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신문 > 제 746호 객원컬럼. 구관이 명관인가?. 전7:10, 사43:18-19, 빌3:13-14, 히10:38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전7:10).
즉 “구관이 명관이다. 지금보다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즉 과거는 현실적 삶에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냥 과거일 뿐이다. 민수기 11장 5~18절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만 먹는 것에 불평을 한다.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고, 더 재미있었다.” 하나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메추라기를 보내 고기를 배불리 먹게는 하셨지만, 큰 재앙으로 쳐서 수없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다.
우리나라도 50여 년 전 정권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답답한 생각이 든다. 사실 그 시절은 별 자유도 없는데다 국력은 최하위 권이었고, 먹을 것도 변변치 않았으며, 게다가 화장실 휴지, 생리대, 비닐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 뱃속에는 회충이 우글거리고, 이가 온몸에 득실거리며, 옷이나 신발이나 병원이나 어느 것 하나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몇 번 목욕으로 족하던 그 시절로 과연 돌아가고 싶을까? 그때가 정말 더 좋았을까? 아니면 현실을 푸념하는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전의 목사님이, 전도사님이, 조장님이, 부장님이, 사장님이 더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 지금 내가 만난 사람과 새롭게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나 지금 환경이 조금 서툴거나 미숙하더라도 현실을 붙잡아야 한다.
과거에 붙잡혀서 정말 소중한 오늘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신혼 때가 더 좋았다’던가, ‘우리교회 초창기 때가 더 좋았다’ 하지 말라. 지금이 더 좋은 때다. 과거는 추억일 뿐이다. 과거는 추억으로, 경험으로 족하다.
과거 지향적으로 살면 안 된다. 발전이 없고 퇴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지향적으로 살아야 한다. 지나간 시절은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 내일만이 내게 다가올 뿐이고, 기회를 준다. 눈을 들고 앞을 보라.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을 붙잡아라. 그 사람만이 사막 같은 삶에 강을, 광야 같은 삶에 길을 낼 수 있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게 된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8~19).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과거의 사슬에 매어 있지 말고, 어떤 일이든지 끊어내야 한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 그때가 더 좋았던 것이 아니고, 지금이 더 좋다. 구관이 명관이 아니라 신관이 명관이다.
이시대 목사
♣ 이초석: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지 말고 생각지 말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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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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