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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천산으실 원문보기 글쓴이: 양지담
영일 정씨는 신라시대 이전인 사로국의 6부촌중에서 취산 진지부의 촌장 지백호가 서기 32년 신라 유리왕 9년에 유리왕으로부터 다른 5부 촌장들과 함께 성을 하사 받을 때 본피부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성을 하사 받았는데 이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정씨가 시작된 것이다. 후대에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경주 정씨, 하동 정씨, 진주 정씨 등 본관을 달리하지만 모두 지백호를 시조로 하는 지백호의 후손들이다.
영일정씨는 지백호의 후손으로서 연원은 같으면서도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는 두 파가 있다.
하나는 고려 의종 때 중신으로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정습명을 일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인 포은 정몽주 계열과 고려때 감무를 지낸 정극유를 일세조로 하는 감무공파인 설곡 정사도, 송강 정철계열이 그것이다.
감무공파의 시조는 정종은으로 신라 태종무열왕때 간의대부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종은은 그 뒤에 왕에게 간언한 것이 화가 되어 인동의 약목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그 뒤의 계대가 실전되어 고려때 감무를 거쳐 영일 현감을 지낸 정극유를 기세조로 하여 세대를 잇고 있다.
감무공 정극유의 후손은 4세조까지는 단계로 이어졌고, 5세조 이후의 후손에서 몇개파로 나뉘어졌다.
21대조(6세조) 문정공, 설곡공 정사도는 아들이 하나인데 정홍이다. 정사도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336년 충숙왕 복위 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341년 충혜왕 복위 2년에 권지전교 교감이 되었고 후에 직제학에 올랐다.
모친상에 3년간 시묘한 효성에 감탄한 공민왕으로 부터 일성군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동지밀직으로서 합포를 지킬 때 군사, 행정에 업적을 남겼으나 최영 장군의 제거를 꾀하는 신돈을 반대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동북면 상원수 도순문사를 거쳐 고려말 우왕 때 지문하성사, 정당문학, 지서연사, 평리상의를 역임했다.
오천군에 개봉되고 공신이 되었다. 영일의 오천서원 별사에 배향되었다.
20대조(7세조) 공간공 정홍은 정원공 정진과 정숙공 정연 형제를 두었다. 정홍의 후손을 공간공파라고 한다. 정진의 후손이 정원공파, 정연의 후손이 정숙공파이다. 정원공 정진에게는 다섯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두아들은 후손이 끊겼고 다른 세 아들의 후손이 각각 강화공파, 원평공파, 부마공파로 나뉘어졌다. 정원공 정진의 5남 정효전은 태종 이방원의 4녀 숙정옹주와 결혼하였다.
19대조(8세조) 정숙공 정연은 송곡공이라고도 불리는데 안평대군의 장인이며 형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슬하에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이 각각 판결사공파(정자원), 이의공파(정자양), 위양공파(정자제), 김제공파(정자숙)로 나뉘어졌다.
정숙공 정연의 딸은 세종대왕의 3남 안평대군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통일동산 근처에 있다.
정숙공 정연의 12대손에 조선 영조때의 형제 정승을 지낸 정우량, 정휘량 형제가 있다.
정우량(1692~1754)은 자는 자휘, 호는 학남, 시호는 문충이다. 1723년 경종 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728년 영조 4년에 왕의 교서를 지어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각 도에 발표하였다. 부수찬으로 시독관을 겸임하였고, 왕에게 극청하여 이황, 이이 등의 문집을 간행하게 했다. 지평, 대사성, 이조참판, 이천부사 등을 역임했고, 1749년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어 중추부판사에 전임되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계성사비》를 남겼다.
정휘량(1706~1762)은 자가 자우, 사서, 호는 남애, 시호는 문헌이다. 돈령부판사 정수기의 아들이다. 1733년 영조 9년 사마시를 거쳐 173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뒤 시독관, 응교를 거쳐 1755년 《천의소감》찬집 당상이 되었다. 이듬해 제학을 거쳐 대제학이 되고, 호조, 공조, 이조, 병조의 판서를 역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61년 우의정이 되고, 좌의정에 올라 왕의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고 사직, 중추부영사로 전직하였다. 질부인 화완옹주의 배경이 컸으며, 그의 형 정우량과 더불어 문명을 떨쳤다. 문집에 《남애집》저서에 《견사록》이 있다.
18대조(9세조) 김제공 정자숙은 사형제를 두었는데 정미, 정순, 정필, 정위다.
