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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385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위치한 신라 연간을 기원으로 하는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1995년 12월에 토함산 중턱의 암자 석굴암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불국정토를 속세에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통일신라의 꿈을 드러내는 건축물로, 이름인 불국사는 불국정토에서 유래한 호국 사찰이다. 석굴암도 마찬가지다. 황룡사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절이라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절이다. 불국사는 전성기인 신라~고려시대에는 지금의 8배에 달하는 규모의 대사찰이었으며 세월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규모가 줄어들었다. 오늘날의 불국사는 조선 영조 때 복원된 불국사에 기인한다.
대표적인 한국 건축물 중 하나로 경주시로 소풍 내지 수학여행을 간다면 꼭 들르는 곳이다. 인근 경상도 출신은 수학여행으로 불국사를 가지는 않지만 유치원부터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소풍 단골 장소라 경상도 사람들은 웬만하면 대부분 한 번은 불국사를 가 보게 된다.
입장료는 2023년 5월 4일에 무료가 되었다.
2. 역사
정확한 건축 연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일단 《불국사고금창기》라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15년(528년)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연제부인)이 새 사찰을 짓기를 소원하여 불국사를 처음 지었다. 이후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부인이 크게 개창했는데, 이때 아미타여래상과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봉안했다. 문무왕 10년(670년)에는 무설전을 건설해 화엄경을 강의했고, 경덕왕 10년(751년)에 그 유명한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면서 청운교, 백운교, 석가탑, 다보탑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다. 출판사 지학사에서 만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표에도 751년이 불국사와 석굴암이 중창되기 시작한 해라고 서술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앞부분이 빠지고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나온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석불사(석굴암)을 만들었고 현생의 부모를 모시기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것. 이 일화가 유명해서 김대성이 지은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의 기록이 더 정확할 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불국사 자체가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기에 김대성 혼자서 그런 엄청난 건설을 했다기보다는 법흥왕 때부터 신라 국가차원에서 개증축을 해오다가 훗날의 모습의 바탕이 되는 결정적인 중수를 김대성이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아무래도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 더 세세하기도 하고, 삼국유사가 설화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삼국사기엔 김대성이라는 이름은 없고 경덕왕 시절 중시를 지낸 김대정(金大正)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기백 교수를 비롯한 여러 역사학자들은 정황상 동일인물로 추정한다.
어쨌든 중수와 관련한 유명한 설화로 삼국유사에도 실린 김대성 설화가 유명하다. 김대성이 재상급인 중시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고위귀족이 심혈을 기울여 중수하면서 규모가 상당히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성이 중수한 연대는 751년에서 765년 사이로 추정된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 중수하였고 여러 부분에서 통일신라의 정형화된 양식이 보이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꼽는다. 이때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경주 불국사 다보탑 등이 세워졌으며 2탑 1금당의 가람 (절의 배치된 모양) 형식이 완성되었다.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의 불국사는 건물만 80종·2천여 칸으로, 오늘날 불국사의 8배 규모의 대사찰이었다.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말 기록인 동경유록, 간재집에 의하면 여전히 신라 때의 석탑, 불상, 그림들이 남아 있었고 천 칸의 큰 규모였다고 한다. 동경유록에서는 신라왕이 백성의 힘을 이런 쓸모없는 곳에 쏟아부었으니 애석하다고 기록하였다. 숭유억불에 따라 불교를 천시하던 조선시대 유학자의 기록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왜란 전 불국사의 규모가 상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면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한 번 크게 불타 사라졌다. 지금도 대웅전의 장대석 등을 살펴보면 화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불국사 가이드 투어의 설명에 따르면 해당 방화는 처음부터 절을 파괴할 목적으로 방화한 것이 아니라, 당시 경주 일대를 점령한 일본군 병사들이 굉장한 절이 있다고 구경 왔다가 의병이나 승병을 무장시키기 위해 절에 보관 중이던 무기를 잔뜩 발견하고 "아름다운 꽃일수록 맹독을 감추고 있다" 라는 이유로 본대에 연락해서 공격한 것이라고 한다. 얄궂게도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 신자였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는 정확하게는 가마쿠라 시대에 승려 니치렌이 창시한 법화경만을 유일무이한 경전으로 떠받들고 다른 경전은 모두 무시하고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련정종의 신자였다. 