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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가슴 아프도록 그리운 말들
-오미옥 《내일이면 산벚꽃 환해지겠다》, 서수경 《어떤 통섭通涉 이야기》시집 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상)은 사람과 관계된 복잡한 사회의 전형이다. 사람으로 비롯되어 체득한 경험과 내적 심성이 의식을 변화 진전시키기도 한다. 또한 어떤 대상은 존재감조차 없이 잊히고 마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지만, 시인의 눈빛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온 대상은 특정한 기억으로 오랫동안 잠재되면서 내면에서 재인식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것의 다른 말은 사물이란 형상도 따지고 본다면 실재한 것이기에 충분한 존재 이유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시의 세계 속에서 지시된 사물이란 말은 사실적 형상과 다른 별개를 추론한 것으로 이해된다는 개연성까지 포함한다. 주변의 현상 속에서 보여 주는 사물이 곧 형상으로 이해되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상황도 있다. 예를 들어 시적 대상으로 바라본 나무와 그 나무가 갖는 고유한 물성을 동일하게 인식한다는 것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시각에 의해 전달된 모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 완전한 재현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사물을 언어로 전달할 때 존재와 유사 존재로 또는 실재하지 않는 상상 속 이미지를 구체화 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그것의 또 다른 말은 사실적인 관찰 속에서 이미 알고 있던 사물에 대한 형상과 혼동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간혹 우리는 시적으로 상징화된 사물과 실재적인 사물을 동일하게 인식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것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 시적 표현에 대하여 거론하는 것은 시어가 갖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의 다의적인 의미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것과 상관될 수 있는 지난해와 해를 넘긴 연초에 발간된 시집 중 서수경 《어떤 통섭通涉 이야기》와 오미옥 《내일이면 산벚꽃 환해지겠다》에서 그런 언어적 간극을 느낄 수 있다. 두 시인의 감각적 차이로 보여준 심미적 언어 상황마저 변별성으로 본다면 즐거운 일이다. 그것도 해 바뀌고 1월이니 이미 그 시집에 실린 시들도 전년도가 끝나기 전에 완성된 시공간을 함께 한다는 것에서 인식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일상이란 풍경에서 시적 대상으로 유입된 사물들이 현상과 표상으로 수없이 교차되면서 세계를 아울러갈 때 심미적 충동의 변화도 덤으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시인의 문학 속에 내재된 사물이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형상 그 자체가 재현(표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또 다른 환기는 변화이고 삶 속에서 참다운 나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란 것을 말한다.
고투의 시간 위무하는 자연의 질서
먼저 오미옥 시인의 《내일이면 산벚꽃 환해지겠다》부터 살펴보려 한다. 오랜 고투의 시간으로 이룬 시 세계 안에 현실과 과거를 아우르며 자연의 변화 질서에 순응하는 인식으로 다가간다는 것에서 출발 한다.
얼마만큼 순해져야
네 소리에 가까이 갈 수 있나
산벚꽃 피는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고
산벚꽃 지는 소리마저 못 들었느냐고
내 안의 생이 자꾸 물어 온다
내가 감당해야 할 절망을
앞서 걷는 당신은 알기나 한 건지
서러운 봄날,
그러니 어쩌랴
산벚꽃 피는 자리에서 실컷 꽃구경이나 하자고
마음 환해져서 내려오는 길
누군가 버리고 간 깨진 흙피리
주워 보니 새 울음소리가 난다
새의 울음을 줍는다
-<소리를 줍다> 전문
모든 사물은 고유한 형상을 갖고 있다. 그 형상의 완벽한 성질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내일이면 산벚꽃 환해지겠다’의 시집 제목처럼 꽃의 개화로 보여주는 변화를 전언적 형태로 이해하려는 것은 좋은 예이다. 그런 상상 속 희망이 담긴 일상을 생명의 운동성으로 바라본다면 더 많은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결국 삶의 일부나 전체성을 담고 있는 시의 세계는 존재(생명)에서 비롯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먼저 생명의 본질에서 식물과 동물은 근본적 차이가 있다, 사물 그 자체가 운동성(이동성)을 갖고 있는가와 그렇지 못한가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르다. 먼저 동물성에 기반한 생명체의 예를 들어보면 스스로 발성 기관의 발달로 기인한 소리 성량과 운동성을 갖고 있다. 