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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특집)
루이스 그릭: 친숙한 듯 결이 다른 서정의 내연(內燃)
양균원 (시인, 대진대 영문과 교수)
I. 루이스 그릭은 누구인가
2020년도 노벨문학상의 영예는 미국의 여성 시인 루이스 그릭(Louise Glück)에게 돌아갔다. 선정위원회는 그릭이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개별적 존재를 보편적으로 만들어주는 명백한 시적 목소리”(for her unmistakable poetic voice that with austere beauty makes individual existence universal)를 지녔다고 높이 평가했다.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잘 알려진 시인이다. 1943년 뉴욕 태생으로 롱아일랜드에서 성장했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했지만 장기간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졸업하지는 않았다. 1993년에 시집 『야생 붓꽃』(The Wild Iris)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2014년에 『충직하고 고결한 밤』(Faithful and Virtuous Night)으로 전미도서상을 획득하는 등 다수의 시문학상과 장려금을 받았다. 1999년 미국시인협회 의장단에 참여하였고 2003년 미국 계관시인이 되었다. 스탠포드 대학과 보스턴 대학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예일 대학 체류 작가로서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에 거주하고 있다.
지상의 유수한 작가들 중에서 왜 그릭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가,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모아진다. 지속적으로 독자와 출판계의 주목을 받아온 게 사실이지만 오늘날 미국 내 생존 시인들 중에서 그녀가 단연 월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릭은 노벨상을 탈만 하지만 그 정도 역량을 지닌 시인들이 미국에 그리고 세계 도처에 한둘이 아닐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에서 최근 여러 잡음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면서 선택이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릭의 시는 서정성과 투명성이 뛰어나다. 개인적 고통을 쉬운 언어로 고백하듯이 말하고 있어서 코로나 사태로 심신이 지친 인류에게 위안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엘리엇이나 파운드와 같은 모더니스트 시인들과는 사뭇 달라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 미국시의 경향을 보면 서정시와 실험시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 두 영역이 따라 존재하기보다 서로 배우고 흡수하면서 그 접면이 상당히 넓어져 있다. 언어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실험들이 주목 받는 풍토에서 그릭의 시는 전통적 서정시의 영역에 머무는 듯하다. 수상자 선정에서 이것 때문에 제외될 수도 있고 이것 때문에 선호될 수도 있다. 그릭은 상실이나 고립과 같이 친숙한 시적 제재를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듯 표현하고 있다. 요컨대 그릭은 대중성에서 뛰어나다. 올해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는 그릭의 서정성과 투명성을 다른 자질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의 노벨문학상을 밥 딜런이 수상했던 이면에도 대중성의 요소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나 비평계에서 높이 치는 작품과 대중이 환호하는 작품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노벨문학상 선정은 소수의 고급 독자보다 다수의 보통 독자에게 다가가는 작품을 선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릭은 어떻게 노벨문학상에 어울리는가? 수상자 선정에는 정치적 고려와 가변적 척도가 언제든 개입될 수 있다. 그릭 또한 모종의 기준에 따라 선택된 것이어서 다른 기준에서 보면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그래서 이 짧은 글에서는 기준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보다 정해진 기준을 존중하면서 그 가치를 살피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대중성과 투명성만 놓고 보자면 그릭 외에도 역량 있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뛰어난 다른 시인들 사이에서 그릭은 과연 노벨문학상에 값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아래에 오는 세 편의 시들을 통해서 찾아보려 한다.
II. 목소리는 어디서 오는가
신경증 치료를 위해 오랫동안 심리 상담을 받았고 이로 인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지만 둘 다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이 경험에서 정신분석학자의 시선으로 자아를 대하는 법을 배웠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자아의 중심을 부정하면서 그 아무 것도 없음 혹은 아님의 상태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낼까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여전히 서정적이고 투명하다.