일련종은 법화경을 제외한 다른 경전을 사용하는 일본의 기성 불교 종단을 모조리 배척하는 극단적인 곳이었다. 자국 불교에 대해서도 이 모양인데 법화경 외의 다른 경전도 인정하던 한국 불교에도 자비가 없었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워낙 조선 승병들에게 피해를 많이 받았던지라 이미 승병에 학을 뗀 상태였는데 승병을 무장시킬 무기도 발견됐겠다, 그런 명분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조선 영조 26년(1750년)에 불국사 극락전이 다시 세워지고 41년(1765년)에 불국사 대웅전이 다시 세워졌다. 1779년 경주 지방 유림이 지원하여 중창하는 등 (기사 링크) 재건하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국 조선 말기를 거치면서 사실상 폐허가 되었으며, 당시 다 쓰러져가는 불국사를 조선 말기에 촬영한 사진이 남아 있다. 사실 국교가 유교였고 유학자들이 불교라면 덮어놓고 혐오하던 조선시대에는 멀쩡한 절도 트집을 잡아서 부수고 승려들은 부역에 끌고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드리지 않은 절은 왕실 원찰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왕이 불교에 너무 열중한다 싶으면 득달같이 신하들의 상소가 쏟아졌던 때이다. 그런 시대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일개 지방의 사찰을 복원하자고 했으면 욕을 바가지로 먹었을 테니, 사실상 터만 남았음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대웅전과 다보탑을 보수하였다. 사진에서 볼수 있다시피 완전히 폐허가 된 불국사를 일본이 복원하였다. 그러나 다보탑의 석물과 사리함 등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그동안에도 여러 건물이 소실되었다. 원래 일제는 불국사 유적을 축소하여 건성으로 복원하려고 하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계획을 수정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복원계획 수정. 비로전 앞에 석등 모양으로 된 사리탑(舍利塔: 보물 61호)은 한때 일본인이 빼돌렸으나 1934년 반환되어 제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가 임시로 복원한 상태로 있다가 결국 광복 후 1970년대에 와서야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그 당시 돈으로 약 8억 원이 투입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하며, 석축과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이나 대웅전은 조선시대의 건물이며, 구품연지가 재건 당시엔 관광객들의 동선을 막는단 이유로 메워버렸고, 복원된 목조 건물도 고려 중기에서 조선시대의 양식을 뒤섞어서 재현한 것이기에 창건 당시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3. 특징
불국사의 평면 구성에 수학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의 요네다 미요시였다. 요네다의 안은 현대에 와서는 실측이 부족하였다는 점 등으로 인해 많이 까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불국사가 석굴암과 같이 수학적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데에 주목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다만 이는 서구 건축물들이 즐겨 사용한 방법이므로, 동양 건축물에 이를 적용하는 것은 너무 서구 중심적인 사고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아무튼 불국사는 평면 배치뿐만이 아니라 형태적, 시각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석탑들의 관계인데, 석가탑은 완벽한 비례와 기하학적인 직선미를 선보이고 있으며, 바로 옆에 있는 화려한 다보탑은 층 구조를 버린 자유롭고도 독특한 형식이어서 석가탑과 짝을 지으면 대칭되면서도 강렬한 대비를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대비되는 구성은 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당에서 바라본다면 화려한 다보탑 뒤의 단순한 경루와 단아한 석가탑 뒤의 화려한 종루(수미범종각)를 통해 반복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경루와 화려한 종루는 제대로 복원되지 않아서 아쉬운 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정확한 양식을 알기 어려움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와 조선시대의 불국사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불국사에는 좌경루와 우경루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복원된 형태는 다보탑 쪽이 좌경루, 석가탑 쪽에 범영루가 있고 이것이 우경루가 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의 종루(수미범종각)와 우경루가 사실 다른 건물이며, 서쪽의 극락전 쪽에 우경루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범영루는 1612년, 1688년에 중건하고 1708년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973년의 복원 공사 때 다시 중건되었다.
청운교와 백운교 또한 선의 미려함을 느낄 수 있으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청운교와 백운교 바로 밑에는 구품연지라는 큰 연못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 복원 공사 책임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관광객의 동선을 방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복원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근처에는 당시의 기하학을 총동원해 석굴을 지었고, 무뚝뚝하고 근엄한 느낌의 부처 조각상을 품은 석굴암도 존재한다.
불국사에서 매년 열리는 '신라불교문화영산대제'에서 법흥왕, 이차돈, 표훈대덕, 원효, 김대성, 월산과 함께 박정희 영정이 걸려 있는데, 논란이 있지만 불국사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경주국립공원 토함산지구에 있다. 그래서 사찰 내부에서 토함산으로 올라 갈 수 있는 등산로가 있다.
불국사 밑에는 큰 규모의 여관 및 유스호스텔들이 위치해 있다. 수학여행 등 단체 여행객들은 보통 이곳 아니면 보문관광단지의 콘도 등에 숙소를 마련하는 편이다.
