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춘파공(관식)의 유서]
ㅁ 春坡公(瓘植) 遺書(앞에서 이어서)
■ 三槐亭記 (삼괴정기)
天風山一支脈逶迆東廻爲古懷州懷州卽吾初祖受封之地也州之南有三槐勝國名妓明月之所植也故以女妓名亭大可十抱小可八九抱根如盤龍枝可翳雲閱風霜十百餘年不爲風雨所拔不爲斧斤侵伐者以其老大骯髒也又盤石周于四隅者以十數計大可坐十餘人小可坐六七人樹則人力也石則造物者必好怪而磨置之非人力之所可髣髴也雖酷炎鏖人枕石坐陰則竽籟鳴樹骨髓生冷爽氣盈袖心神明朗飄然有登閬風氣味頓非鹿世物態也冠山之奇巖異石臥雲流嵐前供奇玩金湖之風帆水鳥明沙紅蓼遙開畵圖且四隣之橘柚檜柏杞梓花竹蔚然成帳者與目謀焉眞南服之絶勝也先父老每歲春夏常設鄕飮鄕射于斯亭其揖讓之儀觀德之容秩秩有序後死者至今倣而行焉昔柳柳州述鈷鉧潭記曰以玆邱之勝致之豐鎬之間則貴遊之士爭買者增千金而愈不得今斯亭不在於靑雲洛社之間而天慳於荒閑寂寞之濱爲吾家世有眞奇遇也相傳故老一千載之間只以女妓爲稱而未得嘉號矣何幸淵齋先生今暮春者作冠山行枉登斯亭指三槐而稱賞曰斯亭之有三槐正與王氏之三槐相似以三槐名亭則安知魏氏之門亦將有三公乎噫余其時以先事作遠外行雖未陪登其後越幾日拜揖淸芬若承咳於樹石精采之閒卽謀諸宗族伐石刻之曰三槐亭斯亭之破荒難容言喩而程夫子之心中無妓先生實當之豈不欽歎哉夫名之稱因人而益彰蘭亭也不遭右軍則未免蕪沒於空山矣況大人君子之肇錫乎昔老峯三淵兩先生曾過冠山斯亭寥寥無聞前無指路不登斯亭而然歟留待今日而然歟吾宗之登斯亭者顧此亭名世修王氏家德則三公雖不可必而庶不負先生之賜矣勉之哉
〈해설〉 천풍산(天風山) 한 자락의 산맥이 구불구불②하며 동쪽으로 돌아오면서 회주(懷州)③고을 이루니 회주는 곧 나의 초조(시조)가 처음 봉군(封君)을 받은 지역이다. 이 회주의 남쪽에는 세 그루의 홰나무가 있으니 고려 때 명기(名妓) 명월(明月)이가 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女妓)라는 정(홰나무)의 이름을 붙여진 것이다.
그 중에 큰 것은 열 아름쯤 되고, 작은 것은 8~9 아름쯤 되며 뿌리는 (몸을) 사리고 있는 용(龍)과 같고, 가지는 구름을 가릴 만하며 풍상(風霜)을 천년을 넘게 지나왔어도 비바람에 뽑히지 아니하고 큰 도끼와 작은 도끼에도 침벌(侵伐)을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늙고 거대(巨大)한 몸이 비대함④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각주)
② 逶迆: 구불구불 가는 모양
③ 懷州: 장흥(長興)고호
④ 休戚: 기쁨과 근심걱정 (희우(喜憂))
또 반석(盤石)이 사방 모퉁이에 둘려있는 것이 여 나무 개쯤 된다. 큰 것(반석)은 십여 명이 앉을 만하고 작은 것은 6~7명이 앉을 만한 하다. 대나무만큼은 인력(人力)으로 심은 것이지만 바위는 필연코 조물주(造物主)가 기교 부리기를 좋아하여 다듬어 둔 것 같아서 인력으로는 그처럼 비슷⑤하게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비록 혹염(酷炎)이 사람을 모두 다 죽게⑥ 한다 하더라도 이 바위를 베개 삼거나 그늘에 앉아 있으면 바람소리⑦ 나무위에 울고 시원한 냉기가 골수에 사무치며 상쾌한 기가 옷소매에 가득 들며 심신(心神)이 밝아지고 가볍게 날아서 신선이 있는 낭풍(閬風)⑧산 위를 오른 것 같으며 그 정취가 온통 속세의 물태(物態)와 같지 않다고 여겨진다.