이와 반대로 식물이나 이외 광물질은 자력에 의한 발성과 최소한의 이동성도 실행할 수 없다. 다만, 외부의 충격에 의해 마찰음을 가질 수 있고 가해진 물리력의 크기만큼 이동성을 갖게 된다. 이와 반대로 동물을 비롯한 인간은 스스로 감정의 상태를 자유롭게 발성하여 외부에 전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어떠한 대상과 비교될 수 없다. 따라서 동물이나 인간이 외부로 드러내는 소리를 통해 최소한의 관심만 가진다면 현재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다양한 ‘소리’는 동물을 비롯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독특한 구개 구조 때문에 가능하다. 근원적인 본성을 상회하는 시적 호기심으로 오미옥 시인은 고유한 물성으로 빚어낸 상태를 주목하고 있다. 화자는 꽃으로 빚어진 풍경속에서 ‘소리’를 ‘줍’는다는 언어 변용으로 활용을 극대화한다. 결국 자연 속 성장을 거듭하며 산에서 자생한 산벚꽃나무를 보면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을 깊은 산속에서 저 홀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온갖 생의 궁리를 다해 가지마다 벙글기 시작한 산벚꽃이다. 그냥 홀로 피고 지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지금껏 세상 잡다한 어떠한 ‘소리’보다 오묘한 궁리가 담긴 생명의 소리를 환하게 핀 산벚꽃을 통해 들은 것이다. 그 ‘산벚꽃’이 품고 있는 자연 속 비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 그러면서 “얼마만큼 순해져야/ 네 소리에 가까이 갈 수 있나”라며 마음을 채근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연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만이 간직한 순응적인 생태 비밀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궁하면 통한다고 산벚꽃이 개화 과정을 의도하며 숨긴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미 풍경을 통해 산벚꽃 피고 지는 순리를 다 보여주었다는 것이고 그것의 전언이 표정의 변화로 인식해야 될 ‘소리’란 것을 알았다. 산을 내려오다 아직도 낭자한 꽃 봄 피는 것을 다 봐버린 흙피리다. 그 안에서 울려 나온 소리란 것도 꽃의 생멸을 보여주는 자연의 순리였다. 이제 산벚꽃이 전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잡다한 세상 소리를 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 사는 것 역시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내 안으로 들이는 것이기에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것과 같다. 그동안 식물과 동물을, 소리발성 여부로 구분하고 여태껏 그렇게 여겨왔던 자신이 부끄러워진 것이다. 산벚곷을 보며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잠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면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한사코 따라나선 길
발걸음마저 뜨겁게 불타올랐다
붉은 숲에 들어
문득 먹먹해지는 마음
사는 일이 이토록 간절한 공양인 것을
돌아보면
누군가 나를 부를 것 같은
무아지경의 숲에 들어
슬프도록 고운 마가목 열매를 생각했다
한 생을
저렇듯 붉게 살다 갈 수 있는 마음
오래오래 들여다보았다
-<붉은 숲> 전문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가슴이 헛헛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치기처럼 올라오는 생각들이 사람 마음을 들쑤신다. 다름 아닌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유목적 충동을 어찌하겠는가? 누군가의 앞선 길을 따라가보자는 심사다. 가도 가도 끝없는 물음의 길에서 묘한 기운이 내 몸으로 들어왔다. 숲을 따라 찰나 같은 동요가 일더니 “문득 먹먹해지는 마음”속 고요가 안개처럼 잦아들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숲에서 아무렇지 않게 홀로 붉어가는 ‘마가목’ 열매를 본 것이다. 마가목처럼 제 안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은 그런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한다. 제각각 가진 열정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이고 마가목처럼 온 숲을 곱게 물들이는 것도 생이란 것을 알았다. 저 홀로 붉어질 수 있는 마가목의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그냥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혹독한 여름의 가뭄과 거친 태풍을 잘 견디고 얻은 소중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안에서 삶의 진리를 터득해가는 열린 마음이 곧 긍정이고 참된 자아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제 몸 안에 든 모든 것이 자연에서 왔으니 욕망을 훌훌 내려놓는 것도 참된 자아의 성찰이다.