석가탑에서는 1966년 도굴범이 훼손한 부분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세계 최초(最初)의 목판 인쇄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오히려 좋아 도굴범들은 석가탑의 사리구를 도굴하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했고, 수리하다가 다른 층에서 발견되었다. 참고로 이 도굴범들은 검거되었으며 황룡사지를 털었던 도굴범들이란 점이 수사 중에 밝혀졌다.
이 수리 과정에서 전문가도 아닌 인부들이 나무 전봇대를 기중기 삼아 엉성하게 복원하다가 전봇대가 부러지는 바람에 석가탑의 일부를 깨먹었다. 그 당시 한국의 엉성한 문화재 관리 의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상당한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 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도 자세하게 나온다.
196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있다. 수많은 여학생이 저런 교복을 입던 시절이니 정황상 8.15 광복 이후일 테고 1970년대에는 불국사가 복원되어 회랑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 원권 지폐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지금의 세종대왕이 아닌 불국사가 석굴암과 함께 인쇄되어 나올 예정이었고 사진 속의 시제품에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뜻하는 사인까지 적혔다. 하지만 기독교계는 특정 종교 편향이라고 반대했고 불교계조차도 세속의 상징인 돈에 부처님을 새긴다고 반발이 있어서 세종대왕 도안으로 변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을 보면 지금과는 다른데, 이때는 아직 복원 공사를 하기 전이었다.
극락전 앞에 가면 하도 사람들이 만져서 반질거리는 돼지 동상이 있는데 극락전 글자가 한자로 써 있는 편액 뒤에 있는 돼지가 원본이다. 무한도전에서 돼지 찾기 미션이 나온 뒤 유명해졌다. 2007년 정해년 황금돼지해를 맞아 동상을 만들었고 중국인 단체 관광객 등이 불국사를 찾을 때 이 돼지를 소개해 준다.
불국사 대웅전은 2011년 해체되어 2014년 복원되었다.
2013년 5월 17일 부처님오신날 새벽에 불국사 경내 성보박물관 뒤편에 위치한 연리목 중 느티나무의 뿌리 밑둥이 잘려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누가 이렇게 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는 않았다.
2016년 경주 지진의 여파로 다보탑의 일부가 무너지고 대웅전의 기와가 떨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4. 관람
4.1. 다보탑과 석가탑
4.2. 연화교, 칠보교
경덕왕 10년(751년)부터 혜공왕 10년(774년)까지 불국사가 중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개보수되었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2호로 등록되었고,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3년에 대대적인 복구 공사를 거치면서 난간을 복원했다.
불교 경전에서는 아미타불과 보살들은 연화와 칠보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관문인 안양문을 거쳐 극락세계를 오간다고 한다. 서방 정토를 상징하는 불국사의 정전 앞을 지날 때 이 다리를 건넘으로서 불국(佛國)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연화교는 10단 칠보교는 8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화교는 돌 끝이 각져 있으며 연꽃이 새겨져 있고, 칠보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두 다리 밑으로 아치형의 무지개 다리가 있으며 밑으로는 물이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두 다리가 붙어 있기 때문에 유사한 구조로 보이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다른 면이 많이 보이며 두 다리 밑으로 통하는 무지개 다리도 그 구성을 달리 하고 있다.
4.3. 청운교, 백운교
청운교와 백운교는 불국 정토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로 불국정토를 들어가는 순서는 자하문-청운교-백운교 순이다. 흔히 청운교, 백운교를 좌우로 나눠 생각하기 쉽지만 계단의 윗 부분이 청운교 아래 부분이 백운교인 것이다. 두 다리를 거쳐 자하문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석가탑, 다보탑이 나오며 이는 상징적으로 불국정토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경덕왕 10년(751년)부터 혜공왕 10년(774년)까지 불국사가 중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후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임진왜란 때 훼철되었다고 추정한다. 숙종 41년(1715년)에 한 차례 중수되었다고 하지만, 구한말에는 이미 폐찰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3년 대대적인 재정비를 거쳐 난간을 복원하고, 현재에 이른다.
석축물임에도 불구하고 목조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 백운교는 18단이고 청운교는 16단으로 모두 34단이고, 계단 끝에는 돌 기둥과 돌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치형의 무지개 다리 밑에는 연못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바로 옆에 있는 연화칠보교에 비해 규모는 크지만 장식은 간소화된 편이다.
4.4. 석굴암
5. 문화재
불국사는 역사적·학술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 절 자체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불국사가 소장하고 있거나 관련된 문화재로는 국보 8점, 보물 6점, 지방유형 문화재 1점이 있다.
