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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론 스크랩 한자의 기원
행인2 추천 0 조회 67 15.09.01 14: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1장 한자의 기원 및 예술성

Ⅰ. 한자의 기원

1. 文字 기원의 槪況

말은 인간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방법과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말을 사용해 상호 교류하는 것은 인류가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사회 활동으로 인류의 발전과 함께 그 사용 범위와 수준은 나날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말은 의사 전달의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피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단점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이다. 말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나오면 즉시 소멸되는 특성이 있으므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함께 있어야 한다. 현대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이러한 단점을 어느 정도 개선하였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 사회가 점점 복잡 다양하게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말로서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전달하는데 부족함을 느끼게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또 다른 의사 전달의 수단을 찾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기록이었으며 결국 선을 긋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탄생할 수 있었고 이러한 행위는 마침내 인간의 의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가장 발달된 도구인 문자를 발명하게 되었다. 문자는 현재까지 인간의 의사를 기록하고 보관하며 먼 곳까지 보내거나 오랜 시간 동안 남길 수 있는 書面 언어로서 口頭 언어와 상부상조하며 발전하고 있다.

漢나라 시대의 揚雄은『揚子法言』에서 “面相之, 辭相適, 捈中心之所欲, 通諸人之嚍嚍者, 莫如言. 彌繪天下之事, 記久明遠, 著古昔之?? , 傳千里之憐憐者, 莫如書.”(서로 왕래하거나 교류할 때 마음속에서 하고자 하는 바를 모든 사람에게 통하게 하는데는 말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세상의 보편적 일들을 기록하여 오랫동안 전하고 모든 옛날의 불분명한 일을 기록하고 멀리까지 전하는데는 글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라 하여 口頭 언어와 서면 언어의 효용과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문자는 인류의 수많은 발명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며 동시에 인류의 발전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문명의 반려자이기도 하다. 書面 언어인 문자가 口頭 언어인 말을 기초로 하여 탄생하여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漢字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가운데 하나로 중국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고대 문자는 한자 이외에도 이집트 문자 수메르 문자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그 사용이 단절되어 형태가 완전히 변하거나 독음과 뜻을 전혀 알 수 없어 문자로서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자는 비록 형태는 몇 차례 변화하였지만 대부분은 문자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유일한 고대 문자이다.

한자의 기원을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사용되던 甲骨文字를 최초의 완성된 한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甲骨文字는 이미 매우 성숙된 문자이며 완전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을 갖추어 한자가 후 몇 백년의 시간 동안 진화하고 발전한 문자로 인정된다. 甲骨文字 이전에도 발전 과정에 있는 여러 문자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자료는 몇몇의 그림 문자나 부호 문자뿐이다.

한자의 기원을 추측 할 수 있는 유물과 자료는 원시 시대의 巖刻畵, 陶器 符號, 그리고 여러 문헌에 기록된 창작설 등이 있다. 원시 시대의 그림과 부호는 한자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긴 하지만 이것들을 甲骨文 이전의 초기 문자로 볼 수는 없다. 다만 한자가 완성되기 이전에 의사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자의 기원에 관한 전설과 학설은 先秦시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이 위대한 聖人에 의한 창조설이다. 한자를 창조한 인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倉頡과 伏羲氏이며 이 밖에도 朱襄, 沮誦, 佉廬, 梵 등이 있다. 한자의 창조설 가운데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학설은 八卦說, 倉詰造字說, 書契說, 結繩說 등이 있다.

2. 한자의 기원에 관한 학설

1) 八卦說

한자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무엇을 사용하여 기록하고 또 전달하여 부족을 다스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이 있으나 거의 모두 전설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수 천년 동안 중국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으며 한자를 만든 사람으로 기록된 사람은 대개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上古시대의 伏羲氏이며 그가 八卦를 만들어 백성을 다스렸다고 한다.