17대조(10세조) 정위는 건원릉 참봉으로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정유심과 남원 군수를 역임한 판관공 정유침이다.
16대조(11세조) 판관공 정유침은 사형제를 두었는데. 정자, 정소, 정황, 정철이다.
15대조(12세조) 문청공 송강 정철은 자는 계함이고 호는 송강, 시호는 문청이다. 기대승, 김인후, 양응정의 문하생으로 어려서 인종의 귀인인 맏누이와 계림군 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궁중에 출입하였는데 이 때 후에 명종이 되는 어린 경원대군과 친숙하였다.
1545년 명종즉위년에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배소에 따라 다녔다. 1551년 특사되어 온 가족이 고향인 창평으로 이주하였다.
김윤제의 문하가 되어 성산 기슭의 송강가에서 10년동안 수학할 때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우고 율곡 이이, 성혼 등과도 교유하였다. 1561년 진사시에, 다음해 별시문과에 각각 장원, 전적 등을 역임하고 1566년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율곡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1578년 선조 11년 장악원정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어 3년동안 강원, 전라,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때《관동별곡》을 지었고, 시조《훈민가》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저문제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때 신성군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 진주로 유배, 이어 강계로 이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다음 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 송정촌에 우거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군의 오천서원 별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송강가사》《송강별추록유사》, 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문청공 송강 정철은 사형제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화곡공 정기명이다.
둘째 아들은 강릉 부사를 지낸 정종명이다.
세째 아들은 운붕공 정진명이다.
네째 아들은 대제학을 역임하고 송강집을 편찬한 기암공 정홍명이다. 정홍명은 시호가 문정공이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송강 문집을 종합, 수록, 편집하였다.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각별하였다고 한다.
14대조(13세조) 운붕공 정진명은 송강 정철의 세째아들이며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곡구공 정한이다.
13대조(14세조) 곡구공 정한은 송강 정철의 손자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용지거사 정광연이다. 송강 정철의 둘째 아들인 강릉공 정진명의 넷째 아들 문절공 정양과 사촌지간이다.
강릉공 정종명의 네째 아들이 문절공 정양인데 이분으로 말미암아 충북 제천과 인연이 맺어졌다. 문절공 정양은 병자호란이후 세상을 등지고 태백산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태백산 주변에 같이 운거했던 선비를 태백 5현이라고 한다. 그 이후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제천 금성면 월림리에 세거하였는데 이때 부터 제천에 있는 영일 정씨를 월림 정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문절공 정양은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 끓고 절하는 치욕을 당하자 서울 출신 선비 5명이 봉화의 문수산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영의정 인재 홍섬의 증손인 손우당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인 포옹 정양, 청양군 심의겸의 손자인 각금당 심장세, 참판 강징의 현손인 잠은 강흡, 만전당 홍가신의 손자 두곡 홍우정이 그들이다. 이들을 테백산에 은거한 다섯명의 현인이라는 뜻에서 태백오현이라 한다.
태백오현은 춘양 노리, 도심, 모래골, 버정이, 뒤뜨물 등에 터를 잡아 정착했는데 서로 간에 거리는 멀어야 수십 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연을 벗삼아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다. 학산리(鶴山里) 골띠마을의 와선대 아래로 폭포는 그들의 충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처럼 정겹게 떨어지고 있다.
이들 태백오현의 후손들이 와선정계(契)를 결성하여 아직까지 이어가고 있는 모습은 영남 지역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끈끈한 유대이다. 다섯 사람의 그때 그 약속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12대조(15세조) 용지거사 정광연은 송강 정철의 증손자이다. 증직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슬하에 오형제를 두었는데 정필진, 지촌공 정즙, 정흠, 정역, 정식이다.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장암 정호의 아버지 정경연과 육촌지간이다.
11대조(16세조) 지촌공 정즙은 송강 정철의 현손이다. 증직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오형제를 두었는데 정진하, 정민하, 정징하, 정취하, 정택하이다. 정즙은 숙종, 경종, 영조시대에 영의정을 지낸 장암공 정호와는 8촌지간이다.
지촌공 정즙의 묘소는 충남 아산에 있다.
