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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Text Rm 10,11-17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라는 말로 통용되고 있지만 실상은 종교라는 말보다 교회라는 말을 써서 교회개혁기념주일라고 하는 것이 맞는 주일입니다. M. Luther 이전에도 이미 교회 개혁 운동은 있었지만 개혁 운동에 대한 로마교황청의 박해를 이겨내고 개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개혁 운동은 M. Luther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가톨릭 체제의 기독교를 개혁한 개혁교회(개신교)가 탄생하였기 때문에 이 교회개혁기념주일은 로마가톨릭(천주교)이 아닌 기독교(개신교)가 탄생한 주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국교로서 교황이 로마 황제를 임명하는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이상이 실현되고 있는 세상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만 로마가톨릭은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반대로 부패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교권과 세상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성경 외에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비신앙적이고 반신앙적인 주의 주장을 내세우고 세속 권력과 손잡고 사람들을 억압하면서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로마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시기를 문화사에서는 ‘중세 암흑시대(the Medieval Dark Ages)’라 할 정도입니다.
M. Luther가 목숨을 걸고 일으킨 이 교회 개혁 운동은 그렇게 성경에서 벗어나 있던 기독교회를 성경적 기독교회가 되게 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이 내세우는 전통(교황권)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질 수 없으며 모든 전통은 성서의 권위 아래에서 성서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회개혁기념주일의 중심에 있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야기를 롬10,11-17를 본문으로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 먼저, 11-13절을 봅니다.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구원의 간략한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마음으로 믿는 가운데 영혼을 맡기며 입으로 고백하여 자신의 영과 혼과 육신 전부를 그리스도께 드리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앞 절에서 말했습니다. 이 믿음의 조건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등 민족과 국가에 차별이 없으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주로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주장이 자기가 만든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11절에서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나와 있는 성경은 사 28,16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놀라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헬,ouv kataiacunqh,setai 영,will never be dismayed)”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그가 본분을 다하는 길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피해 달아나려고 서두르지 않으며 멸시받는 믿음을 수치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그의 목표에 있어서도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주 예수에게 맘 푹 놓고 믿고 맡겨 쉬는 믿음을 가진 자는 그걸 후회할 일이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요, 그 성경 구절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우리 성도들 믿음의 근거입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것을 떠난다면 그 떠난 주의 주장을 하는 그때부터는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미개인이든 모두 성경의 가르침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유대인이라 해서, 또는 그들이 헬라인이라 해서 구원하거나 배척하시는 게 아니라 양자를 모두 복음의 조건으로만 받아들이십니다. “차별이 없음이라”가 성경입니다.
삶은 기준이 중요합니다. 근래들어 우리나라는 가을부터 봄까지 큰 산불이 자주 발생하여 어려움을 겪습니다. 산불이 발생하면 대응 단계에 돌입합니다. 대응 단계는 1단계부터 3단계까지가 있는데, 최고 대응 태세 3단계가 발령되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소방차들이 화재진압을 위해 총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군인에게 복무 규칙이 있고, 공무원이나 직장인도 그에 따른 근무 기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도 세워진 기준에 맞춰 살아가고 한 개인도 각자마다 세운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관계되는 신앙생활도 기준을 더욱 명확하고 엄격하게 세워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입니다.(딤후3,16-17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시대가 변해도 성경의 가르침은 변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과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혜를 제공합니다.(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성경의 원리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요3,16) 성경을 통해 우리는 믿음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는지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교회개혁기념주일에 성경은 교회 공동체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로,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세우는 기초가 되며, 성경 공부와 나눔을 통해 성도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아야 하는 것을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깊이 묵상하고 적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굳게 결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아멘.
3. 다음, 16-17절을 14-15절보다 먼저 봅니다.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 바울께서는 기독교의 믿음을 전파하여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 16-17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께서는 여러 곳에서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는 성구를 새번역 성경에서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유대인 모두가, 이방인 모두가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양측의 절대 다수가 불신과 불순종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께서는 본 구절에서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 ‘믿는 것’을 동일시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고,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거꾸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것은 말씀을 듣는다는 것도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귓전에 복음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복음은 그에게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또한, 본문의 구절은 듣더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겨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가 그 말씀입니다.
여기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말씀 대신 세상으로부터 오는 말을 들어 동생 요셉을 노예의 값을 받고 애굽 상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 동안 길고 긴 고난의 삶을 살았던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끈질기게 유혹하는데도 마음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총리가 된 요셉 앞에 형제들이 왔을 때도 형들은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순종하여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라며 두려워하는 형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탄의 말,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라는 말을 듣고서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라는 비성경적인 믿음이 생겼었습니다.
인간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너무 잘 압니다. 대부분 본능에 충실합니다. 이익 추구에 엄청 영리합니다. 본능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골3,1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골3,5에서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자동차의 안전띠를 생명줄이라 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이야말로 성도를 믿게 하고 믿어서 하나님께 보호받고 약속하신 구원받게 하는 생명줄입니다. 교황의 권위로 면죄부를 팔면서 교황의 권위가 보장하니 면죄부를 사면 죽은 조상들까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절대로 거짓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구원의 길임을 들고 일어섰던 M. Luther의 외침이 오늘 우리의 심령에도 들려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4. 마지막으로, 잠시 건너뛰었던 14-15절을 봅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합니다. 하지만 긴 인생에는 정해진 정답은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인생에 정답이 없습니다. 단지 정답자인 하나님만 있을 뿐입니다. 정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생에는 정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정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명답이고 성경은 정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16,31절에서 베드로는 외쳤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인생과 영혼의 정답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가톨릭이 국교여서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 되고, 거절하면 ‘주민등록’마저 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로마가톨릭 신앙 아래에서는 하나님이 구원이시고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시며 이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씀을 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기준으로 하는 성경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생깁니다.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산다 하더라도 성경적 구원의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믿지 않으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구원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개혁교회의 존재 이유는 들은 복음을 다른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는 부모를 둔 자녀에게도 전하여 믿게 해야 하고, 교회가 많은 나라에 사는 국민에게도 전하여 믿게 해야 하며, 전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던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생기도록 전하여야 합니다. 단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기만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호감을 가질 수 있어서, 들을 마음이 생기고, 듣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 있도록 복음 전파 사역을 해야 합니다.
개혁교회 성도인 교우 여러분,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소리가 우리 성도들이 듣는 소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마9,38) 하고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이 사역에의 자격과 적성을 갖춘 자들을 가려내어 대를 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만대에 걸쳐 존속되고 그의 보좌가 천상에서처럼 빛나게 한다는 사명감을 갖춘 자들을 발굴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오직 성경으로만!’을 믿는 개혁교회 성도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결심하고 실천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