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료는 대한 군정서 서일(徐一, 1881~1921)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고한 청산리전투 승전 보고서이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0일에 시작된 일본군의 독립군 ‘토벌’ 작전과 이로 인하여 근거지를 이도구와 삼도구로 옮긴 독립군과의 사이에 일어난 전투 전체를 말하며, 10월 21일의 백운평 전투와 완루구 전토, 10월 22일의 천수평 전투 및 어랑촌 전투, 10월 24일의 천보산 전투, 10월 25일의 고동하 전투가 이에 포함된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지만 근거지를 잃고 북쪽의 나자구와 밀산 등지로 독립군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이에 따라 연변 등지에서 일본군의 조선인 대학살(경신 참변)이 일어났다는 점 등을 같이 연결해서 봐야 한다. 그러므로 청산리 전투는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지방 토벌 작전이란 큰 맥락에 위치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의 3⋅1 운동과 파리의 강화 조약 및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 등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두만강⋅압록강 변에는 국내 진공을 위한 독립군의 연합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 대표적인 군사 활동이 1920년에 일어난 봉오동 전투이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제는 독립국 중국에 군사를 파견할 명분으로, 마적으로 하여금 일본 공사관 등을 습격하게 하는 이른바 훈춘 사건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서북⋅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다(간도 출병). 여기에 일본군과의 마찰을 두려워한 중국 관헌의 독립군 이동 요구와 맞물려 독립군 부대들은 화룡현의 삼도구와 이도구 등 험악한 삼림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청산리 전투는 사용자에 따라 몇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부른다. 첫째는 1920년 10월 21일 중국 길림성 삼도구 청산리 일대에서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의 북로 군정서군이 일본군을 맞아 싸운 전투만을 지칭하는 경우고, 둘째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길림성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일대에서 북로 군정서⋅대한 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광복단 등 독립군들이 일본군을 맞아 싸운 백운평 전투⋅완루구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만기구 전투⋅고동하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6일 간의 전투를 총칭하는 경우이다. 위 서일의 보고서에는 “화룡현⋅삼도구⋅청산리 또는 이도구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여”라고 되어 있음으로 두 번째 용례를 따른 것으로 보면 된다.
한편 1920년 전투가 1925년에야 〈독립신문〉에 실리게 된 경위는 복잡한데, 국내에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정간되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도 일제의 외교 공작으로 금지된 데 따른 영향이 컸다. 게다가 1920년 말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상하이 도착에 따라 격화된 임시 정부 안의 정쟁(개조파와 창조파) 등으로 인해 청산리 전투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라고 불린 서일이 직접 임시정부에 청산리대첩을 보고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은 서일총재이다
〈獨立新聞〉, 1925年 2月 25日
大韓軍政署總裁 徐一로부터 一月十五日 我大本營에 致한 報告에 依컨대 그 經過한 狀況이 左와 如하더라.
一. 戰鬪 前後 我軍의 情況
同署난 民國二年 二月 初붓터 士官鍊成所를 中領 汪淸十里坪의 森林中에 開하야 去九月九日에 第一回 畢業式을 行하고 (畢業生 二百九十八人)
一邊으로 步兵을 徵募하야 操練을 實施하더니 敵의 强硬한 交涉으로 因하야 中國陸軍의 出動이 至再至三하야 獨立軍의 解散을 催促함에 同軍隊난 不得已 營舍를 棄하고 各兵種으로 戰鬪序列을 作하야 南進하다.
和龍縣 三道溝 靑山里 又난 二道溝에셔 敵軍과 戰鬪를 開하야 多數한 敵의 將卒을 殺傷하고 多幸히 我軍은 死傷이 極小하엿다.
我軍은 猛烈한 戰鬪를 經過하고 將卒이 俱疲한 中 敵은 다시 汪淸 大荒溝及褶子溝에 駐屯하엿던 步, 騎 兩隊의 兵力를 撤하야 天寶山 以南으로 集中하먜 其勢가 方熾하다.