장암공 정호는 자가 중순이고, 호는 장암, 시호는 문경이다. 감찰을 지낸 정경연의 아들이다. 1682년 숙종 8년에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정언을 역임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어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숙종 20년 풀려나와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98년 집의, 사간 등을 지냈다.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신은 12만냔의 취급 부주의로 파직되었다가 광주부윤에 기용, 1702년 동부승지, 대사성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도승지, 부제학을 거쳐 1713년 대사성에 재임중 송시열의 묘정 배향을 제의하고, 1715년 부제학으로 《가례원류》의 발문에서 윤증을 공박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게 하였으며, 1717년 숙종 43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하고, 다음해 이조판서가 되었다. 1721년 경종 1년 실록청 총재관으로《숙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가 신임사화로 강진에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 1년 풀려나와 우의정이 되고, 사화로 사사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9년 기로소에 들었고, 중추부영사로 치사하였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였고, 글씨와 시문에 뒤어났다. 충주의 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장암집》,편저에《문의통고》가 있다.
10대조(17세조) 이간재공 또는 진사공 정취하(1671~1759)는 송강 정철의 5대손이다. 1738년에 사마양시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풍수지리학에 통달하였다.
문헌을 연구하던중 전라도 곡성 통명산에 명당자리가 있다는 것을 탐지하여 현지를 탐방하여 뛰어난 길지임을 확인하고 부인 제주양씨가 1725년 사망하자 이곳에 장사지냈다. 이때 큰 아들 정적의 나이는 10세였다고 한다. 아들 연고공 정적은 1750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이간재공 정취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 제주양씨의 묘 밑에 장사지냈다.
그후 또 다른 명당자리가 전라도 화순군 이서면 인계리 무등산 동편에 있다는 것을 탐지하여 현장을 탐방하였는데 길지중의 길지인데 여인의 자리로서 오척단신이라야 묻힐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에 장고끝에 둘째 부인으로 오척단신의 전주이씨와 혼인하여 3남 1녀를 얻었다.
그후 이간재, 진사공 정취하는 "내가 죽거든 내외 합장하고 큰아들 정적과 똑같이 제수를 차려 묘제를 지내도록 하라"고 유언하고 1759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간재공 정취하는 그의 유언대로 전라도 곡성 통명산 제주양씨의 묘소에 합장되어 있다.
같은 송강 정철의 5대손인 정익하는 시호가 충헌공이고 의정부좌참찬을 지냈으며 영일정씨 세보의 최초 편집자이다.
이간재공 정취하는 사형제를 두었는데 첫째 부인에게서 연고공 정적, 둘째 부인에게서 정용, 정간, 정검을 얻었다.
9대조(18세조) 연고공 정적은 송강 정철의 6대손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 분이 바로 기탄공 또는 감역공 정두환이다. 연고공 정적은 1750년 35세때에 요절하였는데 전라도 곡성 통명산 아래 어머니 묘소 밑에 묻혔다.
8대조 할아버지 (19세조) 정두환은 송강 정철의 7대손으로 기탄공 또는 감역공이라고 한다. 오형제를 두었는데 정재찬, 정재규, 정재선, 정재형, 정재운이다. 묘소는 전라남도에 있다. 이때부터 제천과 인연이 맺어졌다.
송강 정철의 둘째 아들로 강릉부사를 지낸 강릉공 정진명의 넷째 아들 문절공 정양의 제천 월림 종가집에 후사가 없자 기탄공 정두환의 부인께서 큰아들 정재찬을 문절공 월림 종가집으로 흔쾌히 양자로 보냈다고 한다. 그후 강릉공 정진명의 넷째아들 문절공 정양의 후손중 제천 금성면 산으실 종가집에도 후사가 없자 이번엔 세째아들 정재선을 양자로 보냈다.
큰 아들 정재찬의 후손이 제천 월림 영일정씨 종가집으로 지금도 제천 월림에 가면 정원태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정원태씨는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워 유명한 한학자였다. 서울대 교수들이 한문에 막히면 정원태씨에게 자문을 구하였다고 한다. 정원태씨 동생이 1957년 설립한 학교가 계림중학교는 지금의 제천의 명문 사학중학교인 대제중학교이다. 정원태씨 동생은 당시 연희전문을 나온 인텔리였는데 학교 졸업후 고향에 돌아와 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형 정원태씨는 계림학원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정원태씨는 말년에 서울 인사동에서 지내셨다. 그의 아들이 홍익대 교수를 역임한 정선용씨이다.
7대조 할아버지(20세조) 평계공 정재형은 송강 정철의 8대손이다. 평계공 정재형은 정조 임인년에 출생하여 신해년 7월 10일 향년 70세로 작고하셨다. 묘소는 처음에는 전라남도 화순군 서면 온수동 임좌에 안장되어 있다가
1988년 무진년 2월 13일 충청북도 제천시 산곡동 돌봉 유좌에 이장하였다.