東漢시대 許愼은『說文解字·敍』에서 “古者庖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視禽獸之文, 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易』八卦, 以垂憲象.”(옛날 庖犧(伏犧)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하늘의 형상을 관찰하고 땅의 이치를 굽어보아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위의 사물을 살피어 가까이 에서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서는 사물에서 취하여 처음으로『易』의 八卦를 그려서 만물의 표준으로 삼았다.)이라 하여 伏羲氏가 처음으로 八卦를 만들어 세상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許愼이 말한 伏犧씨가 八卦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세상을 다스렸다는 내용은『易‧系辭』에도 실려 있는 문장이다. 許愼이 비록 八卦가 세상을 다스리는 수단이 되었다고는 하였으나 八卦가 곧 문자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다만 結繩과 함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며 문자가 탄생하기 이전의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부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許愼 자신도『說文解字․敍』에서 “及神農氏結繩爲治而統其事, 庶業其繁, 飾僞萌生. 黃帝之史倉詰, 見鳥獸蹄迒之迹, 知分理之可相別導也, 初造書契.” (神農氏에 이르러서는 結繩으로 다스리고 모든 일을 통괄하였는데 일이 많아지고 복잡하여 틀린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黃帝의 史官인 倉詰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이치가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되어 처음으로 書契를 만들었다.)라 하여 八卦와 結繩이 모두 한자가 아니라 한자 이전의 의사 전달의 보조 역할을 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八卦가 정확하게 무엇이며 어떻게 사용하여 의사를 전달하고 세상을 통치하였는지 기록하지는 않았다.

魏晉시대의 기록에서도 팔괘를 문자로 보지 않고 그저 結繩의 의사 전달 방법을 대신한 부호로 보고 있다. 孔潁達은『尙書․序』의 注疏에서 “古者伏犧氏之王天下也, 始畵八卦, 造書契, 以代結繩之政.”(옛날 伏羲氏가 나라를 다스릴 때 처음으로 八卦를 그리고 書契를 만들어 結繩의 통치 방법을 대신하였다.)라 하여 八卦와 書契는 結繩을 대신해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八卦가 문자라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八卦를 한자로 인정한 사람은 宋나라 시대 鄭樵이다. 그는『通志·六書略』에서 “文字便從(縱)不便衡(橫), 坎, 離, 坤, 衡卦也, 以之爲字則必從. 故☵必從而後成水, ☲必從而後成火, ☷必從而後成災.(八卦는 가로로 쓸 때가 아니라 세로일 쓸 때 문자가 된다. 坎, 離, 坤괘는 가로 卦인데 문자가 되려면 반드시 세로로 써야 한다. 따라서 ☵卦는 반드시 세로가 된 후에 ‘水’자가 되고, ☲괘는 세로가 되면 ‘火’자가 되고, ☷괘는 세로가 되면 ‘災’자가 된다.)라 하여 八卦가 곧 한자의 기원이며 그 자체가 한자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八卦가 문자의 직접적 기원이라 설명하는 좋은 자료이고 또 풍부한 상상을 펼친 재미있는 내용이긴 하다. 그러나 鄭樵의 주장은 八卦에다 비슷한 한자 몇 가지를 끼워 맞추는 정도일 뿐 八卦가 한자라 주장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자가 八卦로부터 탄생하였다는 八卦說은 고대 중국인들의 전설일 뿐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八卦는 고대 사람들이 점을 칠 때에 사용하던 卦爻의 부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사람들이 자연계 사물의 대상을 상정할 때 八卦를 사용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연과의 대화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학설이다. 八卦가 상징하는 天, 地, 風, 火, 山, 水, 雷, 澤 등은 자연 상태의 물상을 卦爻의 수단으로 표현한 것일 뿐 한자의 기원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문제이다.

