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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 시인의 1주기 추모문집으로 출간된 <영원한 지금에>(황금마루)를 며칠 전에 전해 받았다. 25년 전쯤에 박희진 시인과 대담 기사를 쓴 적이 있는 것을 <공간시낭독회> 집행부와 연락이 닿아 전해준 바 있었다. 추모집을 엮다보니 대담기사류는 성격상 추모시, 산문들과 괴리가 있어 싣지 못해 죄송하다는 전언을 듣고… 그때 바빠 추모시도 쓰지 못한 나와 집행부와는 서로 미안함을 비겼다. 1992년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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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의 언어, 영성의 언어
대담 : 이영숙 (시인)
거실에 들어서자, 서창 가득 거대한 산수화가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그 원근감이라니……. 나의 당혹을 눈치 채신 선생님께서 먼저 베란다로 나가셨고, 비로소 그것이 진달래 능선을 품은 북한산의 실체임을 알 수 있었다. 유리창의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산을 담아 놓고 사는 시인의 옆모습을 보며 문득 북한산과 무엇인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막연한 것 같기도 하고, 손에 잡힐 듯도 한 그 무엇.
다시 거실로 들어오고서야, 제가 아무갭니다, 라는 인사조차 아직 안 드렸음을 알았다. 그래도 조바심쳐지지 않는 이 편안함은 또 무엇인가.
탁자 위에 자연스럽게 척척 쌓여있는 러시아권의 각종 화보와 서책들을 보며 올 여름에 다녀오신 구소련에 대한 소감을 여쭈었다.
박희진(이하 박) : 가난기가 여기저기 흘러넘치는 것을 보며 공산주의에 대해 새삼 허망감이 치밀었습니다. 70여 년 동안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게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을 황폐화 시키는 역사였다고 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쓰던 한두 가지의 물건을 들고 길거리에 나와 하루 종일 서서 매매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어떤 희망 즉 아,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탈피의 꿈틀거림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 손수 타 주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오후 네 시에 가까운 햇살이 어디가 서재랄 것도 없이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실내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생님은 어느 때 가장 시상이 잘 떠오르실까?
박 : 누군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물었다죠? ‘당신은 어느 때가 가장 천재적인 자기표현의 시간입니까?’ 그러자 그는 자신을 스물네 시간 천재라 했다 그래요. 그런데 로댕은 ‘영감이란 없다’라고 했거든요. 영감에 가득 차 있는 로댕의 조각품들을 보면 그 말은 납득이 안 되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일에 몰두해야 된다고 그가 주장하던 맥락에서 보면 수긍이 가죠. 즉 그에겐 따로 영감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닐 정도로 늘 끊임없이 집중과 지속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온 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제 경우, 시작(詩作)에 가장 좋은 시간은 오전이지만 안테나는 스물네 시간 가동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연히 새벽 두세 시에 잠이 깨었을 때도 비몽사몽간에 시상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일어나서 메모를 하기도 하고 아예 시작을 하느라 새벽까지 있기도 합니다.
이영숙(이하 이) : 20세기에 들어와서만도 많은 문예사조가 일어났다 사라지곤 했는데, 선생님께서 특히 관심을 가지신 사조가 있으셨는지요?
박 : 근래 것만 보더라도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그러나, 난 구조주의가 뭔지도 몰라요. 실존주의는 좀 알지요. 내가 스무 살 때 6․25가 일어났고, 전쟁을 겪으면서 싸르트르가 말한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라는 명제가 개념적으로서가 아니라 실감으로 와 닿았어요. 가령 싸움터에 있어서 인간들의 무수한 죽음을 보았을 때, 신이니 본질이니 보다는 지금 여기 내던져져 있는 고깃덩어리, 이게 선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싸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고 문학에 있어서도 작가라면 그 시대상황에 참여해야 된다, 그리하여 역사적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속에서 자유의 길을 찾았던 사람이라고 봐져요.