평계공 정재형은 사형제를 두었는데 정여, 정계, 정기, 정성이다.
매년 한식때면 충북 제천 산곡 돌봉에있는 정재형 할아버지 묘에서 후손들이 시제를 지낸다. 그 후손인 월림의 정수택, 월림의 정한택, 월림의 정태동, 춘천의 정면택(정태원), 서울의 정호택(정태식, 정태하), 서울의 정영택(정도환,정도진), 서울의 정운화(정순택, 정태일), 서울의 정위택 집안에서 돌아가면서 제사를 준비한다.
첫째 아들 정여 할아버지의 후손은 현재 월림에 사는 정수택 할아버지이고, 둘째 아들 정계 할아버지의 후손은 월림에 사는 정태동 아저씨이다. 네째아들 정성 할아버지의 후손은 제천에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퇴임하시고 상계동에 사시는 정운목 할아버지이다. 그 아들이 정위택, 정천택이다.
6대조 할아버지(21세조) 정기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정해명이다. 묘소는 제천 금성면 위림리에 있다. 이 분이 문절공 월림 종가집에 양가를 가신 큰 아버지인 정재찬을 따라 전남 창평에서 충북 제천으로 이거하신 것 같다. 따라서 우리 집안이 제천과 인연이 된 것은 이 분때 부터가 아닌가 추정한다.
5대조 할아버지(22세조) 정해명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월림에 있는 종가집 할아버지에게서 한학(漢學)을 배워 한문을 잘하셨다고 한다. 이때 한문을 가르쳐 주신 분이 정원태씨의 할아버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때만해도 월림 종가집 뒷쪽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평소 근면 성실하셔서 충북 제천 월림에서 산을 넘어 산곡(산으실)으로 들어와 터를 잡으신 분이다. 당대에 사백석이 넘는 부(富)를 이룩하셨는데 당시 산으실 일대가 대부분 이 분의 소유였다고 한다. 묘소는 태봉에 있다. 정해명 할아버지는 슬하에 정익원, 정승원 형제를 두었다.
4대조 고조 할아버지(23세조) 정익원 할아버지는 삼형제를 두었는데 정운국, 정운각, 정운복이다. 정익원 할아버지의 동생 정승원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분이 무주골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공릉동에 사시는 정운화 할아버지다.
큰증조할아버지인 정운국 할아버지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 분이 춘천에 사시는 정면택 할아버지이다. 정면택 할아버지 아들이 정태원이다.
증조할아버지인 정운각 할아버지는 면장 할아버지이다. 고향인 제천에서 한수면 부면장, 금성면 부면장, 백운면 면장 등을 지내셨다.
슬하에 4남매를 두셨는데 첫째가 정계택, 둘째가 정호택, 셋째가 정기택, 넷째가 정영택이다.
작은증조할아버지인 정운복 할아버지는 미국 워싱턴으로 이민가서 지금은 모두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이분이 미국에서 사는 정형택 할아버지이다.
친할아버지인 정호택 할아버지는 평생을 교육자로 사셨다.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제천 한수면에서 교편을 시작하셔서 청풍중학교, 충주중학교, 단양공업고등학교, 제천고등학교, 제천상고, 제천여고에서 후학을 가르치셨고 이후 충청북도 교육청 중등장학과 외국어 담당 장학사를 거쳐, 음성 감곡 중학교 교감, 괴산고등학교 교감을 지내셨다. 이후 제천동중학교 교장을 거쳐 제천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정녁퇴직을 하셨다.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첫째가 정태경 큰 고모, 둘째가 너희 아빠인 정태식, 셋째가 정태미 작은 고모, 넷째가 정태하 작은 아빠다.
작은할아버지인 정영택 할아버지 또한 평생을 교육자로 사셨다. 음악선생님 이셨는데 청주교대를 나와 제천 금성초등학교, 남당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 미아동에 있는 영훈초등학교로 올라오셨다. 그 후 영훈중학교, 영훈고등학교 등 서울 북부의 명문 사학재단인 영훈재단에서 교감, 교장을 거쳐 2009년 영훈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정년 퇴임하셨다. 당고모 정소영, 큰 당숙 정도환, 작은 당숙 정도진을 두었다. 정도환, 정도진이 너희 5촌 당숙 아저씨들이다.
정태식은 정원용, 정찬용 형제를 두었고 정태하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정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