2) 倉詰說

중국에서 한자를 창조한 인물로 가장 많은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은 倉頡이다.『呂氏春秋』 등 古書의 의하면 倉頡은 黃帝시대의 史官으로 기록되어 있다. 黃帝시대는 비록 완전하게 고증되지는 않았으나 서기전 2660년경으로 倉頡은 지금으로부터 약 4600년 이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倉頡이 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당시에 역사를 기록하는 인물로 한자를 창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자를 정리하고 분류하여 사용하기에 편리하게 하였을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많은 문헌에서 한자의 발전에 공이 많은 倉頡을 한자를 창조한 인물로 숭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倉頡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문헌은『荀子‧解蔽篇』으로 “好事者衆矣, 而倉頡獨傳者一也.”(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倉頡 혼자만이 전하고 있다.)라 하여 倉頡이 한자를 전한 유일한 인물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倉頡造字說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呂氏春秋‧君守篇』,『韓非子, 五蠹篇』,『倉頡篇』,『說文解字』,『淮南子』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許愼의『說文解字‧敍』로서 “倉頡之初作書,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象益, 卽謂之字.” (倉詰이 처음 문자를 만들 때 물상의 형체에 의거했는데 이것을 文이라 하고 그 후에 형체와 소리를 더하였는데 이것을 字라 한다.)라 하여 倉詰이 文과 字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倉頡을 黃帝의 史官으로 설명하여『呂氏春秋』, 司馬遷의『史記』, 班固의『漢書』 등의 문헌과 일치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許愼이 말하는 文은 獨體字로서 日, 月, 木, 人 등의 글자며 字는 合體字로서 明, 休, 江, 등의 글자로 倉頡이 獨體字뿐 아니라 合體字까지도 창조하였다고 설명하였다.

『韓非子‧五蠹篇』에 “古者倉頡之作書也.”(옛날 사람인 倉頡이 한자를 만들었다.),『呂氏春秋‧君守篇』에 “奚仲作車, 倉頡作書.”(奚仲이 車를 만들었고 倉頡이 한자를 만들었다.), 李斯의『倉頡篇』에 “倉頡作書, 以敎後詣.”(倉頡이 한자를 만들어 후학을 교육하였다.),『淮南子』에 “昔者倉頡作書.”(倉頡이 한자를 만들었다.)라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倉頡을 한자를 만든 영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는 倉頡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학설에 동의하는 학자는 없으며 다만 倉頡이 당시에 문자를 다루는 관직에 있으면서 한자의 발전에 많은 공로를 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자의 개인 창조설은 八卦說, 倉詰說이외에도 朱襄說, 沮誦과 倉頡說, 梵과 佉廬說 등 많이 있다. 이러한 한자의 개인 창조설은 고대 중국 사회의 인물의 영웅화와 신격화의 상징으로 현대 사회에서는 그저 전설로 남을 뿐이다. 한자의 탄생과 서체의 변천은 한 개인의 힘과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월의 흐름과 문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결과였다.

3) 結繩과 書契說

結繩은 새끼나 초목의 덩굴 등을 사용하여 매듭을 맺거나 걸어놓아 의사를 전달하거나 기억을 돕는 방법이다.『周易‧繫辭下』에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 易之而書契.”(上古시대에는 結繩의 방법으로 통치하였으며 후세에 성인이 結繩을 書契로 바꾸었다.)라 하여 고대에는 結繩으로 의사를 전달하였으며 이보다 진보된 의사 전달 방법인 書契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結繩이 사용된 시대를 정확하게 기록한 문헌은 없고 다만『莊子』 등에 중국의 전설 시대인 伏羲氏, 神農氏 등이 통치하던 때에 結繩을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結繩은 甲骨文이 사용된 商나라 시대 이전인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일 것으로 추정한다.『說文解字‧敍』에도 “及神農氏, 結繩爲治, 而統其事.”(신농씨에 이르러 結繩으로서 통치의 수단으로 삼아 일을 통일하였다.)라 기록하여 結繩이 신농씨 시대에는 매우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고 설명하였다.

