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시> 121호와 함께 하는 "해맞이 단상"
해맞이 단상
- 서울 아차산, 한강
차용국
새해를 보러 아차산으로 간다. 새벽잠을 애써 참고 아차산역에 도착하자 이미 수많은 인파의 행진이 보인다. 고구려정과 해맞이광장은 발 디딜 틈이 없어 정상인 제3보루까지 올라간다. 정상도 마찬가지다. 햐~! 이 많은 사람이 새해 첫날 아차산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다니…… 매일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해이건만, 새해 첫날 해를 맞이하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소망을 품고 싶은 거다. 여기서 이렇게 해를 기다리면서……
마침내 해가 한강 너머 산 능선 위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서 해는 맑고, 깨끗하고, 눈부시다. 올해 내내 지금만 같으면 좋겠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찌 근심과 우환이 없겠냐만, 세상과 사람에 대해 덜 실망하고, 덜 미워하고, 덜 아파하며 살자.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더 기뻐하며 살자. 지금 해맞이하며 다진 마음만은 꼭 쥐고 살자.
비록 이런 다짐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삶이라는 일상의 길에서 부딪히는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생각하고 반응하는 자세나 여로旅路의 지표指標로 새겨서 때때로 반추反芻하며 걸어가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삶을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여행이라고 할 때, 궁극적인 목표는 꼭 현실에서 달성할 수 있거나 완료할 수 있는 목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목표에 평생을 걸 만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목표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도중에 잠깐잠깐 들리는 기착지寄着地처럼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여로의 길목에서 얻을 수도 있는 크고 작은 선물과 같은 것일 듯싶다. 그리하여 그런 목표는 꼭 한 가지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 그것을 단 하나의 올바른 목표라고 굳게 믿으며 주력해야 할 일도 아닐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목표는 여러 가지이어야 하고,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걷는 길에서 스쳐 가는 이정표처럼, 때때로 거치는 다양한 목표들은 크게 연연하지 않고, 다소간의 차이와 균형과 조화의 시선으로 변경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이든 하나의 목표만을 설정하여, 그것이 불변의 신념이나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며 한 방향으로만 작동할 때, 오히려 비생산적이며 위험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 단일성의 믿음과 작동체계야말로 길에 박혀있는 돌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영험한 비밀을 캐내겠다고 헤매는 연금술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뻗은 지름길처럼 보이는 길에서 숨어있는 늪지를 만나고, 먼 길처럼 보이는 길이 사실은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할 듯싶다.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고, 길은 어떻게든 길로 이어진다.
궁극적인 목표는 당장 달성해서 종결할 현실의 실체가 아니라 영원한 지향성을 의미하는 무엇이어야 하지 않을까? 천문학자가 우주의 신비를 찾아 끝없이 우주 탐험을 떠나듯이, 작가가 새로운 작품 창작을 끝없이 갈망하듯이…….
한강으로 내려와 걷는다. 겨울날의 새벽 한강은 허허롭고, 그렇게 텅 비어있는 공간을 홀로 걷는 호사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진다. 강길을 홀로 걷는 것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난 사색의 자유 공간이다. 현실의 나와 내면의 내가 만나 나누는 대화의 길이기도 하다.
어쩌면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한 지향성의 하늘에서 빛나는 북두칠성 같은 것이어야 마땅할 듯하다. 별은 미지의 베일에 가려진 과학과 상상의 세계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한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상과 생각을 다져가며 쌓아가는 이상의 세계에서 우뚝 드러낸 모습으로 현실을 비추는 것일 듯싶다.
창조는 목표지향성 속에서 발아하고 성장하고 변형을 드러낸다. 내가 상상하고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그려보자. 그곳에서 진정으로 세워야 할 궁극적인 목표와 그 여로에 세울 크고 작은 목표를 찾아보자. 그리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자. 꿈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친구라고 한다. 목표를 지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꿈에 점점 다가가는 것이리라.
뇌과학자들은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그 의미와 의지를 강화할 때, 뇌의 시냅스 연결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시냅스는 뇌에서 자극과 신호를 주고받는 뉴런과 뉴런 사이의 틈(연접부)으로 뉴런에서 방출하는 신경전달 물질을 결합하여 생각과 감정, 인격과 같은 정신활동의 근원을 만들어낸다. 시냅스의 연결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정신활동이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 시냅스의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고, 예기치 못한 순간의 섬광(flash of insight)처럼 통찰력이 작동하여 창조성이 일어난다. 반면에 목표가 없고 의지가 없을 때, 뇌는 무기력하고 우울해져서 창조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창조성은 목표와 의지를 감지한 뇌의 네트워크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잠자는 정보를 깨워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고 강화하면서 터뜨리는 불꽃이다.
목표지향성은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만족감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로 작동하여 직관력과 통찰력을 증폭시킨다. 목표지향성은 뇌가 창조의 세계를 항해할 수 있게 하는 메카니즘이며 생명의 힘이다.
문득 오래전에 시를 공부하면서 적어 놓았던 글이 떠올라 스마트폰 노트를 열어본다. 구상 시인이 『현대시창작입문』에서 시창작 과정을 모차르트와 베토벤에 비교하면서 쓴 글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작품 창작 과정은 매우 대조적이다. 모차르트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악상이 떠오르면 그것을 즉석에서 보표譜表로 옮겨 놓았다. 그러면 훌륭한 음악이 되었다. 베토벤은 어떤 테마가 떠오르면 그것을 메모해 놓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걸려 가며 완성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최초의 악상 메모를 뒷날 발견한 연구가들은 그 미숙하고 졸렬까지 한 최초의 발상 속에서 어떻게 그렇듯 훌륭한 기적적 결과가 나왔을까 하고 놀란다고 한다.
시 창작에서 종종 일어나는 이런 경험은 어느 것 가릴 것 없이 소중하다. 시인은 어느 순간 섬광처럼 빛나는 영감을 받아 단숨에 시를 짓기도 하고, 오랜 다듬질을 겨우 마치고 비로소 세상에 시를 내보내기도 한다. 모차르트처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듯 만든 작품만이 명작은 아닐 것이다. 모차르트형과 베토벤형은 개인의 재주나 능력의 우열이 아니라 창작의 과정과 유형에 관한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길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을 듯싶다.
어느덧 새해는 중천에 뜨고 한강 둔치의 길에는 걷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제 그들에게 길을 비워주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지하철 앱을 열고 가까운 역을 탐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