<너를 생각하는 날들>에서 ‘딸’의 모습을 보며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상에 젖어든다. 그 시작은 엄마와 딸로 세상에서 만난 하늘이 내린 인연에서 출발한다. 어느 한순간도 마음 놓지 못했던 연약하기만 한 아이(딸)가 잘 자라 서른이 되었다. 엄마의 눈에는 어린 아이같기만 한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난 탯줄의 언어/ 뜨거운/ 눈물겨운/ 시원始原의// 이 넓은 우주에서 만난/ 너라는 문장”이라며 성장한 딸의 모습에서 화자가 소망하던 이상형理想形을 보게 된다. 각각의 형상으로 존재한 자음과 모음처럼 엄마가 바라본 딸은 불안과 불완전한 존재였다. 항상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며 반음半音같던 아이가 마치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 완전한 ‘문장’으로 의미를 담아내듯 눈앞의 딸이 눈부시게 성장한 것이다. 서른 살의 딸을 통해 아슴한 기억 속 과거와 현재로 이어진 소중한 날들을 떠올리며 감동같은 사랑을 전하고 있다.
<천둥소리 하나쯤>에서도 가슴 속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먹고 사는 것이 다들 바쁘다고 하지만, 화자도 그런 부류처럼 너무도 바삐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그처럼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란 이유라면 무엇이든 다 이해되는 핑계로는 그만 딱이었다. 그렇게 회피하듯 살아오다보니 나이 지긋해지면서 눈에 밟힌 누군가 자꾸 떠올랐고 그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인지 뒤늦은 후회처럼 밀려오는 안타까움에 이제라도 마음속에 천둥소리 하나쯤 반성하며 살고 싶다는 작심이다. 앞만 보고 살다보니 “산벚꽃 무너져 내리고/ 빈 하늘 위로 철새들이 날아가는 석양 무렵/ 사랑했던 한 사람이 떠나갔다”며 그리운 사람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는 아픔이 안타까움으로 밀려왔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죽음 저 너머로 떠나가버린 사람에 대한 간절함은 마음만 가능하다. 지나고 보면 세상사가 다 그리운 것들로 이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움만 남기고 간 사람은 불러도 대답이 없다. 다시는 정겨운 말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고 그래서 슬픈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풀리듯 얼었던 땅 위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 기운을 받아 씨앗속에 숨겨둔 싹을 내밀었을 테고 마른 가지들도 눈을 틔워 이파리를 푸르게 펼쳐보일 때 마주친 시선을 들뜨게 해 가슴을 충동한 것이다. 저 푸른 기운 속에 있던 생명을 보며 화자는 <내가 너의 씨앗일 수 있다면>으로 ‘나’와 ‘너’로 대비되는 관계성에 천착하고 있다. 지천명이 넘었다는 화자의 발설을 통한 자기 고백은 완성된 의미보다 부족함이 크다. 저 여린 풀잎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는 연민은 여리고 솔직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날은 『바람의 사원』이란 시집의 저자인 김경윤 시인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 했다. 김경윤 시인은 해남에 살면서 인연됨을 깊이있게 다루면서 불교적 성찰을 시적 세계로 확장해간다. 그런 연유인지 그날따라 “풀씨처럼 내 안을 날아다니는 봄날의 소요”가 평소와 달리 예사롭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고정희 시인이 살던 생가까지 내친 김에 찾아가 그분의 삶과 문학적인 세계를 생각하며 만감에 젖어든 것이다. 그분의 손때가 묻었을 서가를 둘러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물었다. 숲의 나무가 작은 씨앗 속 푸르름의 발현으로 성장하듯 투혼적인 삶을 살다간 고정희 시인이 변화시키고자 했던 세상을 가슴으로 품어본 것이다.
<동백꽃 피는 어머니>는 ‘여순 10·19’의 역사적 진실 속에서 잊혀진 채 치유되지 못한 아픔을 담고 있다. 참고로 오미옥 시인은 ‘여순 10·19 연구소’에서 당시의 참혹한 국가 폭력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연구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 기억은 많은 사람에게 잊힌 채 국가에 의해 자행된 피해 유가족의 기억에만 머물 것을 강요해 왔다. 이 시는 살아남은 피해자의 육성을 녹취한 자료에 근거한 사실이다. “남편도, 아들도 잃은 어머니”는 그날 이후 잠을 이룰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 고통의 시작은 어머니가 “경찰서에 불려가 생동백나무 몽둥이로 맞고 돌아온 밤”의 충격으로 생긴 트라우마다. 어머니마저 고생만 하시다 생명 줄을 놓아버려 홀로 세상에 남은 박복한 ‘딸’이다. 당시 네 살짜리인 그녀는 아버지를 기억도 못하는 데 수시로 경찰서로 불려가 고초를 당해야 했다. 어디 하나 하소연 할 곳도 없는 참담한 고통의 끝은 지독하기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육성으로나마 가슴 속에 맺힌 말을 할 수 있어 좋다면서도 주변을 흘깃흘깃 둘러보는 것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불안한 것을 알 수 있다. 곱게 핀 동백꽃을 보기가 겁난다며 고개 돌리는 모습이 눈 밟히는 요즘이다.