관산의 기암괴석위에 와운(臥雲)과 떠도는 안개⑨는 전부터 갖추어진 기이한 조물주의 장난감이요, 금호(金湖)의 풍범(風帆)과 물새들이며 밝은 백사장에 붉은 여뀟대⑩는 멀리 도화(圖畵)를 펼쳐 놓은 듯하다. 또 근처에는 귤나무와 유자․노송․동백․소태․가래⑪ 꽃과 대숲이 울창하여 안목과 생각을 이끌게 하니 참으로 남복(남도)의 명승지라고 할 만하다.
옛날 부로(父老)들은 해마다 봄과 여름철이 되면 언제나 온 고을 유생들을 여기에 모이게 하고 향음례(鄕飮禮)⑫와 향사례(鄕射禮)⑬를 이 정(三槐亭)에서 실시했다고 하며 거기에서 읍(揖)을 치고 사양하는 의식과 덕(德)을 살피는 거동이 질서정연⑭하고 차서가 있었다고 한다. 후사자(後死者)들도 이를 본받고 모방하여 시행하였다고 한다.
옛날 당나라 때 유유주(柳柳州)⑮는 고무담기(鈷鉧潭記)(16)를 쓰면서 여기에 있는 언덕과 산세와 명승이 만약에 풍호(豐鎬)(17)의 사이에 있었다면 귀족들과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사게 될 것이며 천금을 더 주고도 더 얻지 못 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이 정(亭)도 청운(靑雲)이나 낙사(洛社)(18)의 사이에 있지 아니하고 파묻혀 세상에 드러내지 아니하며(19) 황량하고 한적(20)하며 적막(寂寞)한 물가 천장지비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집안 대대로 소유물처럼 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⑤ 髣髴: 서로 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려운 모양. 보아 잘 알 수 없는 모양
⑥ 鏖人: 사람을 모두 다 죽임(오살할오)
⑦ 竽籟(竽籟): 피리 (바람소리)
⑧ 閬風: 산이름. 중국 곤륜산 위에 있는 신선이 사는 곳
⑨ 流嵐: 떠도는 안개
⑩ 紅蓼: 붉은 여뀟대
⑪ 杞梓: 소태나무와 가래나무
⑫ 鄕飮: 온 고을 유생이 모여 향약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
⑬ 鄕射: 시골 한량이 모여 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룸. 보통 주향(酒饗)과 함께 함
⑭ 秩秩) 질서가 정연한 모양. 정숙하고 근신한 모양
⑮ 柳柳州: 당나라 柳宗元의 호.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유주자사를 지냈으므로 이름
(16) 鈷鉧潭: 당나라 유종원이 지은 기문(鈷鉧:다리미)
(17) 豐鎬: 주나라 무왕이 도읍한 서울. 지금의 섬서성 서안부의 일부
(18) 洛社: 중국 낙양(洛陽)을 가리켜 하는 말. 곧 서울이라는 뜻
(19) 天慳地秘: 파묻혀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함
(20) 荒閑) 황한 공한지
옛 고로(古老)들이 서로 언전한 말에 의하면 일천년을 지나온 사이에 단지 여기(女妓)라는 이름으로만 지칭되어 왔고 달리 좋은 가호(嘉號)①를 얻지 못하다가 다행하게도 연재(淵齋)선생이 금년 모춘(暮春)에 여기 관산을 다녀가면서 이 정에 올라와서 보고 삼괴(三槐)를 가리키며 칭상(稱賞)하기를 이 정에 삼괴(三槐)가 있는 것은 아마 중국 왕씨(王氏)집에 있던 삼괴(三槐)와 서로 비슷하다면서 이 정의 이름을 삼괴(三槐)라고 하면 어찌 위씨(魏氏)의 가문에도 장차 삼공(三公)②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나는 그 때 선대의 일로 멀리 외출을 갔었음으로 비록 연재선생을 모시고 정에 올라가 놀지는 못했지만 그 후 며칠이 지나서 그가 다녀간 청분(淸芬:깨끗한덕)에 경의를 표하였으며③ 수석(樹石)이 광휘를 발하는 정채(精采)④의 사이에서 교훈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즉시 제종(諸宗)들과 계획을 세우고 돌을 다듬어 각(刻)을 하고 이르기를 삼괴정(三槐亭)이라고 하니 이 정(亭)이 황량(荒凉)⑤한 위치를 모면하게 되었음을 무어라고 비유하기 어렵다. 그러하기에 정부자(程顥))가 말하기를 나의 심중(心中)에 기생(妓生)따위는 두고 있지 않다고 했는데 (淵齋)선생이 실제로 거기에 해당된 분이라고 여겨지며 어찌 흠모(欽慕)하고 감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이름을 지어서 지칭하는 것도 사람으로 인해서 더욱 현창된다고 여겨진다. 중국 절강성 소흥현 서남쪽에 있던 난정(蘭亭)⑥도 왕우군(王右軍:왕휘지)을 만나지 못했다면 빈산에 잡초가 우거져⑦ 있음을 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대인군자가 모처럼 지어준 이름⑧이라면 어쩌겠는가? 옛날 노봉(1628~1692))⑨이나 삼연(三淵․1653~1722)⑩ 양 선생이 일찍이 관산을 지났던 일이 있었는데 이 정이 적적⑪하여 들은 바 없고 길을 인도하는 이도 없었기에 이 정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 하기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머물 수 있도록 대접하여야 하고, 오종(吾宗)들도 이 정자에 올라 정자의 이름을 돌아보고 왕씨(王氏)의 가덕(家德)처럼 대대로 닦는다고 하면 비록 삼공(三公)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연재)선생이 주신 이름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힘쓸지어다.
