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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8절-4편 8절.
3편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4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1절-8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셀라)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3편 8절: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구원은 원래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거다. 첫째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있었다. 구원의 시작과 근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살면서 죽고 사는 문제나 모든 질병과 고통을 통해서 이뤄나가는 구원이 있고, 평상시에 평온하게 살아가는 속에서도 깨닫고 이뤄가는 구원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닦은 신앙실력대로 천국을 누리는 구원이 있다. 이런 구원들이 있는데, 우리가 현실을 살면서 어려운 사건이나 환경 가운데 빠져 있을 때 거기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도 앞에서 말한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육신에 죽을병이 들었다거나 지독한 가난에 빠져 있다든지 할 때 누구의 도움이나 그 무엇의 도움을 얻어서 여기에서 헤어 나왔다면 거기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물론 그것도 구원은 구원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도 구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거기에서 끄집어 내주는 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다 임시성에 속한 구원들이요 육에 속한 구원들이다. 영적 신령한 면에서의 구원은 아니다.
이런 육에 속한 구원도 우리의 해석은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면이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통해서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건 없이 임시적인 목적으로 끝나는 것은 성경에서 어긋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거다. 이것을 돌려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또는 우리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일반세계에서의 임시적 육신적인 구원이 있는 거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일반적인 구원을 들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는 거고 알게 하시는 거다.
그리고 교훈적인 면으로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볼 때 비진리나 거짓복음이나 이단성이나 세상성적인 신앙에 빠져있을 때 진리신앙의 길을 가는 자가 그들에게 가서 깨달음을 줬을 때 이것도 구원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람을 신앙적으로 구원하는 면에서 절대 정확한 하나님의 본질의 것이라야 구원이 된다. 이질적인 것으로는 구원이 안 된다. 갑이라는 교회와 을이라는 교회의 교인들끼리 서로 ‘내 교회로 가자’ 할 때 두 교회의 교훈의 질이 같다면 이건 서로가 교인 쟁탈전이다. 그런데 갑이라는 교회의 성도는 이질적인 신앙을 가졌고, 을이라는 교회의 성도는 진리본질로 가고 있는데 을이라는 교회의 성도가 갑이라는 교회의 성도를 바로 깨닫게 해서 을이라는 교회로 데리고 왔다면 이건 교인 쟁탈전이 아니요, 이건 구원이다. 질적인 면에서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이런 걸 성경에서 얼마든지 확인을 할 수가 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인데 가는 길은 달랐다. 그리고 에서와 야곱은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인데도 가는 길이 달랐다. 또한 북조와 남조는 한 동족인데도 신앙의 질이 달랐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같은 성경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같이 부르는데 예수님의 길의 노선과 바리새인들의 길의 노선이 달랐다.
예수님께서 신앙의 질이 다른 바리새인들에게 진노의 채찍을 때리는 것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이질적인 신앙임을 알 수가 있으니 우리도 이질로 나가는 다른 교인을 깨닫게 하고 설득을 해서 바른 길을 가게 했다면 이거는 구원의 길로 가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의 사고방식이 ‘교회에 다니면 너나 나나 다 같겠거니’ 하고 있고, ‘교회에 다니니 우리와 같겠거니’ 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같은 게 아니다. 신앙의 질이 다르다.
우리가 비진리적 이질적 요소로 가는 그들을 바로 깨닫게 해서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넓은 길로 가는 것을 좁은 길 생명 길로 가게 했다면 이게 구원이다. 이게 다른 교회의 교인을 뺏어온 거냐? 아니다.
