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의 추억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6-12-30 15:50:24
하얗게 식은 연탄 몇 장이 나뒹굴고 있는 단독주택 앞 골목은 늘 을씨년스럽다. 심심하면 치솟는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해 기름보일러를 뜯어내고 연탄보일러를 쓰는 집이 늘어난 탓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어렵고 힘겨운 시절에는 연탄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한 장에 300원하는 저렴한 가격을 따져보더라도 족히 잡아 30만원이면 겨울 한철을 따스하게 날수 있기 때문이다. 저렴한 돈을 들이고도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는 연탄은 아득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인기 품목이 되었다. 시간 맞춰 연탄을 가는 것도 귀찮고 다 식어버린 연탄을 내다 버리는 것도 귀찮지만 하루 종일 방안을 따스하게 해주는 그 열기 때문에 아직도 연탄은 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 한겨울이면 단독주택의 보일러에서 파란 불꽃을 너울거리며 타오르는 연탄, 자신이 품고 있는 열기를 남에게 몽땅 내주면서도 차갑게 식어가는 연탄을 보고 있으면 너울거리는 불꽃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가는 것은 웬일일까.
▲ 내 기억속 저 편의 아버진 언제나 가족에게 따스함을 주신 분이었다. ⓒ 유스테판
기억조차 아스라한 중학교 시절이었을 게다. 밭고랑마다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리고 길가를 따라 고추가 바삭바삭 말라가는 늦여름이면 아버진 언제나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잠에 곯아떨어져 코를 심하게 골다가도 꼭두새벽이면 아버지는 말없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셨다. 몇 날 며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셨다. 옷을 갈아 입는 소리에 난 눈을 떴지만 곧 잠에 곯아떨어져 한동안 아버지가 왜 밖으로 출타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뒷간을 다녀오다 부엌 쪽에서 떨거덕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부엌 옆에 딸린 창고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창고 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난 조심조심 창고 속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였다. 말라가는 고추냄새와 함께 후끈 뿜어져 나오는 열기 속에서 아버지가 화덕 뚜껑을 열고 연탄을 갈고 계셨다. 탄탄한 지지대에 층층히 올려놓은 채반위에는 바삭바삭 말라가는 붉은 고추가 널려 있었고 그 아래 화덕 하나가 열기를 뿜으며 고추를 말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 곳이 바로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고추건조실이었던 셈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가 고추를 말릴 때 햇볕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햇볕이 짱짱한 한낮에는 집 앞 길가나 골목에 고추를 늘어 말리다가도 저녁이면 덜 마른 고추들을 어김없이 창고로 옮겨와 연탄불을 피웠다. 이런 일이 번거롭고 귀찮기도 했지만 아버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꼭두새벽 창고 속을 들락거리며 연탄을 갈았다. 그런 까닭에 고추는 검고 붉은 빛을 띠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고추속에는 날아갈듯 즐거워하는 누런 고추 씨앗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햇볕에 말린 고추보다 햇볕과 연탄의 열기를 함께 이용해 말린 고추가 더욱 더 때깔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연탄을 이용해 고추를 말렸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렴한 연탄 한 장이 주는 고마움은 너무나 컸다. 고추를 말려 시장에 내다 팔아 자식들을 먹여 살렸고 학교 월사금도 내 주었고 다소나마 집안에 따스한 행복을 가져 준 것은 다름 아닌 연탄 덕이었다. 잠이 덜 깨 부석부석한 얼굴을 하면서도 집안의 행복을 위해 군말 없이 연탄구멍을 맞추었던 아버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하얗게 식은 채 골목에서 뒹굴고 있는 연탄을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뚜렷이 떠올랐다. 제 몸의 열기를 몽땅 남에게 바치고도 골목 한쪽에 으깨어진채 뒹굴고 있는 연탄이 더욱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도현 시인의 시 “연탄 한 장”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아 움직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나 아닌 그 누구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나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어 준 적이 있는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다른 사람의 가슴을 녹여 준 적이 있는가. 안 그래도 불우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이다. 그들에게 자주 물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지라도 활활 타오르는 연탄 불꽃 같은 따스한 마음을 전해준다면 싸늘하게 식어가는 이 세상도 머지않아 따스함이 깃들거라고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