(각주)
① 嘉號: 아름다운 칭호
② 三公: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③ 警咳: 웃사람에게 뵙기를 청할 때 자기가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하는 기침. 인기척 내는 헛기침
④ 精采: 광휘를 발랄한 기상
⑤ 破荒: 무너지고 황폐함
⑥ 蘭亭: 진(晋)나라 목제(穆帝)때 영화구년 3월3일 당시의 명사41명이 난정에 모여서 곡수에 잔을 띄워 계 잔치를 베풀며 시를 지어 읊은 모임
⑦ 蕪沒: 잡초가 우거져 덮임
⑧ 肇錫: 처음으로 준 이름
⑨ 老峯閔鼎重: 1628(인조6)~1692(숙종18)조선의 정치가 시호는 문충. 본관은 여흥·광훈의 아들로 서인(西人) 尤庵 宋時烈, 東春 宋浚吉에게 배웠다. 1647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652년에는 호남어사를 지내고 예송논쟁으로 1675년에는 남인에게 밀려 장흥에서 5년간 귀양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장흥에서 적거생활을 할 때 천관산을 몇 차례 들러보았다고 한다.
⑩ 三淵金昌翕: 1653(효종4)~1722(경종2) 때의 학자 시호는 문강.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
⑪ 寥寥: 텅 비고 넓은 모양. 적막한 모양
(144-092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91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91일차에도 '춘파공(관식)의 유서'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 무곡
삼괴는 '세그루의 회화나무'라는 뜻이지만, 삼공을 달리 지칭하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이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는 중국의 주나라와 관계되는 용어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삼괴 = 삼공)/ 무곡
춘파공의 수려한 필체가 중국고서와 우리 씨족의 미래를 잘 조화시킨 걸작으로 귀결됩니다. 종합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시공을 뛰어넘는 지식인이셨네요./ 벽천
방촌마을의 대표적인 사장나무(느티나무)다..
이곳은 새터(新基)마을 입구에 있고 고려 회주목(懷州牧)때 名妓 명월과 옥경이 3그루를 심었다고 傳해 내려오고 있다..현재 1그루만 남아 수령이 700~800년 가량 되어 전라남도 保護樹로 지정 되어 있고 조선 성종때 노사신(盧思愼) 등이 撰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또한 이곳을 삼괴정(三槐亭)이라고 하며 나무 아래 돌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로 5~10기가 있어 더운 여름철에 낮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고 선조들께서는 술잔을 기울이면서 득량만 바다와 완도 금당도를 바라보면서 수창(酬唱) 풍류를 즐겨 방촌팔경중 제8경에 해당 이를 금당귀범(金塘歸帆)이라고 한다.
(출처 장흥위씨밴드)
¤ 바위에 각자된 글자 판독
'三槐亭' 대자 글씨 왼쪽에 흐릿하게 '淵齋宋先生 命名 戊戌 三月 二十 一日'라고
무술년은 1898년으로 연재가 '삼괴정'이라 명명, 이를 1898년 3월에 각을 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삼괴정을 명명한 내용이 삼괴정기에서 상세하게 나오는 군요.
느티나무 아래의 거대한 바위에 각자된 글씨를 보니까 연재(淵齋)글씨체는 아닌 듯합니다. 연재 글씨였으면 그 가치가 굉장히 컷을 것입니다. 아쉽습니다.
무술년이면 연재선생 62세었습니다. 천관산을 유람하고 관산읍내 쌍송정을 거쳐 방촌에 온 노정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