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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4)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
왕하 4:17-28
I. 서론
최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종교서적 중 하나는 유은정이라는 정신과 전문의가 쓴 책 “상처받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기”입니다. 이 책에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스마트폰과 관련해서 미래에 호황을 누릴 병원을 3가지 꼽았습니다. 첫째는 안과입니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안구 건조증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안과를 첫 번째로 호황을 누릴 병원으로 꼽았습니다. 둘째는 정형외과입니다. 스마트폰을 오래 사용하면서, 어깨, 목, 손목 심지어는 손가락까지 이상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정신과입니다. 스마트폰의 과다사용으로 불면증, 강박, 쇼핑중독, 인터넷중독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녀를 둔 부모들의 고민도 스마트폰 사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집 아이들이 대부분 아이패드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아이패드나 스마트폰을 사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패드나 스마트폰이 아이들 손에 들어간 이후로는 아이들이 시청 시간을 잘 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보통 시간을 정해줘서 아이들이 절제하도록 하지만, 인터넷에 푹 빠진 아이들이 그 말에 순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때, 최악의 경우는 준 것을 다시 빼앗는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심각해 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한 여인에게 아들이 주셨는데, 다시 그 아들의 생명을 빼앗아간 것 같은 사건이 나옵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엘리사가 수넴 지역을 지나갈 때마다 수넴에 거주하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해 줬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고 난 이후, 수넴 여인은 남편에게 말해서, 자신의 집에 작은 방을 하나 마련해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엘리사가 이렇게 대접을 받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여인을 불러서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이 아무런 부탁도 하지 않자, 이를 옆에서 지켜본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말합니다. “이 여인에게 아직 아들이 없고, 그 여인의 남편은 나이가 많습니다.” 즉, 이 여인의 가정에 필요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과연 한 해가 지난 후, 이 수넴 여인의 가정에 아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너무나 아름답고도 훈훈한 이야기로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 엘리사를 잘 섬겼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이 여인에게 가장 귀한 선물인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18~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8~20절, “그 아이가 자라매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가서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렀더니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사환에게 말하여 그의 어머니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이 수넴 여인의 아들이 갑자기 숨을 거두고만 것입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탁도 하지 않은 이 수넴 여인에게 아들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요? 아들이 가장 사랑스러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으로부터 이 아들을 빼앗아가고만 것입니다. 마치 선물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간 심술 고약한 마녀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신 일이 있으신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놀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은 없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1. 첫째,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일을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 해답을 속시원하게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이성으로 합당한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을 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BC 4세기에 에피쿠로스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살았습니다. 이 철학자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이 세상에 있는 악과 고통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을 멈추기 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아직도 악과 고통이 만연한 이유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 철학자는 나름대로 이성적인 사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과 선하신 속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 만연한 악과 고통의 문제를 풀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에피쿠로스의 이런 사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생각이 옳을까요? 만약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의 문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와 신약의 바울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틀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스 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에 목회하시는 제임스 그리어(James Greear)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이 최근에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기독교 철학자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누군가가 텐트 안에 낙타가 있느냐고 물으면, 텐트 안을 보기만 하면 금방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텐트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안을 살짝 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아무 것도 없다고 쉽게 판단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볼 수 없다고, 작은 벌레가 없다고 말할 수 없듯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 수넴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의 죽음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비판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수넴 여인이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21~22절,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사환 한 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하니”
27절,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선지자 엘리사를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발을 붙잡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그의 발을 안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왜 우리에게 하락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두 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2. 둘째, 하나님을 직접 경험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리서 몇 권을 읽거나 신앙 서적 몇 권을 읽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경험해야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오늘 수넴 여인의 이야기와 가장 유사한 이야기는 나사로의 죽음일 것입니다.
1) 두 이야기 모두, 주인공이 하나님의 사람을 섬긴 사람들입니다. 수넴 여인은 선지자 엘리사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2) 두 이야기 모두, 남자가 죽고, 여자들이 슬픔을 당했습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죽었습니다.
3) 두 이야기 모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두 이야기의 유사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유사한 점은 모두 자신들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의도적으로 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째 되는 날에 비로소 베다니에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르아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정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고,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마르다와 마리아의 첫 마디에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당시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료하실 수 있는 사람 정도로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빠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셨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좋은 의사, 탁월한 의사 정도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신앙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직접 깨달아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 나사로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후,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도 생기 있는 사람으로 살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즉, 부활 신앙을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수넴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내년 이 맘 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수넴 여인이 어떤 말을 했습니까?
28절,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여러 번 섬겼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이 있은 후 아들을 낳고 기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면 여러 해 동안 낳지 못한 우리 부부를 통해서도 아들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의 신앙에서 만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결국 자신의 아들의 탄생, 죽음, 부활을 통하여 새롭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도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죽은 생명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부활 신앙을 믿게 된 것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태피스트리(tapestry) 짜기와 비슷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태피스트리는 다양한 색깔의 실로 그림을 짜 넣는 작품을 말합니다. 한 올 한 올 손으로 직접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미술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것입니다. 태피스트리의 위쪽을 보면, 아름답고 정교한 예술품입니다. 하지만 모서리를 들어 올려 뒷면을 보면, 실이 불규칙적이고 혼란스럽게 엉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우리의 삶이 태피스트리의 뒷면과 같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우리는 태피스트리의 뒷면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삶이 엉망이고, 무질서하다고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하여 태피스트리의 앞면을 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태피스트리의 면을 뒤집어 주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이 이 세상일 수도 있고, 저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날이 언제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령의 빛을 우리 마음 가운데 비추어 주셔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밝히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