구원을 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 그래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렇게 말이 돼 나오는 거다. 구원의 출처는 하나님이다. 교훈적인 면으로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 신앙 사상적인 면으로 땅의 사상을 천국사상으로 바꿔놓는 것, 이 모든 것이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해도 그 교훈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교훈을 듣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도와줘서 거기에서 올라오게 하는 것도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그 구원을 맞을 보기도 한다. 크고 작은 사건 환경 안에 다 구원이 들어있다. 그리고 진리신앙의 노선을 걸어가는 자들로부터 그 어떤 도움이 왔던 그것은 다 구원에 속하는 거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깨달을 수 있는 재료가 다 들어있다. 우리는 이 구원을 줄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주의 백성은 주의 복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주의 복이 무엇이냐? 성경이 이방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먹고 입고 마시고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누리면서 행복적으로 사는 이 복을 말하는 것이냐, 신령한 하나님의 것을 말하는 것이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것을 받는 이게 복이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하는 것은 첫째는 꼭 그 복이라야 만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지식성, 하나님의 도덕성, 하나님의 능력성의 이 복을 안 받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면에서 물질적인 것은 덤으로 따라오도록 되어있다. 덤을 가지고 참 복처럼 말을 하면 복의 순서가 바꿔졌기 때문에 믿음이 들지를 않는다. 성경해석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주의 복은 주의 백성에게 내려지는 건데, 이 말씀을 하는 것을 보면 이방 불신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먹고 마시는 것은 주께서 주시려는 복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면 그건 뭐냐? 이방인들이 먹고 마시는 복이 들판의 짐승들에게는 없는 거냐? 그런 복은 짐승들도 다 받는다. 사실 알고 보면 이런 일반적인 은총, 일반의 복도 하늘로부터 내려오지 않으면 못 받는 거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줏는 거다. 비가 오지 않고 햇볕만 내리쬐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짐승과 이방인들에게 왜 일반적인 복을 주는 거냐? 그것은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그런 복을 주고 있는 거다. 알고 보면 신실한 성도들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그 복을 받고 있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천국에 올라가면 그들에게 그런 복이 있느냐? 다 불에 태워버린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덕을 보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고 미워하지 말고 예수 믿는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그래야 그런 것도 부가 조금 더 있는 거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런 면에 긍지를 가져라. 그들이 볼 때는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아니냐?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주의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구속의 공로를 입은 백성들이다. 구속을 입은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고 사는 백성들이다. 이 성도들에게 땅에 속한 복은 덤이요, 땅의 것을 이용하여 주님이 주시는 신령한 하늘의 복을 더 받아 가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주님의 백성이라면서 주님의 복을 안 받겠다고 한다거나 또는 모르고 산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런 앙화가 없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복을 못 받고 살았다면 그처럼 처절하고 불쌍한 사람이 없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일단 하나님의 자녀라, 하나님이 백성이라고 보는 건데 하늘로부터 오는 복을 못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건 앙화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물질의 복만 취하여 살다가 현세에서 주의 복을 전혀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고 죽음의 선을 넘는다면 얼마나 원통할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본문을 통해서 이런 신앙의 정신을 알까?
주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주의 복을 충만히 잘 받다가 그 날에 가서 주님과 제일 가깝게 앉아서 주님과 같이 누린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렇게 하라고 주님께서 교회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게 아닌 전혀 다른 길로 나가고, 전혀 다른 짓들을 하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큰 앙화냐?
우리 마음 같으면 정말 진리본질의 신앙이 아닌 비진리적으로 예수를 믿을 바에야 그건 아예 때려치우는 게 나을 것 같다. 시간 들이고 노력 들이고 물질 들이고 하고서도 하늘의 복도 못 받는다면 이게 뭐냐? 이렇게 되면 땅의 거짓 종들로부터 뜯기는 것밖에 없는 거다. 그러니까 뜯길 바에야 차라리 안 가는 게 낫겠다 그 말이다.
가령 우리교회가 해체가 됐다고 한다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아무 교회로나 나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질적인 교회로 나가게 된다면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느냐? 성경에 이리가 양의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조직화 된 교회에서 되어지는 일을 말하는 거다. 그래서 이리 같은 목사에게 가면 그 교인은 뜯기는 거다. 일반적으로 충성봉사를 하라고 하는 것도 뜯기는 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기간이 있는 것이니 이 기간 동안에 생명성으로 자라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느라고 이 면이 하나도 되지 못하면 자꾸 잡아 뜯기는 거다. 이건 사람이 망한 거다.
진리본질의 신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느냐? 진리신앙의 귀중성이 자기에게 있어서 ‘지옥. 천국’ 그런 의미보다도 모든 면에서 고차원적인 면으로 올라가는 그 구원의 가치를 알겠느냐? 일반세상에서도 자기 자식이 선생을 잘 만나면 자식에게 길이 잘 열린다. 그런데 실력 없는 선생을 만난다면 자식의 길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다. 그래서 성경에서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거다.
우리는 이미 얻은 구원이 있고, 또한 지금 구원을 얻어야 한다. 즉 자꾸 이뤄나갈 구원이 있다. 구원을 잘 이뤄가서 앞으로 나가고, 진보 발전을 하고, 예수 믿는 두뇌가 하루 하루 개발이 되고, 생활면에서 안전하게 놓여지고, 연관적으로 다른 사람과 잘 연관이 돼서 신령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이게 얼마나 좋으냐? 자기 행복이 거기에 다 들어있는 거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게 일반사람들처럼 그런 머리를 가지고 살면 안 된다.
4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우리가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시가 73편이 있고, 솔로몬의 시가 2편이 있고, 아삽의 시가 12편이 있고, 고라자손의 시가 11편이 있고, 또 헤만의 시가 있고, 모세의 시가 1편이 있고, 에담의 시가 1편이 있다. 시편 150편 중에 100편은 저자들이 있는데 50편은 저자를 모른다.