그렇게 꽃 같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질 때에도 우리는 아픈 그들을 잊고 지냈다. 그럴 때마다 <숨죽여 부르던 이름들>에서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의 “순정한 목숨이 하나, 둘 사라졌다/ 오늘 자고 나면 아랫녘 친구가 없어지고/ 또 하루를 자고 나면 웃던 친구가 없어”졌다며 가슴 아픈 현실을 전한다. 그들의 삶이 그러했듯 불안에 떠는 마음처럼 모퉁이에 겨우 의지해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사람들 눈에 띄기도 전 “얼레지, 노루귀, 바람꽃, 개망초, 물봉선, 구절초, 쑥부쟁이/ 그 순한 꽃들이 환하게 피어 바람에 흔들렸”고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며 짧게 끝나버린 꽃들의 시간을 안타까워한다. 그렇게 사라져간 ‘여순 10·19’ 피해 원혼들의 한 맺힌 절규를 화자는 속속들이 가슴에 새기고 있다. 고된 세상 잘못 만나 허망하게 스러져간 피해 원혼들이 우리의 곁을 맴돌고 있다. 다시 불러도 돌아올 수 없는 영혼이지만, 꽃처럼 하나씩 소중한 이름으로 그들을 불러줘야 한다.
<나는 장돌뱅이 13살 순이였다>에서 아름다운 꽃들은 지독하게 짓눌려도 끈질기게 살아 다시 피어났다. 그토록 징헌 세상이 뭐가 좋다고 속창아리도 없는 듯 죽어도 쳐 죽여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봄이면 피어나 사람 속을 긁어놓았다. 13살 장돌뱅이 순이도 그렇게 살아남은 독한 꽃이었다. 아버지는 이유도 없이 끌려가 죽임 당하고 애 들어선 어머니 충격에 사산아 낳아 정신이 나가버린 뒤 ‘13살 순이’의 혹독한 삶이 드세게 시작되었다. 그 땅을 뜨지 못하고 모질게 버티며 살아온 시간을 함께 되새기며 오미옥 시인은 당신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진다. 지독한 팔자를 타고난 듯 생애 전부를 국가 폭력에 짓눌려 지금껏 모진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여순 10·19’의 상처는 지독한 생애의 비수가 되어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놓아 성한 데가 없다. 넋두리 같은 당신(13살 순이)의 말을 미욱한 마음으로나마 대신하여 오미옥 시인은 ‘당신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었어요’라고 말해준다. “그 때 내 나이 열세 살/ 아버지의 죽음도, 손수 묻은 동생의 죽음도 슬퍼할 시간이 없었어/ 퉁퉁 부은 어머니와 마룻장 속에 숨어사는 오라버니”를 위해 장돌뱅이의 고단한 삶과 그날의 참혹함을 세상에 조심스럽게 꺼내놓고 있다.
오미옥 시인의 삶의 지점에서 분출된 문학 전반을 짧은 지면을 통해 말한다는 것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삶의 서사가 시적인 것으로 발현한 것으로 본다면 그만큼 마음 씀씀이가 깊다는 것이다. 매사에 따뜻한 언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드러내지 않고 다독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집 전편에서 고백하듯 한 독백적 발화도 문학과 더불어 사회의식으로 수렴한 표현의 한 방법이다. 삶으로 집중된 심중을 시적인 언어로 수사화 하지 않고 자기만의 변별적 문장으로 무난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도 그 동안 쌓아온 문학적인 내공이다. 그런 기회를 맞아 보편적인 이해와 공감에서 오미옥 시인의 문학적인 세계를 확인해볼 수 있다. 시의 주조를 관통하고 있는 따뜻한 마음이 어디에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시 <오래전의 봄>으로 들어가 보자. “엿을 사 먹을 빈 병도, 놋쇠 그릇도 없는데 마루 위에 놓인 할머니의 흰 도자기를 엿과 바꿔준다는 엿장수 말에 꽂아놓은 고운 진달래를 내팽개치고 엿가락 스무 개와 바꿔 동네 아이들과 속이 데리도록 엿을 먹으며 꿈같은 하루의 봄을 지냈다”라고 오래전 과거를 회상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봄’과 ‘고운 진달래’ 그리고 세월의 연륜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흰 도자기’와 ‘할머니’로 이분하지 않고 ‘엿 스무 개’로 당시를 소중 것으로 다시 환기 집약해낸다.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오랜 삶의 시간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어김없이 반복되는 봄으로 세월과 관계없이 다시 순정한 여린 마음으로 되돌려 놓은다. 그럴 때마다 고운 진달래와 흰 도자기와 연관된 할머니 고운 마음이 실타래처럼 이어진다. 그 아이들과 단내 물씬 품은 봄은 가슴 속 삶의 지표로 새롭게 피어난다. 소중한 것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오미옥 시인이 문학적인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지켜가는 가를 가늠해 보았다. 가장 소중한 것은 순정한 빛깔을 머금은 아름다운 마음이란 것을 시로 보여주고 있다.