그때는 싸르트르를 조금 이해했고 공명공감을 했었는데 그 뒤부턴 전 어떠한 사조에도 휘말리지 않았어요. 실지로 내게 있어서 가장 다급하고 근원적인 문제는 언제나 자기추구였고, 자기혁신이었으며, 본질에 회귀하는 문제였습니다. 자기실현을 통해서 내 안에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음을 실감하는 문제였습니다. ‘박희진 universe’ 하나 이루는 일이었어요. 그러니 무슨 사조, 무슨 유행에 신경 쓸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이 : 문예사조는 그렇다 하더라도, 스물에 싸르트르를 이해하신 선생님께서 역시 스무 살을 전후해서 좋아하신 시인들이 있으신지요?
박 : 제가 10대부터 좋아했던 시인들은 부지기수예요. 발레리 좋아했고, 릴케 좋아했고, 랭보 좋아했고, 또 영국 시인 블레이크, 예이츠, 엘리엇, 딜런 토마스 등을 좋아했어요. 그러나 가장 지속적으로, 가장 근본적으로 제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되는 시인은 릴케예요. 일본어로 된 릴케전집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글은 뭐든 거의 다 읽었어요. 그의 후기 시 「오르포이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라든가 「두이노 비가」는 어려워서 아직 산발적으로 읽고 있는 중입니다만, ‘인간이 산다’는 것은 자칫 ‘본질에서의 일탈’ 즉, 타락을 초래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릴케는 자기 본질에 투철했어요. 끊임없는 혁신의 상태를 유지했고, 정신의 유연성을 간직했으며, 전신(轉身)했습니다. 릴케뿐 아니라 두보의 시를 지금 봐도 천 몇 백 년의, 시대의 때가 전혀 묻지 않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동서고금의 명시들은 시대를 초월해요. 본연의 삶에 투철했기 때문에 언제 봐도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유형의 시인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 선생님께선 10대에 이미 자신의 본질에 투철할 것에 대한 예감을 가지셨습니까?
박 : 제가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15세 전후해서였는데, 사실 그때의 ‘나’라는 인간은 동서고금의 천재들과 비교해 볼 때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었지요. 더욱이 제가 15세 되던 해에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우리글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우리말로 된 시를 쓴다는 게 터무니없는 짓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잿빛의 시기에도 나 자신의 가능성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일, 그게 언제나 중대사였어요. 공부를 했지요. 엘리엇이 말한 대로 ‘historical sense’가 있어야 했어요. 내가 죽는다는 것은 한국민족의 절망이다 할 정도로 나는 나의 가능성을 우리 겨레의 가능성하고 완전히 동일시했어요. 나 자신에 투철하면 세계성에 동하는 문학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 선생님의 그 확신은 이후의 삶이나 작품에서도 일관된 성실성으로 드러났다고 여겨지는데요. 선생님께서 아끼시는 1행시, 4행시, 14행시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박 : 제가 절에 가면 중이 되라하고 수도원에 가면 수사가 되라하죠. 내가 독신인데다 일종의 수도사 못지않은 생활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그런가 봐요. 저는 시와 결혼한 사람이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에요. 아마 그 점이 작품에 노출되어 있다고 봅니다. 엄격한 행수 제약에 반해서 소네트 류의 14행시를 즐겨 써 왔고, 1행시라던가 4행시 또한 젊었을 때부터 계속 써 왔습니다. 1행시가 사백 수를 넘었는데, 오백 수 정도 되면 시집을 하나 낼까 하고 있어요. 4행 시집은 이미 냈죠. 『사행시 134편』이라는 시집을 냈다가 그 뒤로 계속 쓰여졌기 때문에 작년의 제 회갑을 자축하는 뜻으로 『사행시 삼백수』라는 시집을 냈죠. 또 세 편의 장시도 있습니다. 「혼돈과 창조」라고, 일제 때부터 6․25라는 전쟁의 체험을 통해서 주인공인 내가 살아남는 과정을 그린 것과 「이효봉대종사송」이라고 하나의 서사시라 할 수 있는 이효봉스님의 일대기를 쓴 것, 그리고 「빛과 어둠의 사이」라는 장시가 그것입니다. 