시편의 내용들을 보면 찬양, 민족적인 애가, 또 개인적인 애가, 감사, 왕의 시 등등이 있고, 신앙 사상적으로 더듬어 보면 하나님, 또는 죄악, 구원을 말하고 있다.
‘시’라는 게 무엇이냐? 인간이 나그네 세상에 살면서 세상만사를 보고 듣고 만지고 배우고 경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것을 희로애락으로 마음속에 담긴 것을 글로써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인들, 특히 예수 믿는 장애인 시인들이 많던데, 장애인 시인들이 써놓은 것을 보면 맨 자기 감정 속에서 나온 게 많다. 이방인들의 시는 세상에 속한 거다. 자연에 속한 거다. 인간사에 속하는 거다. 그런데 성도들의 시는 그 뜻이 신령천국에 속해있다.
사람은 무엇이 자기 속에 들었던 자기 속에 들어있는 대로 밖으로 나오게 돼 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면 자기 속에 항상 좋은 것을 채워놔야 한다. 일반적으로도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자기 속에 일반적인 것만 채워놓으면 일반적인 사람밖에 안 된다. 우리는 진리이치의 좋은 것, 보석 같은 그걸 가득 채워놔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만날 때 그 보석을 줄 수가 있는 거다.
사람이 물질성을 먹으면 뒤로 나오고, 정신성은 입으로 통해서 나오게 돼 있다. 따라서 인간이 시적인 감성이 풍부해지려면 많은 사건을 만나며 진하게 느끼고 많은 깨달음을 받아야 한다. 기독자들은 어떤 사건을 만나면 진하게 깨달을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을 갖는 것이 얕으면 사람이 깨달음이 없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내리막길이 있고 오르막길이 있고, 평탄한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다. 우리가 이런 길을 늘상 다니고 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그렇다. 이게 전부 인생의 한 과정이다. 인생길은 항상 넓고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좁아지기도 하고, 오르막길도 있고, 때로는 길도 없이 막 헤쳐 나가야 할 경우도 있다. 우리는 그런 데서 느껴야 한다. 지혜지식적인 면에서도 느끼고, 모든 면에서 느껴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갖은 고생을 겪었는데도 속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건 헛고생이다. 고생을 한 보람이 없다. 배운 보람이 없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으냐?
시편 150편의 총 집합적인 신앙사상이 제 1편 속에 다 들어있다. 악인의 꾀가 나오는데, 선악과 따먹은 일반세상의 차원에서 보는 사회 윤리 도덕적인 악인이 있고, 그리고 그 일을 저지르는 악인의 꾀가 있고, 또한 영의 눈을 가지고 신앙사상 면에서 보는 악인의 꾀가 있다. 그러니까 성경을 가지고 비진리 세상적 육적으로 가르치는 수단 방법들이 있다. 일반세상은 행동을 저지르기 위한 악인의 꾀가 있고, 신앙으로 보면 비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을 망하게 만드는 악인의 꾀가 있다. 하나는 활동이 되겠고, 하나는 교훈이 되는 거다.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으로 가르치는 악인의 꾀에 걸려들면 자기 일생이 다 사기 당한다. 영원한 것이 다 사기 당한다. 세상 사기꾼에게는 평생 모은 걸 다 사기 당하고, 신앙 종교적 사기꾼에게 당하면 영원한 것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영적인 면에 사기를 당해놓으면 임시적 세상에 사는 것도 얼마나 고달픈지 모른다. 사람이 진리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사는 면에도 그 영향력이 미쳐 들어간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안 믿는 사람은 그림자와 같다. 이렇게 사는 건 실상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다. 물론 옳은 교회도 있겠지만 많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리떼들에게 먹히고 있다. 영적인 면에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전부가 먹혀 들어가고 있는 거다.
그리고 1편에 죄인의 길이 있다. 선악과 따먹은 일반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은 죄인이 길이요, 넓은 길이다. 넓은 길은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가는 길이다. 이건 전부가 죄인의 길이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이 나오는데,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주면서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형통은 크고 작은 어떤 사건 환경에서도 이룰구원을 중단 없이 이뤄나가는 사람이 만사형통의 사람이다.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했는데,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입은 것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악인이요, 이 사람은 망하는 거다.
3편을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고 했다. 그러니까 2편에서는 온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허사를 경영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을 하더니 3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대적을 하고 일어나더라.
그래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서 피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아들에게 죽을까봐 피하는 거냐, 육신의 아들을 안 죽이려고 피하는 거냐, 아들이 왕 노릇 잘 해 먹으라고 피하는 거냐, 아들 속에 들어있는 그 사상과 합세가 안 되려고 피하는 거냐? 어느 거냐? 아들 속에 들어있는 육적인 사상과 합세를 안 하려고 피한 거다.