럼으로 我軍은 이에 數隊에 分하야 一隊난 戰鬪地 附近에 留下하야 戰場掃除와 敵狀搜索에 從事케 하고 或은 小路 或은 ○○○小路로 ○○를 經하야 ○○으로 向進하고 一隊난 晝伏夜行으로 ○○을 經하야 ○○○○○○○로 直達하나 時當天寒에 身不着綿하고 脚無重襪한 그 情境은 참으로 忍言키 難하엿다.
……(中略)……
我韓村落이 먜우 零星하야 能히 幾百軍의 衣粮도 供給할 수가 無한바 不得已 ○○方面으로 漸次 進行中이며 西北間島의 各軍團은 太半이나 此地에 集合되여 互相聯合으로 一致行動을 하게 되니(各團을 合하야 ○○○○人) 兵力의 稍大함과 軍心이 益固함은 足히 第二回 決戰의 望이 有하더라.
二. 靑山里와 泉水洞 附近 戰鬪狀況
此는 本報 第八十八號 第四面에 揭載한 戰鬪情報中에 在한 者와 大差가 업슴으로 今에 此를 省함.
三. 彼我의 死傷과 我軍의 戰利品
一 敵의 死傷者
死者 聯隊長 一人 大隊長 二人 其他 將校 以下 一千二百五十四人(敵의 自相擊殺者 五百餘人) 傷者 將校 以下 二百餘人
二 我軍의 死傷과 被虜
死亡 一人 傷痍 五人 捕虜 二人
三 我軍의 戰利品
機關銃 四挺, 小銃 五十三柄, 騎兵銃 三十一柄, 彈藥 五千發, 軍刀 五柄, 喇叭 二隻, 馬鞍 三十一座 軍用地圖 四部, 腕時計 四個 其他 被服, 帽子, 毛衣, 圖囊攜帶天幕, 軍隊手帖 等屬若干
四. 經戰將校
司令部司令官 金佐鎭
同參謀副長 羅中昭, 副官 朴寧熙
硏成隊長 李範奭, 同從軍將校 李敏華 金勳 白鍾烈, 韓建源
……(中略)……
五. 彼我의 勝敗理由
今次 戰鬪에 百般의 勝算을 有한 敵은 何로 因하야 反히 大敗를 招하엿스며 百般의 準備가 不足한 我軍은 能히 全勝을 得하엿난지 此를 略陳함.
敵의 失敗理由
一. 兵家의 最忌하는 輕敵의 行爲로 險谷長林을 別로 搜索도 無히 警戒도 無히 盲進하다가 恒常 一部 或은 全部의 陷沒을 當함이며
二. 局地戰術에 對한 經驗과 硏究가 不足하야 森林과 山地中에셔 種種의 自相衝突을 生함이며
三. 該軍人의 厭戰心과 避死逃生하는 㥘懦心은 極度에 達하야 軍紀가 紊亂하며 射法이 不精하야 一發의 効가 無한 射亂를 行할 뿐이더라
我軍의 全勝理由
一. 生命을 不顧하고 奮勇決鬪하는 獨立에 對한 軍人精神이 만져 敵의 志氣를 壓倒함이오.
二. 良好한 陣地를 先占하고 完全한 準備로 射擊性能을 極度 發揮함이오.
三. 應機隨變의 戰術과 銳敏 迅速한 活動이 모다 敵의 意表에 出함이라.
嗚呼라 三日間 戰鬪에 糧道가 俱絶되야 다만 五六塊의 甘諸로써 餓腸을 僅充하고 一日一夜에 能히 一百五十餘里의 險山密林을 通行하되 一毫도 奪氣함이 無하며 戰鬪 後에 또한 數千百里 森林長雪中을 通過하야 凍傷한 者―不少하되 半點의 怨悔가 無함은 참으로 獨立의 將來를 爲하야 希望한는 바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