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합정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파주 출판단지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하루만이라도 육아 걱정없이 하루종일 책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대학생 때는 책을 좋아해 문학 공모전에도 종종 출품했던 친구는 이제는 문학가의 꿈은 접고 유아용 책이 거실 벽면을 꽉 채우는 집에 살고 있다.
그러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도저히 집을 비울 수 없게 됐다고 울적해하는 모습에 "괜찮아 다음에 또 잡으면 되지"라고 애써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아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친구와 밤새 책 이야기를 하며 대학시절의 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었는데.
혼자 파주에 가기로 했다. 출판단지에 있는 열린 도서관 '지혜의 숲'에서 책을 보고, 지지향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보낼 예정이다. 합정역에서 출발하는 파주 출판단지 직행버스는 시원스럽게 자유로를 달리더니 금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누구나 아는 유명한 출판사들이 출판단지 입구에서부터 줄지어있었다. 수많은 기업들이 모여있음에도 여의도나 강남에서 보는 꽉 막힌 빌딩 숲이 아니라 3~4층의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라 편안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걷기 좋은 길'로 인기 산책코스다. 폼이건 아니건, 책 한권 손에 쥐고 느긋하게 걷기에 참 좋은 곳이다. 영화 <뉴욕의 가을> 이 생각나는 가로수길에는 북까페와 뮤지엄들이 있다. 출판단지는 파주라는 도시 속의 새로운 세상처럼 보였다.
출판단지 거리
지혜의 숲은 가치있는 책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함께 보는 공동의 서재이다. '나무가 책이 되고 책이 지혜가 되는'이라는 낭만적인 문구로 2014년 비영리법인 출판도시문화재단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총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혜의 숲 1은 학자, 지식인, 연구소에서 기증한 도서를, 2는 출판사에서 기증한 서적을, 3은 박물관, 미술관에서 기증한 도서가 전시되어 있다.
3개의 공간은 모두 높은 벽면까지 서가가 설치되어 있고 각 서가별로 다양한 책들이 꽂혀있다. 이곳은 누구나 무료로 맘에 드는 책을 골라 볼 수 있다(물론 다 읽고 난 뒤에는 원래 자리에 갖다놔야 한다)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건 기회가 많다는 의미인 동시에 결정장애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내 시야에 닿는 책들만 보는데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무엇을 읽을까. 옛날에 중고서점에서 책 사이사이를 한참이나 파헤치고 다닐때가 떠오른다. 꼭 보고 싶었던 책을 발견하면 나와 내 친구는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했다.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은 낡은 책은 새 책과는 또 다른 향기가 있었고, 가끔씩은 그 향기가 그리워 중고서점에 갈때도 있었다.
통창뷰를 보며 책을 본다
벽면을 책으로 가득채운 지혜의 숲
오래된 책들도 보인다
지지향 내부에 있는 나인블럭 카페
독서광으로 불렸던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은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있는가"
지금 시대에는 지하철에서도 휴대폰만 들여다 보고 책을 보는 사람이 없는데 놀랍게도 1800년대 조선시대에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활자보다는 사진에, 사진보다는 동영상을 더 좋아하는 2000년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홀로 책을 보는 즐거움과, 책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하는 열의는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책들은 쏟아져나오고, 누군가는 책을 통해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서가를 몇바퀴 돈 뒤에 맘에 드는 책을 한권 발견했다.
조지 오웰의 1935년작 <버마시절>이다. 실제로 조지오웰은 1922년부터 5년간 미얀마에서 대영제국 경찰로 근무했으나 영국 제국주의가 저지르는 만행을 목격하고 직장을 그만둔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은 고스란히 <버마시절>에 담겨져있다.
몇년전 미얀마 여행을 가기 전 읽어보고 싶었는데, 오래된 책이라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는데 최근 한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나로서는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다.
조지오웰의 소설 <버마시절>
커피 두잔을 마셔도 책을 절반밖에 읽지 못했기에 대여신청을 하고 지지향 숙소로 들고 왔다.
지지향은 '종이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책과 함께 하는 특별한 휴식공간이다. 초등학교 교실처럼 나무 마루바닥이 깔려있고, 전면을 통창으로 해놓은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건 TV가 없는데, 최소한 여기 머무는 시간 만큼은 TV를 멀리하라는 의미다. 대신에 책을 볼 수 있도록 책상과 1인 소파가 있다. 나무 책상, 나무 침대와 바닥까지. 마치 종이로 가득한 방에서 머무는 느낌이다.
결국 400여페이지에 달하는 <버마시절>을 다 읽었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가 넘었다. 책 한권을 하루만에 읽은 적이 최근에 있었던가, 아니 이렇게 몇시간을 책에 파묻혀있었던 날이 있었던가 싶다. 버마 원주민들과 동등한 관계를 만드려고 했던 주인공 플로리의 자살로 소설이 끝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루종일 책을 봤다는 뿌듯한 경험때문일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풍경을 보며 책을 볼 수 있다
지지향게스트하우스. 침대 머리맡에 책이라는 글씨가 담긴 액자가 있다. (주중 8만원대)
참고로 지혜의 숲 주변에서 꼭 봐야 할 곳이 있는데 그 중 김명관 고택 별채는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전라도 정읍에서 옮겨온 김명관 고택의 별채로, 세련된 출판단지 속에서 한옥의 고풍스러움이 어우러져 멋드러진 풍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음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곳의 분위기를 궁금했을 그에게 얘기했다. 다음번에는 꼭 같이 오자고.
친구에게 이 멋진 힐링의 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
김명관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