나의 대표작을 굳이 한 편만 남기라 한다면 「빛과 어둠의 사이」를 남길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박희진이라는 시인의 정신사와 특성이 총체적으로 잘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 선생님께 있어서의 ‘흰 시’와 ‘검은 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박 : 제가 십대에 처음으로 쓴 시가 「환멸의 비애」라고 일본어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나는 병적으로 몹시 내성적이고 우울했었어요. 자기 폐쇄적이었고, 그러다 심각하게 반성을 하게 되었지요. 시란 기쁨을 주는 거고, 막혔던 걸 열어주는 거고, 경직된 걸 유연하게 해 주는 게 아닌가라는. 그래서 습작시편 중에서 ‘검은 시’들은 다 파기하고, 그렇지 않는 ‘흰 시’랄 수 있는 작품들만 모아서 『실내악』이라는 첫 시집을 냈어요. 실내악은 나 자신의 정신의 원형을 통해서 여과된 영혼의 결정 같은 작품집이었는데, 『청동시대』라는 두 번째 시집을 낼 때는 또 생각이 달라졌어요. 남들은 청춘을 구가하는데 난 뭐냐……. 그래서 난 작품을 통해서 최대한 나 자신의 청춘을, 그 광휘와 그 비창과 그 영광과 그 상처의 모든 것을 드러내 보자 했어요. 나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영혼과 육체의 양극이 있는데 위대성이라는 것은 이 양극을 그득하게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내 시에 있어서 나의 모든 국면을 취사선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드러내자 했던 게 『청동시대』였습니다. 거기에는 negative한 쪽의 시와 미래지향적이고 생명찬가 쪽의 시가 함께 있었지만 역시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흰 시’ 계열이었습니다. 여태까지의 내 시집 전체를 놓고 볼 때 나는 ‘흰 시’를 열망해 온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 ‘시는 무엇이다’라는 개념상의 정의가 매우 다양하게 내려져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의 실체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 언어죠. 시는 언어를 통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시는 존재다’ 이건 릴케의 말입니다. 릴케의 「오르포이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보면 ‘Song is being’이라는 말이 나와요. 노래는 존재다, 시는 존재예요. 그리고 존재라는 것은 형태를 지니는 거지요. 여기 장미꽃이 있다고 칩시다. 그 장미꽃은 신비스럽죠. 그러나 보통 신비스럽다는 것은 막연하고 파악하기 힘든 것이고 불가사의하다거나, 뭔가 몽롱한 것으로 치부하는데, 그건 잘못이에요. 장미는 신비하지만 어느 구석이든 분석해 보십시오, 꽃잎을 뜯어보십시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십시오. 형태가 명확해요. 하지만, 그 전체가 풍기는 인상은 아주 신비스럽고 황홀하듯이, 시는 명확한 신비예요. 명확하게 쓰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신비로움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그 간단한 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예요. 루불 박물관에 갔을 때 보니 사람들이 모나리자 앞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어요. 모나리자의 신비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또 렘브란트가 워싱턴 갤러리에 특별히 많다고 해서 그곳을 둘러본 적이 있었어요. 거의 다 본 후 복도 비슷한 낭하를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벽면에 있던 그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어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었어요. 거기 있는 그림이……(그러면서 그는 서재로 들어가 화집을 찾아 나왔다) 바로 이 그림이에요(그것은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화였다). 여기에 어디 흐리멍텅한 구석이 있습니까? 그야말로 엄밀하고 섬세하고 정치하고 명확합니다. 그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지성이에요. 다빈치는 지성의 권화(勸化)입니다. 엄정하게 자기 자신을 추구한 사람이에요. 그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애매성이란 것은 조금만치도 없는 거예요. 그게 서양의 지성이에요.