이 말의 의미가 뭐냐? 아무리 육신 혈통적으로 자기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아들의 신앙정신 사상이 옛사람이 주격이 된 인본주의요 세상주의라고 한다면 다윗이 하나님의 옳음과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접어두고 아들의 그것과 합세하고 손을 잡으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피한 거다. 아들을 피하지 않고 그것과 손을 잡으면 다윗은 누구와 대적이 되겠느냐?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 그래서 달아나야 한다. 안 그러면 아들을 죽여야 한다.
사람은 그 신앙사상이 어느 쪽에 서서 일을 이렇게 하기도 하고 저렇게 하기도 하는 거다. 하나님은 사람의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된 그 사람의 동기를 보신다. 일반사람들은 이걸 잘 모른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간혹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형제끼리나 부부끼리나 친구들끼리나 교인들끼리나 말을 할 때는 각자가 생각의 뿌리가 있는 것이니 믿는 우리는 늘 영원 궁극적인 구원에 박혀서 말이 돼 나와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영원 궁극적인 구원 면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고 있다.
상황을 봐서 상황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과,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는 사람과는 의견충돌이 있을 수가 있다. 이런 거는 경험을 안 하면 모르는 거다. 이럴 때는 서로가 대화를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아, 그런 목적으로 그 말을 했구나’ 하게 되고, 상대가 영원 궁극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말이라면 용서가 되는 거고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거다.
그리고 영원 궁극적인 구원의 생각에 소원을 두고 말을 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말을 한 그 사람을 깨닫게 해서 용서를 해줘야 한다. 그러지를 않고 부딪히면 어떻게 할 거냐? ‘너 죽고 나 죽자’ 할 거냐? 그래서는 안 된다.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도 지혜롭게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하기 전에 듣는 사람의 입장의 차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
아버지도 이스라엘이고 아들도 이스라엘인데, 같은 이스라엘이 육신 대 육신으로 싸우면 되겠느냐? 아버지가 아들의 사상과 하나가 될 수 없고, 또 아버지가 아들의 비진리적 인본주의 통치를 잘되라고 도와줄 수도 없는 거다. 그러니 아버지가 아들을 피할 수밖에 없는 거다. 다윗이 피하는 그 마음은 ‘아들이 어떻게 되던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어서이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과는 다른 거다.
택한 선민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누가 세우는 거냐? 하나님께서 세우는 거다. 인본주의적으로 세우는 게 아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들을 세우는 것도 성경을 염두에 두고 세워야 한다. 그런데 보통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 또는 교회의 인도자 등을 세울 때 인본주의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 위에 세상성의 왕을 세워놓으니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더냐? 하나님의 심판에 녹아난다. 이스라엘 집안이 쑥밭이 되더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왕을 세우는 거다. 그러니까 거룩과 진리로써 세워지는 왕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 그 왕으로 통해서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거다. 그래서 교회의 참 옳은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한다. 하나님의 소원 목적에 관한 것을 펼쳐야 한다. 하나님의 소원성이 커져 나가도록 해야지 목사 자기의 밥그릇 채우기 그런 거는 용납이 안 되는 거다.
이스라엘은 거룩과 진실로 그 생명권 안에서 통치가 될 때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져 나간다. 이 일을 하는 왕이 평강과 의의 왕이다. 평강은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의 첫 인사가 뭐냐?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런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옳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진다.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들의 소원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인본주의 왕들은 어떤 복을 받기를 원하겠느냐? 세상 복, 세상에서 생산이 되는 것.
신정정치의 통치자는 진리가 없이, 선지자가 없이, 제사장이 없이, 하나님이 없이 인간 다수결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신정통치를 하는 아비 다윗에게 와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 받고자 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해서 자기를 따르게 하여 큰 무리를 만들어서 자기가 왕이 됐다.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자칭 왕이라. 그러니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아무리 신학교를 졸업을 했어도, 세계적인 부흥강사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인본주의로 가르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 아니다. 땅에서 세운 거다. 땅에서 보내서 온 거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도자가 될 수 없다.
압살롬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자기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이 압살롬은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아멘으로 따르는 정신 사상이 아니라서 압살롬은 하나님과 대적이 돼 있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적이 된 그것을 무시하고 만일 다윗이 아버지로서 아들 압살롬을 키워줬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게 된다면 다윗 역시 하나님과 대적자가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와 대적이 되느냐? 누가 누구의 대적이냐?’ 하는 걸 잘 알아야 한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맨발로 울면서 강을 건너면서 이 4편의 시를 썼는데 어떻게 이런 시가 나올 수가 있을까? 다윗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냥 하나님께 ‘도와주옵소서’ 이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보석처럼 들어있는 다윗의 신앙심성이 다윗의 입으로 통해서 아름다운 시가 되어서 나오는 거다. 우리의 구원이 들어있는 시가 나오는 거다. 구원이치가 들어있는 시가 나온다. 참 아름다운 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