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시절 다니던 학교와 친구 생각
어린 시절 생각나면 내가 다닌 학교에 걸어서 가본다. 우리 마을에 있는 학교라서 걷기 운동 삼아 운동장도 여러 바퀴 돌기도 한다. 농촌의 학교라서 학생 수가 적어 지금은 분교로 운영하고 있다. 운동장 교단 뒤편 화단에 독서상이 남매처럼 두 어린이가 책을 읽고 있는 조각상이다. 비록 학교는 분교장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어도 독서상은 반세기 넘도록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친구 강석만 교장 선생이 재직 시절 주선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당시 동창회장인 유광준 친구가 찾아와서
1회 졸업생이 표나는 기념물 기증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걱정을 했다. 그래도 내가 공무원으로 재직해서 이해될 일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박봉에 나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서울에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안상돈 친구에게 연락하여 두 사람이 같이 출연하기로 했다. 지금도 독서상 하단에는 나와 친구의 이름이 각인되어 있다. 독서상을 볼 적마다 어려웠던 시절 친구의 생각이 떠오른다. 독서상을 접할 때마다 안상돈 친구가 보고 싶고 간절한 마음 둘 데 없다.
3학년 때던가 박 선생님 아들이 구멍벌이라는 야생 벌에 쏘여 야단법석을 치른 일도 생각난다. 우리가 학교 뒤편 벌집을 집적거린 장난한 일로 단체 벌을 받았다. 종아리 회초리 3대가 얼마나 따갑고 아리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다. 회초리 따가움을 잘 견뎌내는 친구도 있었다. 그냥 얼굴만 찡그리지 나처럼 아프다고 못 견뎌 하지 않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감각이 너무 예민하여 참을성이 허약했나 싶었다. 그래도 선생님 아들이 야생 벌에 쏘여 퉁퉁 부은 얼굴보다야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는 가방이 없어 책보자기에 책을 싸고 어깨에 메고 등교했다. 신설 학교라서 학교 건물 짓는 일에 학생들 노력이 동원되기도 한다. 책보자기로 강변 조약돌을 담아 나르는 일을 많이도 했다. 6.25전쟁 직후라서 정부재정이 빈약하여 학부모 부역도 잦았던 시절이다. 안상돈 친구가 서울에서 기업을 일으킨 일도 이렇게 알뜰히 살아온 경험에서 이룬 일이라 생각된다.
학교에 가는 날마다 플라타너스 삽목 밭에 물을 길어다 주기 바빴다. 그렇게 키운 플라타너스 나무가 아름드리로 커서 지금은 교정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마치 정자나무처럼 웅장한 거목의 플라타너스다. 한때는 꾀꼬리가 찾아와 둥지를 틀기도 했지만, 학교 앞의 국도가 빈번한 자동차 소리로 요란하니 요즘은 꾀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뒷동산은 우리 문중 산으로 일부 학교 부지로 기증하고도 현재 자리를 유지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무원종2등 괴암공 할아버지
숙부인 산소가 모셔져 있는 동산이다. 나에게 12대 조모님 숙부인 산소다. 화남초등학교 위치가 아주 특별한 명당에 자리한 일이 자랑스럽다. 사법고시 합격자가 여럿 나오고 한국의 문인도 여럿 배출했으며 박사 목사 출신은 한 시대를 주름잡을 만큼 많다. 지형으로 봐도 지금은 대구-포항 고속도로 개설로 우백호가 명확히 감싸 안는다. 고현천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묘하게 감추어지는 명당의 조건을 차지하고 있다.
신설 학교 초기에는 달리기 선수가 뛰어나서 학교 육상선수 자랑도 유명했다. 영천에서 개최하는 시민 체육대회에 뽑혀 달린 친구들 박만수, 양병소, 박시중, 안필출, 권화자, 정팔진, 박무광, 이정자, 이두선 그 외 기억에 아삼한 친구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신설 학교의 선수가 유명세를 달기도 한 시절이다. 지금은 흩어져 살아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도 더러는 있을 듯하다. 현재까지 폐교를 면하고 분교로 유지되는 일도 동창회의 노력한 덕택이라 하겠다.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없고 그러니 아이들이 없어져 학교의 분교 유지도 어려울 듯하여 안쓰럽다. 추억의 모교가 언제까지 우리를 반겨 줄지도 기약 없는 일이다. 화남초등학교 모교가 한 번 폐지 당한다면 다시는 만날 길 없을 안타까운 일이다.
동기 졸업생 친구들 얼굴이 그리워 마음속에 그려보니 이미 절반 수가 고인이 된 듯하다. 그래도 연락이 닿아 카카오톡으로 만나는 친구는 가족 같은 마음이다. 매일 만나고 속마음의 온도를 가늠하며 지나간 추억 속에 기억의 돌짜구를 빼본다. 코흘리개 손이 노인의 손이 되어 악수를 나누는 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안상돈 친구는 소문 없이 고인이 되었다. 본인이 죽으니 연락도 없고 연락이 없으니 조문도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이제 생각나면 모교의
화단에
놓인 독서상을 보며 친구를 생각하는 길밖에 도리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친구가 마지막 남기고 간 독서상이 유독 후배들에게 마음의 넉넉함을 남긴 일이다. 졸업 후 헤어지고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한마을에 살았던 양애자와 정명애 친구다. 정명애가 마을 점방에서 과자 사는 모습을 보고 장난으로 와! 맛있겠다고 말했더니 한 봉지를 내 손에 꼭 쥐여 주고 미소를 띠는 모습이더라. 그래서 더욱 잊히지 아니하는가 보다. ( 글 : 박용 2020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