폴 발레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서설을 쓰고 거기에 매혹된 것은 발레리가 다빈치의 지성에서 바로 자기 자신을 봤기 때문이에요. 발레리의 시 역시 정말 애매한 구석이 없습니다. 다빈치의 그림들은 과학적으로 해부학적으로 엄밀하게 어프로치해 가지 않습니까? 그 방법이 너무나 비협잡적이기 때문에 타인이 추종을 할 수 없을 정도예요. 자기 능력의 극한까지 자기 자신을 추구해가는 거예요. 그 극점에 달하게 되면 유한의 세계가 무한의 세계하고 접하게 됩니다. 이 그림이 그 접합점까지 간 그림이에요. 그랬을 때 신비라는 것은 피안에서 빛을 발해오죠.
이 : 그 신비를 시인의 지성으로서 존재케 한다는 말씀이시죠?
박 : 그래요. 발레리는 그것을 지성의 축제라 했고, 코울리지는 최선의 질서가 부여된 최선의 언어라 했지요. 절대로 그건 지적인 작업이에요. 감정이나 감각도 포함해 갖고 있을 뿐이지 감정만 가지고는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은 릴케의 유명한 말이지만, 그러면 십대에 이미 시는 흔해빠질 정도로 써져야 되는 게 아니냐는 거예요. 그러므로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죠. 체험을 망각해 버리고 혈육화 된 다음에 어느 날 그게 우연히 떠올라 왔을 때 겨우 한 줄의 좋은 시가 써진다, 뭐 이런 식으로 말테의 수기에 나오지만 어쨌든 시를 쓴다는 것은 지성의 조작입니다. 왜냐하면 우수한 창작가는 자기 안에 우수한 비평가가 있게 마련이거든요. 쓴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비평 행윕니다. 그 언어가 한 편의 시 안에서 질서정연하게 배합이 되어야 하요. 잘못 선택한 언어는 썩은 사과와 같아요. 그것은 옆의 사과마저 썩게 합니다.
어떤 상태를 표현할 때 최선의 언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프로벨의 일어설(一語說)은 시나 산문의 경우에도 다 들어맞는 얘기예요. 시는 언어의 건축물일진대 나사못 하나, 벽돌 하나가 잘못 놓여도 안 되죠. 이것이 하나의 고전적인 시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편의 시는 그 시만이 지닐 수밖에 없는 완벽한 형태를 지녀야 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이 : 첨예한 의식과 지성으로 한 편의 시를 쓰셨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박 : 글쎄, 뭐 임산부가 아기를 출산했을 때의 홀가분함이나 자유스러움, 그런 것에 비유가 될지 모르겠군요. 내가 임산부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어쨌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승리의 기쁨을 느낍니다. 해방의 기쁨이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시를 왜 쓰느냐 하고 묻는다면 저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쓴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구도자나 종교적인 수행자들에게 왜 수도를 하느냐고 묻는다 해도 그들도 저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라 믿습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지요. 불교에서는 특히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든 시를 못 쓰고 있을 때는 인간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위축감이라든가 부자유를 느끼곤 합니다.
이 : 지속적으로 ‘흰 시’를 추구해 오시면서, 흔히 예술인에게서 나타나는 자학이나 절망, 고독마저도 이윽고 빛으로 뽑아 올리신 작품들이 선생님의 시세계를 이루지 않습니까? 자신 안에 전혀 자기파괴적인 요소를 지니지 않으신 듯이 보여집니다만, 기인이랄지, 파멸형의 예술가들을 보통사람들이 더 선호한다는 느낌도 강하게 받거든요. 선생님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 : 파멸형의 인간에게는 흔히 공격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죠.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도 이 공격성이 있어요. 이게 삶의 근원적인 충동 아닙니까? 그 성향이 적절히 잘 조절되느냐, 못되느냐에 따라 파멸형이냐 아니냐가 판가름 나요. 모든 비극적인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세요.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 『안나 카레리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아버지, 장남, 차남 등…… 열정적이고, 공격적이고, 어둡고, 악마적이에요. 자신과 주변을 파괴해요. 정념(情念)의 비극이죠.