시로 재현한 자본이 은폐한 질서
서수경 시인의 시집 《어떤 통섭通涉 이야기》은 지금껏 바라본 세상이 어떤 상관성으로 문학적 재현을 보여주는가에 주목했다. 계절의 변화 주기를 모를 리 없지만, 어느 순간 빠르거나 늦거나 아니면 ‘불쑥’ 와버린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런 일을 경험하며 ‘경이’롭다 말한다. 그 과정을 좀 더 세세히 들여다보면 아무렇지 않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기후 변화에도 자연이 갖는 본성을 잃지 않으려한 치열한 순리 작용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전혀 알지 못한 시인의 시집과 맞닥뜨릴 때도 그런 일과 흡사했다. 서수경 시인도 그렇게 다가왔지만, 알고 보면 오랜 그만의 시적 고뇌를 극복하여 이룬 상관물의 일부인 것이다. 그로 시작된 궁금증은 단순하지 않은 삶의 관계가 응축되어 있어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시인이 가진 본질일 수 있는 지향점도 그렇거니와 반경을 아우르는 사유 현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것까지 이해해야 한다. 첫 만남의 순정한 마음을 ‘처음’이라 하듯 그렇게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씩 알아가고자 하는 시적 이해가 필요한 것임이 절실해졌다. 아차 싶었지만, 속말처럼 은근하게 앵겨 붙어 눈물범벅이가 되어도 꼭 슬픈 것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을 즈음 짠한 가슴을 다독이는 데 ‘개뿔’ 같다며 면박을 후려쳤다.
“봉산댁, 오늘은 날씨가 따숩것소 춥것소?”
해, 달, 별, 바람도 난간에 걸터앉았다 가는
꼭대기집 퍽퍽한 고구마 같은 살림
남편이란 인간은 한 날 숟가락을 꽉 깨물더니만
창시가 고장이 났는가 먼저 가버렸다며
골판지 같은 주름 꼬낏꼬깃하다
복사꽃 같은 마흔일곱 한창일 때
덩그라니 남아 무르팍 아프게 일만 했다
“바람이나 피워 보제 그랬소”
안 그래도 어떤 놈이 서방인 척 찝쩍대길래
동네 복판에서 싸대기를 날렸더니
다른 남정네들도 한쪽 볼을 움켜쥐었을 거라며
강단 있는 봉산댁의 헛헛한 웃음
생때 같은 여섯 남매 키울 생각에
모진 세월 밤낮 가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일만 했다는 우리 봉산댁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쓴맛 나는 인생사
남편 따라온 길, 눈 오는 날은 잘 산다더니
머릿결에 하얀 눈만 내리고 홀로 남겨진 사랑
개뿔!
