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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특집 (07)] 잡지 ‘어린이’로 보는 100년 전 어린이 놀이
어린이 관점에서 고민한 어린이 ‘놀 권리’… ‘말판, 잡지보다 비싸도 싣는다’
5월5일은 어린이날이다. 365일 중 364일이 어른의 날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은 사회에서 소외됐고 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어린이 인권운동가 방정환이 참여한 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으로 국립한글박물관이 잡지 <어린이>에 대한 전시를 개최한다. 미디어오늘은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100년전 ‘어린이’의 모습을 <어린이>를 통해 조명해보려 한다. - 편집자주
어린이에게 중요한 권리, ‘놀 권리’는 100년 전 만들어졌다. 어린이 인권활동가 방정환 등이 만든 잡지 <어린이>에는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실제 어린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놀이’를 고안했기 때문이다. <어린이> 편집진들은 일제 검열 속 시대정신을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담았다. ‘조선 13도 고적탐승말판’, ‘닭알 팽이’ 등 <어린이>에 실린 놀이를 살펴봤다.
100년 전 <어린이> 7권 제1호 부록에 실린 ‘조선 13도 고적탐승말판’은 방정환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이 실린 ‘13도 고적 탐승 말판 노는 법’도 방정환이 직접 작성했다. 세련된 색감을 자랑하는 이 게임은 현대의 보드게임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방정환이 ‘보드게임 창시자’로도 불리는 이유다.
▲ 7권 제1호 부록에 실린 ‘조선 13도 고적탐승말판’ 자료=국립한글박물관
우측 하단 구석이 남대문, 시작 지점이다. 좌측 맨 상단 위치한 백두산에 도착하면 이긴다. ‘말판 노는 법’에는 콩, 팥 등을 활용해 말을 지정하고 작은 윷을 만들어 사용하라고 명시했다. 중간 ‘또’자가 쓰인 곳에 도달하면 윷을 한 번 더 던질 수 있고, ‘휴(休)’에 가면 한 턴 쉬어야 한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즐겨하는 보드게임 ‘부루마블’과 비슷하다.
하지만 세계 유명 도시가 적힌 부루마블과 달리 고적탐승말판은 당시 조선의 행정구역인 13도의 ‘고적(옛 문화를 보여 주는 건물이나 터)’이 각 칸에 적혀 있다. 어린이들은 게임을 할 때 자기 말이 가게 된 칸의 지방 이름을 ‘어느 도 어느 군’하고 크게 외쳐야 한다. 먼저 부르지 못하거나 잘못 부르면 ‘휴(休)’ 칸에 간 것처럼 한 턴 쉬어야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였던 당대 시대상이 반영된 흔적이다. <어린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문화통치를 꾀한 시점에 창간됐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한국사, 한국지리 수업이 사라졌다. 이러한 시점에서 잡지 <어린이>가 놀이에서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남한산성, 선죽교 등 조선 전체를 유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외에도 <어린이>는 <금수강산 평양성 기린굴 이야기>, <천하 제일 금강산> 등 다양한 지리 관련 이야기를 잡지에 담았다. <어린이>에는 ‘백두산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을 찾는다’는 독자 소식도 담겨 있다.
▲ ‘어린이’ 8권 2호에 실린 ‘어린이 대운동회 말판’ 자료=국립한글박물관.
▲ 잡지 ‘어린이’에 최신식 팽이로 등장한 ‘닭알팽이’. 자료=국립한글박물관.
눈에 띄는 보드게임은 ‘고적탐승말판’ 말고도 많다. 8권 2호에 실린 ‘어린이 대운동회 말판’도 당대 보기 힘든 획기적 아이디어가 녹아있다. 우측 하단이 시작 지점으로 순서대로 윷이나 주사위를 던져 나온 숫자만큼 앞으로 나아간다. 재밌는 것은 중앙 부분에 있는 ‘좁은 통속 기어나가기’인데, 좁은 통속이라 앞의 말을 제쳐갈 수 없어 역전이 쉬워진다. 보드게임 이외에도 ‘성냥개비 놀이’, ‘닭알 팽이’ 등 재밌는 것이 많다. 달걀 팽이는 그 당시 미분지로 달걀 둘레를 뺑 둘러 만드는 최신식 팽이였다.
어린이는 일반적으로 교육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 하면서도 결국은 어른 입장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던 <어린이>는 자체적으로 게임을 만들며 어린이의 ‘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린이>는 말판놀이를 할 수 있도록 보통 말판을 부록에 같이 실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책보다 비싼 경우도 있었다. 말판이 실릴수록 손해였지만 어린이를 위한 일념 하에 잡지를 계속 발행했다.
▲ 1923년 5월1일(당시 어린이날) 발표된 어린이해방선언 중 어른에게 드리는 글. 자료=국립한글박물관.
방정환이 결성한 소년운동협회가 1923년 5월1일(당시 어린이날) 발표한 ‘어린이해방선언(당시 소년운동의 선언)’의 3항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어른에게 드리는 글엔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라고 했다.
100년 전 경성 한상천 어린이는 잡지 <어린이>에 이런 후기를 보내왔다. “<어린이> 신년호는 표지부터 뒷장까지 골고루 굉장히 어여뻤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모두 재미있고 유익한 것뿐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깔깔소학교’와 ‘뼈하고 가죽하고’, 또 ‘키 큰 이와 키 작은 이’, ‘딴청 잘하는 당손이’를 읽고 집안 사람과 같이 어떻게 깔깔거리고 웃었는지 그만 배가 탁 터졌습니다. 이 책임은 누가 지실지 모르나 하여간 나는 재판이라도 해서 그 글 써 주신 선생께 치료라도 받아야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100년 전 어린이선언을 얼마나 지키고 있을까. 우리에게도 <어린이>가 필요한 시점이다.
※ 참고문헌
김경희, <어린이>에 수록된 옛이야기 DB구축을 통한 현대 어린이 콘텐츠 개발-지역탐방 콘텐츠를 중심으로
박재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