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미리암#애도
상실과 트라우마의 치유
유대 현자들은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애도하는 사람을 비판했습니다. (Moed Katan 27b.).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 대해 "네가 나보다 더 자비로운가?"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마이모니데스는 '죽은 자를 위해 울지 말며 그를 위해 애도하지 말라'(렘 22:10)는 말씀을 빌어, 사람은 사람의 죽음 때문에 지나치게 마음이 상해서는 안된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울지 말라'는 뜻입니다. 죽음은 세상의 방식이고 세상의 방식을 지나치게 슬퍼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Maimonides, Hilchot Avel 13:11.)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유대교 법에서 슬픔의 한계는 1년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감정의 주인이 아닙니다. 감정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카데스에 멈췄습니다. 그곳에서 미리암이 죽어 묻혔습니다. 그때 서야 사람들에게 물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고대 전통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미리암의 공로로 기적적으로 물의 공급을 축복받았습니다. 그녀가 죽자, 물이 멈췄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연관성은 미리암의 죽음과 물 부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과 모쉐의 감정적 평형 상실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그의 누나였습니다. 그녀는 그가 아기였을 때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을 따라 떠내려갔을 때 그의 운명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녀는 파라오의 딸에게 말을 걸고 히브리인에게 젖을 먹이라고 제안할 용기와 기개를 가졌고, 그렇게 하여 모쉐와 그의 어머니가 재회하고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민족에 속해 있는지 알면서 자라도록 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빚졌습니다. 미리암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간적 얼굴을 나타내며, 입법자로 해방자로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잃음으로써 그는 누나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인간적 기반을 잃었습니다.
상실한 사람은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침착함을 요구할 때 오히려 화가 납니다. 말해야 할 때 행동하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하셨을 때조차도 거의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그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이모니데스는 야아콥이라는 선지자가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몰랐는가를 묻습니다. 그는 그가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라 대답합니다,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는 셰키나가 우리에게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Maimonides, Eight Chapters, ch. 7, Pesachim 117a). 바위 곁에 있는 모쉐는 선지자라기보다는 막 누이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로받을 수 없었고 통제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만, 그는 또한 인간이었고,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더 인간적인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우리는 덧없습니다. 로쉬 하샤나와 욤 키푸르에 우네타네 토케프 (Unetaneh tokef) 기도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도자기 조각, 풀잎, 시드는 꽃, 그림자, 구름, 바람의 숨결"입니다. 우리는 먼지이고 먼지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떤 면에서 모쉐의 바위는 죄와 처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너희가 나를 거룩하게 할 만큼 충분한 믿음이 없었으므로…. 그러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너희에게 준 땅으로 데려오지 못하리라." 우리는 그 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왜 그토록 엄중한 처벌을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과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토라는 다른 많은 곳에서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있고,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후카트(Chukat)는 죽음, 상실, 애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미리암이 죽습니다. 아하론과 모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하론이 죽고, 사람들은 그를 위해 30일 동안 애도합니다.
그들은 함께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리더십 팀을 구성했습니다. 모쉐는 최고의 예언자이고, 아하론은 최초의 대제사장이고, 미리암은 아마도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건너지 못할 요단이 있고, 들어가지 못할 약속의 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은 너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사람조차도 필멸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백향목 재, 우슬초, 주홍색 양털을 섞어 '생수'에 녹인 재를 죽은 자와 접촉한 사람에게 뿌려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붉은 암소의 의식이 존재합니다. 죽음은 더럽혀진다. 이것은 유대교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 중 하나입니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종교에서 사후세계는 삶 자체보다 더 실제적임을 보여주고 았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신들이 사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 그리고 많은 원시 부족들은 조상들이 사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믿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의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무슬림들은 낙원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후세계와 죽은 자의 부활은 유대교 신앙의 근본적이고 변할 수 없는 원칙이지만, 타나흐(Tanach)는 그것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멸성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시편은 "죽은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험과 상실과 슬픔과 함께, 삶 그 자체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듯이 우리는 "먼지와 재"에 불과할 수 있지만, 삶 그 자체는 끝없는 흐름, "살아있는 물"이며, 이것이 바로 붉은 암소의 의식이 상징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죽습니다. 모쉐와 아하론은 슬픔에 압도됩니다. 모쉐는 잠시 통제력을 잃고, 그와 아하론은 그들도 필멸자이며,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그러나 마이모니데스가 말했듯이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육신화된 영혼입니다. 우리는 살과 피입니다. 우리는 늙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습니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우리가 시작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잃은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가고,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고,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Shir ha-Shirim 8:6. Mishlei 10:2, 11:4)
진정한 애도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다고 믿는 것이며,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료: Maimonides, Hilchot Avel 13:11. Eight Chapters, ch. 7, based on Pesachim 117a.
글: <월간샤밧>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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