-<개뿔> 전문
신파조 대사를 읊는 듯한 봉산댁의 기구한 한 생을 듣고 있노라면 꼭 그리 슬퍼할 일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개뿔>이란 시에서 봉산댁의 알싸한 불면같은 넋두리가 마음을 후려왔다. “봉산댁, 오늘은 날씨가 따숩것소 춥것소?”라며 물었을 정도로 열악한 산꼭대기 집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해, 달, 별, 바람도 난간에 걸터앉았다 가는/ 꼭대기집 퍽퍽한 고구마 같은 살림”살이란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기구한 사연도 참 허망하다. 그야말로 횡액처럼 닥친 남편의 죽음이었다. 어디다 뭐라 하소연도 못할 사나운 팔자탓이니 했다. 남편이 남긴 유산은 먹여 살릴 여섯 남매였다. 그때 봉산댁 나이가 마흔 일곱이었으니 자식들 쑥쑥 크는 재미에 하루 하루가 즐거웠을 때였다. 하루아침 박복한 처지가 되어버린 봉산댁이었다. 그래도 단단히 정신 차려 어미 노릇하겠다며 생업에 나섰지만, 장터란 곳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별의별 남자들이 혼자인 것을 알고 홀몸인 봉산댁을 힘들게 했다. 그렇게 지독한 세월을 이겨내 다 장성시키고 이제 농반 진담 반을 섞어 살아온 고생담을 남의 이야기 하듯 풀어낸다. 그 한마디 한마디가 곡절 깊은 사연이어서 듣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 사이사이 헛말처럼 인생 별것 아니더라며 웃음 섞은 말투를 내뱉지만, 쉽게 들리지 않는다. 농 치듯 바람이나 한번 피워 보제 그랬냐는 말에 마치 흥겨운 장단에 추임새를 넣듯 가볍게 받아넘기는 봉산댁이다. 어찌 성한 여자 몸으로 그럴 맘이 없었겠냐고 댓거리를 하신다. 제 배로 낳은 아들 여섯이 뭐라고 도저히 사람으로서 그럴 수 없었다며 독해지지 못한 것이다. 그놈의 하늘이 내린 인연이 무언지 눈 밟혀 그렇게 안 했을 뿐이다. 어머니의 사랑 깊은 마음을 자식들이 모를 리 없다. 그리했으니 지금의 봉산댁의 사연이 서수경 시인의 시집 복판에 올라온 것이고, 사람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며 사람답게 사는 법을 조곤조곤 들려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젊어 시집오던 날 “남편 따라온 길, 눈 오는 날은 잘 산다”는 세상 말 그대로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홀로 남아 고생이 뻔한 처지인 “머릿결에 하얀 눈만 내리고 홀로 남겨진 사랑”이란 것도 그 당시 팔자려니 해야 했다. 다 사람 듣기 좋으라고 지어낸 허무맹랑한 말에 더 이상 속을 일이 없다는 듯 불쑥 내뱉는 ‘개뿔’이 귀를 때린다. ‘개뿔’은 봉산댁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얻은 생에 대한 절대적 단언斷言이자 냉소인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의 절박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런 처지에 처한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는 법이다. 시 <노동의 한 끼>란 의미가 그랬다. ‘노동’이란 말과 ‘한 끼’란 의미가 절박함과 치열한 현장성과 결합되어 사회 현상으로 환기된 것이다.
제복 입은 노동자들이 오그라든 가슴으로 문을 연다
게가 수복이 쌓여 눈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주시한다
게껍질처럼 단단하게 무장한 사람들
게거품 물고 집게발 세워가며 세상 속에 각을 세우며
속 찬 게맛처럼 사는 사람들
등딱지처럼 밥 한 숟가락 꾹꾹 눌러 게눈감추듯 해치운다
국동어항단지 허름한 음식점 단돈 팔천 원의 행복
구수하고 맛깔 나는 삶을 위해
두 눈 똑바로 뜨고는 볼 수 없는 세상
게슴츠레한 눈으로 삶의 바닥을 훑어내는,
<노동의 한 끼> 전문
여기서 화자가 말하고자 한 근원에는 건강한 노동과 그로 인해 환산된 물가지수를 연동하고 있다. 게장 백반으로 허기를 때우려고 노동자가 주머니 속 화폐를 저울질했을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본 것이다. 길가 난전에 놓인 함지박 속 꿈틀대는 ‘게’를 보다 마침 우루루 쏟아져 나온 공단의 노동자들과 마주쳤다. 화자가 바라본 현상에서 본질은 다르지만, 누군가에게 팔려 간다는 것과 화폐 가치만큼 교환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행인의 거친 손길에 게거품을 물고 집게발을 쳐든 ‘게’를 보며 생존의 치열함을 생각한다. 마침 긴 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정문을 빠져나온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들이 팔 천 원짜리 게장 백반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는 것을 보며 물질적인 풍요가 넘친 현실에서 반비례한 노동의 고달픔을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 사회의 양적 팽창이 가능케 한 경제성장의 기여에는 허기진 그들의 희생이 있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들은 때때로 최소한의 비용이 드는 밥집을 찾아 배고픔을 달랠 것이다. 그들의 주머니는 그만큼 작아지겠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은 그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본질보다 차원이 다른 자본의 논리가 정치성과 결합한 거대한 카르텔에 뒷배가 있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다.