結繩을 사용하여 의사를 전달하였다는 기록은 많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하였으며 어떤 뜻이 있는지에 관해 기록한 고대의 문헌은 매우 적고 唐나라 시대 이후의 문헌에 몇몇 보일 뿐이다. 孔潁達은 漢나라 시대의 鄭玄의 기록을 인용하여 “事大, 大結其繩; 事小, 所結其繩.”(일이 크면 매듭을 크게 하였고 일이 작으며 매듭을 작게 하였다.)이라 하여 結繩의 사용 방법에 관해 기록하고 있으나 내용이 매우 빈약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수준이다. 또한 唐나라 시대의 李鼎祚도『周易集解』에서 孔潁達과 비슷한 주장을 하고 덧붙여 사물의 많고 적음을 서로 대조하는 수단으로 結繩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고대 사람들이 의사를 전달하거나 약속을 하고 또 그것을 확인할 때 結繩의 방법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따라서 結繩을 문자의 직접적 기원으로 보기는 어렵고 다만 한자가 탄생하기 이전에 기억을 돕는 수단으로 한자를 탄생하게 하는 필요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結繩보다 좀더 진화된 의사 전달의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 書契이다.『周易‧繫辭下』에 “上古結繩而治, 後世聖人, 易之而書契.”(上古 시대에는 結繩의 방법으로 통치하였으며 후세에 성인이 結繩을 書契로 바꾸었다.)라 하여 書契가 結繩보다 진화된 의사 전달의 방법으로 설명하였다.『尙書‧序』와『史記‧三皇本紀』에서도 “造書契而代結繩之政.”(書契를 만들어 結繩을 대신하여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이라 하여 結繩이 사용된 伏羲氏 이후에 탄생한 의사 전달 수단이었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나『周易』과『尙書』 등에서 설명한 書契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개념이고 어떤 형태이었으며 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전하는 기록은 없다. 다만 書契가 문자가 탄생한 이전의 의사 전달의 수단이었다면 새길 수 있는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여 눈금이나 기호를 표시하는 방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漢나라 시대 이후에는 書契의 개념이 문자 즉 한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許愼은『說文解字‧敍』에서 “黃帝之史倉詰, 見鳥獸蹄迒之迹, 知分理之可相別導也, 初造書契.”(黃帝의 史官인 倉詰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이치가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되어 처음으로 書契를 만들었다.)라 하여 書契를 문자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또『說文解字』의 본문에서 “書, 箸也.”(書는 기록하는 것이다)라 하였고 “契, 大約也.”(契는 굳게 약속하는 뜻이다.)라 하였으며 敍에서 “箸於竹帛謂之書.”(竹帛에 기록하여 나타내는 것을 書라 한다.)라 하여 ‘書’자와 ‘契’자를 글씨와 契約證書로 풀이하여 書契를 竹帛에 글씨가 쓰여진 문서로 설명하였다. 많은 학자들은 許愼이 설명한 계약하다 는 뜻의 ‘契’자를 새기다 는 뜻이 있는 ‘栔’자의 假借字로 설명하기도 한다. ‘契’자를 계약의 뜻으로 보거나 새기다 는 뜻으로 보거나 許愼이 설명한 書契의 뜻은 한자로 변하지 않는다. 唐나라 시대의 孔潁達도『尙書正義』에서 “書之於木, 刻其側爲契, 各持其一, 後以相考合.”(木牘에 글씨를 쓰고 그 측면에 契約을 새겨서 각자가 하나씩 나누어 후에 서로 대조하는 증거로 삼았다.)이라 하여 書契를 문자의 뜻으로 설명하였다.

先秦시대의 古書인『周易』이나『尙書』에서는 書契를 한자가 탄생하기 이전에 사용되던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문자의 기원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許愼은 이미 한자가 탄생하여 완전하게 성숙한 뒤의 서체인 小篆을 근거로 ‘書’자와 ‘契’자를 풀이하였고 또 書契를 한자라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 개념에서부터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문헌들에서 비록 書契의 개념은 서로 다르게 이해하였으나 최소한 書契가 문자와 같이 기록으로 나타내어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붓이 발명되기 이전에 한자를 기록한 도구는 칼과 같은 도구이며 나무나 뼈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글씨를 새겼다. 上古시대의 書契가 비록 완전한 문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부호와 같은 것을 칼로 새기는 방법은 후대 한자의 기록에서 취한 방법으로 書契가 문자의 탄생에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3. 원시 부호와 한자의 기원