사적 제502호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
국보 제20호 경주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국보 제21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三層石塔)
국보 제22호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蓮華橋 및 七寶橋)
국보 제23호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靑雲橋 및 白雲橋)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석굴(石窟庵 石窟)
국보 제26호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제27호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제126호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三層石塔 舍利莊嚴具)
보물 제61호 경주 불국사 사리탑(舍利塔)
보물 제1523호 경주 불국사 석조(石槽)
보물 제1744호 경주 불국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45호 경주 불국사 가구식 석축(架構式 石築)
보물 제1797호 경주 불국사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靈山會上圖 및 四天王 壁畵)
보물 제1933호 경주 불국사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6호 경주 불국사 당간지주(幢竿支柱)
6. 창작물에서의 등장
KOF 2001에서는 한국 스테이지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FIFA 98'의 오프닝에서 임시 복원 때의 모습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70년대 무협 홍콩 영화를 보면 불국사가 종종 소림사로 나올 때가 있다. 1978년 성룡이 출연한 '권정(금강혈인)'이 대표적. 당시 공산 중국이 개방하기 전이라서 본토 촬영이 불가능했고 홍콩 땅은 너무 좁아서 사찰을 배경으로 할 촬영지가 별로 없어서 그나마 전통 건축이 비슷하게 생긴 한국에서 중국 무협 배경으로 촬영하곤 했다. 비슷하게 수원 화성이 북경성으로, 종묘가 자금성으로 나온 사례도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라 황궁으로 대신 등장한다. 즉 불국사에서 직접 촬영한 것. 견훤이 서라벌을 점령하고 황궁의 누각에 오르는데, 바로 뒤에 자하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영화 YMCA 야구단에서는 여주인공인 정림(김혜수)이 동료인 대현(김주혁)과 함께 불국사의 다보탑을 방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역시 불국사에서 직접 촬영했다. 그런데 오히려 직접 촬영해서 고증오류가 되었다. 왜냐하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을사조약을 전후한 구한말인데, 이 당시 불국사는 위에 나왔듯이 폐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수 현인의 데뷔곡이자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오르게 만들어 준 곡인 신라의 달밤의 가사 1절에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또한 그의 노래 중에서 '불국사의 밤'은 불국사를 배경으로 한 노래다.
7. 교통
인근 고속도로로는 동해고속도로 남경주IC가 불국사에서 5km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고속도로 구조상 이곳을 통해 불국사를 찾는 경우는 부산이나 울산같이 경주보다 남쪽에서 오는 경우이며, 서울같이 경주보다 북쪽에서 온다면 경주 시내를 통과해서 와야 한다.
TMAP 등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자가용 이동 시 검색되는 불국사 공영주차장에 주차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특히 무더운 여름, 온가족을 데리고 땀흘리고 올라갔더니 정문 바로 앞에 주차장이 비어 있어 허탈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석굴암을 먼저 관광하고 내려오는 길 우측에 불국사 정문과 주차장이 있으니 바로 관람하면 편하다.
동해선에 이 역의 이름을 딴 불국사역이 있었으나 태화강역~구 경주역 구간의 복선 전철화 및 선로 이설로 2021년 12월 28일 폐지되어 2022년부터는 철도를 이용해서 오려면 KTX 경주역에 내려서 시내버스를 타고 와야 한다.
불국사에서 경주 시내, 신경주역까지 택시를 타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이유는 불국사가 택시 복합할증 적용 구역에 위치해 있어 55%의 할증 요금을 받기 때문이다.
불국사로 갈 때 이용할 수 있는 시내버스편
터미널, 경주시내
- 10번, 11번
- 700번
경주역
- 700번
시외버스는 구정로타리에서 이용할 수 있는데, 역시 불국사역 건너 혹은 앞에 있어 한참을 가야 한다. 이곳에서 울산, 경주, 효문, 울산공항, 호계, 모화, 입실, 포항, 영천, 경북도청, 하양, 대구대행을 이용할 수 있다. 과거에는 울산~포항 노선이 불국사에서 10회 이상 다녔으나, 동해고속도로 개통 이후 2회로 줄었다가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1회로 줄은 상태다. 이 2회는 야간에만 다닌다. 2019년 7월 18일에 울산-대구대 노선이 2회에 한하여 울산-경주를 고속도로 대신 7번 국도로 다니도록 변경되면서 주간 운행이 부활했지만 2020년에 코로나19로 운행이 중지되었다. 그 이후 2021년 10월 1일에 울산-신도청 노선 중 1회가 입실, 불국사를 들리도록 하면서 주간운행이 부활하였다. 과거에는 청주행도 다녔다가 폐지되었다.
8. 주차 요금
주차 요금
소형차
1,000원
대형차
2,000원
9. 기타
경산시에 불굴사라는 매우 비슷한 이름의 절이 있다. 하지만 인지도에서 넘사벽 이상으로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