<본의 아니게, 라는 말>의 시에서 화자는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생각해보았다. 남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 사회의 경쟁 논리는 ‘나’란 존재가 모든 것에서 우선시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든 행위에서 주체도 실행 결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여야 한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아예 ‘나’ 말고 ‘너’라는 상대는 없거나 인정해선 안 된다는 나쁜 아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몇 해째 걸음마 중이냐고/ 힘없는 다리 곧추세우고/ 강해져라 닦달”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오직 화자만의 기준이고 그래야만 하는 원칙이었던 것인데 사실 그것을 실행해야하는 대상은 타자인 ‘당신’인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화로 무너진 신체 균형은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악화될 수 있는 것으로 지금껏 무리한 강요만 해왔다는 것을 비로소 느낀 것이다.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고려될 수 없다. 나를 위한 삶이 우선이겠지만, 먹고 사는 것 말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겠다는 욕망도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늦은 반성이 생각의 변화를 초래한 의지의 실천이란 것을 충분히 알았다.
<오두머니> 란 시를 보자. ‘오두머니’란 말뜻은 순간 닥친 상황에 당황하여 분별력을 잃은 상태를 이른다. 그런 상황에 처한 화자를 상상해본다. 그것도 알고 보면 남이란 존재보다 자신에 우선한 판단에 따르다 발생한 상황에서였다. “황태처럼 마른 아이/ 어색해진 공간을 지우기 위해”, 몇 학년이냐고 물었고 그 아이 “양 손가락 검지를 치켜”들었고 그런 상형 표현을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1학년 1반이라고 인식한다. 흔하게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렇지만, 둘 사이 인식의 차이는 소통불가다. 특히 아이는 당당히 아니라며 11살을 의미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순간의 오판으로 좋았을 분위기가 여지없이 어색해져 버렸다. 이 시에서도 주관적인 생각이 사회성으로 확장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나 불통의 한 예일 수 있다. 대화나 문자나 일방적인 생각의 파장이 어디까지 영향을 끼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잘 우려낸 치자물에 순백한 천을 담궈
조물조물 주무른다
손아귀에 움켜쥐고 쥐어짠다
실로 질끈질끈 묶어 숨도 못 쉬게 한다
날 좋은 날 오글오글해진 천을 인정사정없이
탈탈 털어 햇살에 펴 말리기를 대뎌섯 번,
환골탈태이다
성숙한 삶도 이와 같을까
나의 색 위에 덧칠되고 채색되어
꽃물 곱게 물들이고 싶다
-<치자꽃에 물들다> 부분
염색통 안에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하얀 천을 본다면 누구라도 한 때나마 자신도 그렇게 곱게 물들여지고 싶어질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렇게 생의 화려한 순간을 맞았으면 하는 꿈을 꾸며 산다. 화자도 치자 열매에서 우려낸 물에 담가 스며드는 하얀 천을 보며 환상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런 황홀경에 도취된 것은 화자만이 아니다. 현실감을 혼돈한 듯 “허락 없이 찾아 들어온/ 벌 나비 손짓 발짓도 좋아” 주변을 맴돌고 있다. 물감이 밴 염색 천 주위를 벌 나비들이 맴도니 분위기에 동화된 마음이 현실을 잠시 잊은 듯하다. 혼몽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는 듯 “고슬고슬 탈색되고 고집스런 색감”에 더할 나위 없는 한 때를 만끽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루고 싶은 삶의 모습인 것처럼 “성숙한 삶도 이와 같을까/ 나의 색 위에 덧칠되고 채색되어/ 꽃물 곱게 물들이고 싶다”며 소망을 염원한다. 그 바람은 화자가 가질 수 있는 문학적 상상이 아닌 현실이어야 한다. 그것은 오랜 준비와 기다림을 수반한 고통의 크기로 비례할 것이다. 천상의 색감을 우려낸 치자도 하루 아침에 익어간 것이 아니듯 하얀 천도 오랜 누군가의 고통 스런 손길로 한 올 한 올 직조한 고된 노동의 결실이었다.