이 : 혹시 선생님께도 그런 공격성이 있으십니까?
박 : 있지요. 저는 공격성이 안으로 향하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자면 그건 저하고 담배하고의 관계예요. 담배는 십대에 호기심에서 배웠는데 제 몸에는 도무지 맞지 않았어요. 한두 대만 피워도 못 견디겠는데, 아, 연달아 한 갑을 피우곤 했지요. ‘이건 나를 죽이는 악마다’하고 담뱃갑을 여러 번 비틀어 버렸어요. 그러면서도 인이 배기니까 담배 한 대를 피워야 글이 써진다 하는 식의 자기 최면을 걸어 그걸 또 사 피우곤 했죠. 혓바닥이 짝짝 갈라지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도 담배는 내 안에 악마로 계속 남아 있었어요. 나를 못살게 굴며,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예요. 오십이 넘어서까지 그 짓을 했으니, 담배 때문에 난 망조가 들었던 인생이에요(웃음). 그걸 끊은 지 근 십년 되었지만 심리적으로 분석이 되는 것은 안으로 향하는 공격성이 이렇게 자기학대로 나타났다는 것이었죠. 이 악마적인 에너지를 시를 창작하는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돼요. 그랬을 때 번뇌가 보리가 되는 거예요. 고뇌가 황홀로 바뀌는 거예요. 수렁 속에 박혀있는 연근이 솟아나서 연꽃으로 피는 거예요.
이 : 선생님 작품의 대부분에 불교적인 향기가 가득 배어있는 것을 보는데요. 선생님의 인생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박 : 심지어 나는 ‘사람은 누구나 보살이 될 의무가 있다’라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인데, 상구보리하화중생, 즉 보살의 이념이 그것이기 때문이지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되고 또한 혼신으로 중생들을 구제해야 돼요. 이 두 가지 작업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람이 보살이에요.
‘상구보리’라는 것은 자기를 이롭게 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우선 내가 밝아지는 것이니까 내가 이로워지는 거예요. 그 다음에 중생을 제도해야 된다는 것은 ‘이타행’입니다. 쉬운 예로 버스 운전사를 봅시다. 그 사람은 운전할 때 운전 외의 딴 생각하지 말고 아주 순수해져야 해요. 운전을 잘할 때 그 사람은 자유로워집니다. 대학교수는 교수노릇을 잘해야 ‘자리이타행’을 하는 교수보살이 되고 청소부는 청소를 잘해야 청소보살이 됩니다. 운전하는 사람에게 운전 못하게 하면 그 사람, 병납니다. 내가 시를 쓰는데 나보고 시를 쓰지 못하게 하면 나, 병납니다. 난 그 부자유 속에서 죽어요. 그러므로 각계각층,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로 다른 사람과 바꾸어질 수 없는 적재적소에서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그 사람은 자연히 ‘자리이타행’을 하는 보살이 되는 거예요. 그 순간에 이 지상은 불국토가 됩니다.
이 : 불국토가 쉬운 일처럼 말씀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투철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선생님께선 벌써 다 이루신 것처럼 평온하고 맑아 보이시면서도, 내면의 투철함 같은 것에서 뿜어내는 빛과 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박 :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정화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삶이다’라고 일깨워 주는 게 예술이구요. 예술은 의미 추구이고 미는 우리 삶을 정화해 주죠. 시나 음악이나 그림이나 무용을 통해서 예술가들은 그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 늦기 전에 진선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에요. 미 안에는 진선이 들어 있으니까. 그 진선미 다음 단계가 거룩함이에요. 진․선․미․성의 단계까지 가는 거예요.
