)로 나누어 정하였다. 구역마다 천자문의 자호(字號)를 표시하여 백악산 동쪽에서부터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까지 구획하였다.
공사는 매 글자 구간 600척을 6 등분하여 각 공사 구간에 판사(判事)·부판사·사(使)·부사·판관(判官) 등 12명씩을 임명하여 민정을 독려하여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책임진 부분에 해당하는 성벽에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높고 험한 산에는 15척 높이의 돌로 쌓게 하였는데, 총 석축 길이는 1만 9,200척이었다. 석재는 자연석을 약간씩 다듬어 쌓되, 기초 석은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평지는 흙으로 쌓았는데 너비는 아랫부분이 25척, 윗부분이 18척, 높이 25척이다. 그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는 성토판축(盛土版築)을 하였는데, 토축의 둘레는 4만 3,000척이었다.
동대문 부근 청계천에 있는 수구(水口)에는 홍예〔雲梯〕를 쌓고 그 좌우에는 석성을 축조하였다. 홍예의 높이는 16척, 석성 등을 포함한 길이는 1,050척이었다.
이 해 가을 징정 8만명을 동원하여 토축 부분을 석축으로 고치고 4대문과 4소문을 완성하였다. 사대문(四大門)이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을 말하고, 사소문(四小門)이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서남의 소덕문(昭德門)을 말한다.
그런데 동대문에만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암문으로 하여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대략의 공사는 이렇게 끝났지만, 남대문은 1396년(태조 5)에, 동대문의 옹성은 이듬해 4월에야 완성되었다.
1422년(세종 4) 이 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토축 부분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어 높여 쌓고 석재를 약 2 : 1 길이 비율의 장방형으로 많이 다듬어 쌓았다. 또한 여장도 쌓았고 수문도 2개 더 만들었다.
전국에서 32만 2,000명의 일꾼이 동원된 이 때의 개축으로 도성은 둘레 8만 9,610척,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城) 6군데가 되었으며, 곡성(曲城) 1군데, 성랑(城廊) 15군데를 만들었다. 그 뒤 1426년(세종 8)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고 성문과 성벽을 보호하게 하였고, 1447년(세종 29) 남대문을 다시 세웠고 1479년(성종 10) 남대문을 중수하였다.
또한 1451년(문종 1) 1월부터 경기·충청도의 수군(水軍) 3,000명으로 성벽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왜군에 의하여 왜루(倭壘)가 쌓여졌고, 이듬해에 수복하여 왜루를 철거하고 그 돌로 다시 수축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부분적인 수축을 하였고, 1704년(숙종 30) 3월부터 약 5년에 걸쳐 오군영(五軍營)에 분담하여 둘레 9,975보, 성첩(城堞) 7,081개의 대대적인 수축을 하였다. 1743년(영조 19) 부분보수를 하였고, 성첩도 회분(灰粉)으로 단장하였으며, 1869년(고종 6) 동대문의 개축을 마지막으로 도성의 수명이 다하였다. 이처럼 서울성곽은 태조 때 창축되어 세종 때 개축되고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축조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세 시기의 성벽은 쉽게 구분된다. 즉, 태조 때의 것은 1척 정도의 다듬지 않은 네모꼴의 작은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나 벽면은 수직이다. 세종 때는 2×3척의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을 아랫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윗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으며 성벽의 중앙부가 밖으로 약간 튀어나왔다. 이 때는 철과 석회를 사용하여 축성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때의 것은 가로·세로 2척의 정방형 돌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이다. 이는 근대적 축성기술의 완성으로 견고한 축성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일제는 근대도시로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경성시구역개수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현재 삼청동과 장충동 일대에만 성벽이 남아 있고, 문도 남대문·동대문·동북문·홍예문뿐이다. 광복 후 1963년에 인왕산 방면과 북악산의 석축을 보수하였으며, 1972년과 1976년에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성곽은 조선시대의 태조를 시작으로 세종, 숙종으로 이어지는 축성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
다.
서울숭례문
요약: 조선시대 서울 성곽의 정문. 1398년에 완성되어 1448년에 개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예를 숭상한다’는 의미로 숭례문이라 하였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누각형 2층 건물로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문이 세워져 있고,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다포 양식의 공포를 얹은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8년 2월 10일 방화 화재로 석축만 남긴 채 누각 2층 지붕이 붕괴되고 1층 지붕도 일부 소실되었다. 5년여에 걸친 복원 공사 끝에 2013년 5월 4일 준공·공개되었다.
국보(1962.12.20 지정).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백범김구선생상(백범광장)
백범광장(白凡廣場) 백범김구상(白凡金九像)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정치가인 김구(金九, 1876~1949)의 항일구국운동과 통일국가수립을 위해 노력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9년 8월 남산공원 백범광장 안에 설립한 동상이다.1949년 그가 암살당한 뒤 2달 만에 김구선생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동상 건립논의가 시작됐다. 장소는 일제강점기 조선신궁(朝鮮神宮) 터였던 남산공원으로 정했다. 동상은 국내외 각계에서 보내온 찬조금으로 1969년 생존 시 만들어진 석고흉상을 바탕으로 조각가 김경승(金景承)과 민복진(閔福鎭)이 조각하여 높이 10m로 만들었다. 1960년에 결성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의 주도 하에 1969년 4월 8일 동상건립기공식을 열고, 그가 태어난 날인 8월 23일 동상제막식을 가졌다.
<출처 : 서울특별시 중구청 문화관광>
남산, 그리고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역사문화 유적에 관심이 있건 없건 간에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남산(270m)에 가면 영욕의 역사 현장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성벽, 봉수대, 와룡묘, 통감부 터, 경성신사. 기억의 터, 삼순이계단. N서울타워, 그리고 케이블카에 이르기까지 과거부터 현재의 이야기와 유적들이 차고 넘친다.
남산 회현자락에 자리잡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옆에는 하얀색 지붕이 덮인 ‘한양도성 남산유적전시관’(이하 전시관)이 있다. 연면적 4만 3000여㎡ 규모인 전시관은 외벽 없이 19개의 기둥과 반투명 지붕 등으로 구성되어 내부가 훤히 보이게 만들어졌다. 유적을 온전히 보호하면서도 관람객이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한 의도일 것이다. 전시관의 내부를 관통하는 약 190m의 성벽 유구는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려서 탐방객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