역사 학자들은 서기전 5000년부터 서기전 3000년까지의 중국의 문화를 仰韶 문화라 부른다. 仰韶 문화의 명칭은 1921년 河南省의 澠池縣 仰韶村에서 신석기시대의 적색 토기가 발견되면서 비롯되었다. 이와 비슷한 유물이 黃河유역 특히 陝西省 西安의 半破村과 臨潼 姜寨에서도 대량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仰韶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仰韶文化의 대표적인 유물은 토기이며 그 속에 書契의 흔적으로 추측되는 많은 양의 부호가 새겨져 있다. 토기와 도기는 인류가 역사 이래로 가장 먼저 발명한 생활 용구의 하나로서 그 자체에 벌써 심미적 의식을 담고 있다. 仰韶에서 발견된 陶器들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형상의 부호들이 새겨져 있거나 그려져 있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의 얼굴, 나뭇잎, 각종 고기와 동물의 모양 등이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甲骨文의 筆劃과 비슷한 단순한 부호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그림과 부호 같은 것들이 무슨 내용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종교적 의미를 지닌 주술적 내용이거나 어떠한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仰韶 문화의 토기에 새겨져 있는 여러 가지 부호는 甲骨文字가 사용된 시대보다 약 2600년 이상 빠른 것으로 고증되고 있으며 한자가 탄생할 수 있는 기본적 토양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50년대 鄭州에서 商나라 시대의 유적지를 발굴하던 도중 발견된 二里崗과 二里頭에서도 서기전 1750년경에서 서기전 1350년경으로 추정되는 토기 부호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二里岡 문화와 二里頭 문화라 부른다. 이 가운데 二里頭 문화의 토기 가운데 甲骨文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숫자와 비슷한 글자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安陽의 小屯村에서 발견된 殷商 문화인 甲骨文보다 약 300년 빠른 것으로 비록 부호들에서 서로 통일된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워 완전한 문자로 보기는 어려우나 한자가 탄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仰韶 문화나 二里頭 문화의 토기 부호보다 훨씬 발전한 토기 부호가 山東省 泰安의 大汶口에서 발견되었다. 大汶口 문화는 殷商 문화보다 약 300년 이상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곳의 토기 부호는 이미 상당히 성숙된 문자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甲骨文과 金文에 있는 한자와 매우 비슷한 刻符가 18개나 있어 한자의 기원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림에서와 같이 大汶口 문화의 토기 부호와 古文字를 비교해 보면 이 시대의 刻符는 이미 부호로서가 아니라 초기의 문자 형태로 진입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 부호들이 古文字와 매우 닮았지만 문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부호로서의 상징성이 높기 때문에 완전한 문자로 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陶器에 한 개 혹은 두 개의 부호가 새겨져 있고 서로 연관성이 적으며 한자가 갖추고 있는 통일된 형태와 음 그리고 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호들이 비록 완전히 성숙된 한자는 아닐지라도 이미 문자와 비슷한 大汶口 陶尊 부호 의미 전달의 도구였음은 분명하며 이러한 부호들이 의미 전달의 기본 단계에서 출발하여 성숙된 한자로 발전해 갔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仰韶 문화와 大汶口 문화 등의 토기 유물들은 이미 토기의 제작 기술이 상당히 발전하여 모양이 정교할 뿐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예술성을 갖추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토기를 만들 때 이미 균형과 대칭 그리고 변화의 조형미를 깨닫고 또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부호 같은 筆劃은 甲骨文과 비슷한 외형적 특징을 갖추고 있으며 甲骨文 서예의 심미적 범주와 같은 미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간단한 선이나 그림으로 원시 토기의 예술 형식을 창조하여 토기를 실용의 생활 용구로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술 표현의 대상으로 이용하였다. 서예의 중요한 예술적 표현 형식의 하나인 단순한 선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색채의 아름다움과 구별되는 또 다른 심미적 특징이 있다. 仰韶와 大汶口 문화의 토기 부호들이 독립적 형태로 존재하여 비록 규율과 질서, 운율과 움직임은 느낄 수 없지만 筆劃의 강건함과 질박함 그리고 구성의 자유로움과 균형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토기 부호의 선과 그 선들의 구성미는 후대에 탄생하는 한자가 書法 예술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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