이 : 선생님께서는 시인으로서의 시의 언어에, 구도자로서의 영성의 언어를 조화롭게 일치시키는 분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박 : 『실내악』과『청동시대』, 그리고 3, 4 시집까지는 전집을 쓰는 기분으로 시를 써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폭발적으로 시가 써졌기 때문에 주제별로 시집을 냈었죠. 사행시만 모아서 『사행시집』, 『서울의 하늘 아래』란 민요집과 정치․사회시랄 수 있는 『시인아 너는 선지자 되라』, 또 나 자신의 십대부터 지금까지 쓴 연애시만 모아 가지고 『라일락 속의 연인들』이란 연애 시집도 냈지요. 시집만도 13권이 되기 때문에 내 작품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평론가가 없었어요.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가 살아있는 동안에 행해지리라는 환상은 절대로 안가지고 있어요. 사후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못 하겠구요. 더군다나 난 제자도 없고 후손도 없어요. 그래서 죽기 전에 전집을 내 돈으로라도 내놓고 가야 돼요.
또 한 가지, 난 천재의 비결을 집약해서 간단히 말할 수 있는데 그건 집중과 지속이에요. 정신의 집중과 그 집중의 상태를 어떻게 하면 지속하느냐에 자신의 신명을 바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의 천재성이 꽃피게 되는 것이라고 봐지거든요. 개인마다에 주어진 천부의 능력, 그게 백 촉짜리 전구다 했을 때 그것이 백 프로 켜지는 상태가 집중이에요. 그걸 평생 지속시키는 사람도 있어요. 로댕 같은 사람이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제가 <공간시낭독회>에서 시낭송을 할 때가 백 촉으로 켜지는 가장 활기 넘치는 순간이래요. 남들이 그래요. 완전히 신들린 무당처럼 된다구요. 나이는 들어가지만 백 촉짜리, 영감의 순간을 지속하는 시인으로 남아 계속 시를 쓸 작정입니다.
그랬다. 자신을 에워싼 도시들이 자신을 공격해오고 있는 요즘에도 북한산은 여전히 인수봉을 감싸 안고, 봄이면 진달래 능선에 줄불을 놓는다고 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그처럼 투철한 시혼으로 지피며, 정신세계의 무량광명을 일관된 성실로 지켜온 박희진 선생님의 넉넉함이 북한산과 닮아 있었다는 것…….
어둑해져 오는 길에 차를 달리며, 필자의 시 쓰는 일이 앞으론 더 어렵겠다는 예감이 가슴을 찌르는데 그건 어쩐지 향기로운 아픔만 같아서 눈물이 났다.
―월간 ≪문학예술≫, 199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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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시의 실체는 언어다 라는 말씀에 크게 공감하며 향기로운 아픔에 마음을 얹어봅니다.
Song is being
시인 박희진님과 이영숙님의 대담 "시의 언어 영성의 언어" 는 제목 그대로 시는 이세상의 언어가 아니고 천상에서, 피어나는, 영성의 언어임을 이제야 조금, 알았습니다. 저의 메마른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웅크리고 있던 시, 그냥 평생을 짝사랑으로 보고 두기만 아쉬워 진심으로 프로포즈를 해보려 했는데, 구애도 못해보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화자들의 영성에 다시는 말을 못할것 같습니다. 그저 다듬어진 말 몇마디면 시 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강가에 뒹구는 돌이었습니다. 돌에 영성이 깃들 수 있을까요,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영성이 담긴 언어로 말하게 될때 까지 긴 세월을 다듬어 보려고 합니다.
네, 돌을 소재로 삼으면 영성의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성을 소재로 삼으면 영성의 언어가 되지 않습니다.
'메마른 마음'을 '메마른 돌'이라고 바꿔 쓰시는 순간, 영성이 싹트기 시작하지요.
얼른 입을 떼시기를...! 열심히 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