일상에서 느낀 무언가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둥근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아니면 그와 반대인 둥글기에 적합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저 보이는 둥근 것을 죄다 아름다운 것으로 이해한다면 세상은 온통 둥글어야 옳다. 그러나 서수경 시인은 <맨홀 뚜껑>이란 시에서 색다른 생각을 드러낸다. 왜 맨홀 뚜껑은 삼각형이 아니고 원형인가 의아했다. 그 궁금증은 충분히 그럴만한 의도가 있다고 믿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쓰레기 더미를 양손으로 안되어 가슴까지 안고 가는 여자를 만났다. 그냥 있지 못한 오지랖이 발동해 도와주겠다 하는데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되받아친 것이다. 순간 “도움을 준대도 받을 마음의 준비가 없는/ 그녀의 입 모양이 삼각형 맨홀뚜껑으로 보인다”며 그제서야 “나 또한 누군가를 무시하며/ 날 선 언어로 입 벌리고 있을까/ 둥그란 맨홀뚜껑처럼/ 각 잡지 안아도 품위 있어 보이는” 삶에 대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냥 지나칠 만한 일에서 스스로 반성하는 전환적인 사유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서수경 시인은 더불어 잘 살아가는 둥글둥굴한 세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둥굴다’는 의미언은 형상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도 나은 내일을 위한 고통을 감내해 왔다는 것을 <고진 마을 어부 아버지>에서 말해준다. 종종 힘들다는 말을 비치셨는 데 요즘 집에 들어오실 때는 부쩍 등이 더 둥굴어져 보였다. 여수시 화양면 바닷가의 ‘어진 마을’에서 고기잡이 나서기 좋은 물때를 기다렸다. 바다에 나선 아버지에게 “파도의 관절이 으드득 부서지는 그때가 다가올 즈음// 고돌산 선소 앞바다의/ 심장 소리는 고요를 깨우고 파닥인다/ 불빛에 끌려,/ 떼거리로 몰려와 치솟는 멸치들의 반짝임”이 꿈처럼 요동쳤지만, 아차 하는 순간을 놓쳐 만선의 희망이 멀어지곤 했다. 간혹 허당처럼 끝없이 헛물만 켜는 것이 미안했던지 망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바다의 물때만 탓하셨다. 그런 횟수가 반복되면서 힘에 부친 아버지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당신 탓이라고 되뇌셨다. 그것도 아쉽기만 한 추억 너머의 아련함 뿐으로 이제는 그마저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다. 마음이 이토록 아픈 것은 고단한 아버지의 삶이 멈추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과 고통이 점점 더 가팔라진다는 것에 있다. 당신의 노쇠한 모습을 보며 허망한 세월을 거둘 수 없어 안타까운 것이다.
서수경 시인이 문학에서 보여주는 시의 경향은 전체적으로 삶의 모습의 환기인 것이다. 그런 경향은 지역이나 시공간에 한정하지 않은 사회성에서 천착한 실상을 생애라는 서사로 전유한다. 그 실상은 가슴 아픈 이야기거나 그와 반대로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맞닿아 공감할 수 있는 담론적 언표다. 감전의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온 말들이 오랫동안 심연 속을 응시하듯 주체가 되어 문장이란 형상 속에서 더 많은 알레고리적인 상상력을 증폭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감각의 주체를 깊은 사유로 포착해낸 저음부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의 인식은 살만하단 긍정을 효과적으로 유인하는 단초인 것이다. <콩깍지>에서 “이제 와 보니 그만한 나무도 없어야// 늘, 그늘이 되어줄 사람”을 가리키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한 것에는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확인해준다. 더 아련하게 가슴 울리며 <사라진 골목길의 소리>는 꿈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환청이다. “ “이 가시내야 밥 묵게 언능 안 들어오냐” ”란 그 소리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어머니의 속 깊은 사랑이다. 잔잔한 울림을 전해주는 서수경 시인의 시편에는 못다 한 말들이 많다. 자식 잊지 못해 맘 놓지 못한 당신은 우리 모두의 속 깊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엄마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엄마의 자리를 놓지 못하고 “어쩌다 파삭하고 밟힌 나뭇잎의 관절이/ 어긋난 삶을 이어오며 ‘짐’이라 여기는/ 엄니의 외마디 신음소리 같”아 안타깝다. 노쇠해져 버린 당신 앞에 놓인 세월을 밀쳐낼 수 없기에 마음은 더 아프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여운 깊은 미련이 될 따뜻한 마음이 곧 시인의 모습이라면 시가 가져야 할 근본에 충실한 것 아닌가? 그래서 순한 마음을 담은 시들은 먼 훗날 그리운 추억처럼 아련해져 다시 읽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