서정시는 흔히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목소리를 낸다. 시인은 자신의 정신에 모종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 힘에 의존하여 세상을 정돈하는 언어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릭은 그러한 정신이 만들어내는 진리를 부정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자세를 취한다. 그녀가 천명하는 자아의 부재는 세상의 잣대에 의지하는 자아의 거부를 뜻한다. 그래서 자아의 부재는 불확실한 진리를 찾아가는 고립무원의 자아를 발전시킨다. 이것이 서정적이고 투명하며 간결하고 쉬운 언어로 제시된다. 개인적인 소재를 고백적으로 다루는 듯하지만 그것을 무대에 올리고 극화하여 객관화한다.
우리 주변의 서정시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시들이 유아론적 심연에 빠져 있는가? 얼마나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면서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는가? 시집 『야생 붓꽃』에서는 다양한 식물들이 다채로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것은 얼핏 서정시에 만연하는 감정이입의 방식처럼 비칠 수 있고 그 목소리들이 결국은 시인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릭의 탈(脫)자기중심적 목소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세상을 탐색하게 하는 의도적 장치에서 전통적 서정시의 목소리와 사뭇 다르다. 친숙한 듯 결이 다른 서정이 속에서 연소되고 있다.
II-1. 「실러」(“Scilla”)
내가 아니야, 멍청아, 자아가 아니라 우리라니까, 우리는―물결인 거야
천국에 대한 어느 비판을 닮은
푸른 하늘빛 물결이지
한 가지가 된다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시절에, 어이하여
너희는 자신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기니?
어이하여 위를 올려다보는 거니? 신의 목소리 같은
메아리 소리를 듣기 위해? 너희는 우리에게 한결같아,
고독하고, 우리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어리석은
삶을 기획하고 있지.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너희는
보내지는 곳으로
바람이 심어주는 곳으로 가지,
너희 중 이런 혹은 저런 이는 아주 오래
내려다보다가, 물의 어느
표상을 보면서, 뭔가 듣고 있지, 그게 뭐냐고? 물결소리야,
그 물결 위, 새들의 노랫소리야.
Not I, you idiot, not self, but we, we―waves
of sky blue like
a critique of heaven: why
do you treasure your voice
when to be one thing
is to be next to nothing?
Why do you look up? To hear
an echo like the voice
of god? You are all the same to us,
solitary, standing above us, planning
your silly lives: you go
where you are sent, like all things,
where the wind plants you,
one or another of you forever
looking down and seeing some image
of water, and hearing what? Waves
and over waves, birds singing. (p. 14)
“실러”는 무릇 속의 식물로서 무리지어 자란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무릇은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초가을에 잎 사이에서 꽃줄기가 나와 엷은 자주색 꽃이 총상화서(總狀花序)로 핀다. 아시아 동북부의 온대에서 아열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시의 제목을 무릇으로 옮기지 않은 것은 시의 핵심 제재인 “실러”가 유럽이나 미 대륙에 서식하면서 모양과 색깔 등에서 우리 것과 다른 양상을 띨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첫 행에서 화자는 격한 호흡 속에 청자를 “멍청아”(you idiot)라고까지 불러대면서 할 말을 한다. 그 할 말이 내뱉듯 던져지고 있어 독자의 관심을 잡아당긴다. 화자가 다짜고짜 내세우는 것은 “우리”의 다수성이다. 자기의 중심을 지키는 일보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자아가 개체의 중심을 지향하여 구심적이라면 “우리”는 개체를 벗어나는 방향성에서 원심적이다. 첫 행의 거친 호흡이 둘째 행으로 넘어가면서 완만하고 사유적인 호흡으로 급변한다. 은유의 언어에서 원관념인 “우리”는 보조관념인 “천국에 대한 어느 비판을 닮은/푸른 하늘빛 물결”과 등가적 관계에 놓인다. 우리는 하늘색으로 떼 지어 물결치면서 “천국”에 대한 비판을 구현한다.
화자로 등장하는 “우리”는 식물 실러의 꽃들이다. 꽃들이 “멍청아”로 야단치듯 부르는 청자는 아마도 그 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일 것이다. “자아”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사람이다. “천국”의 개념 또한 사람의 산물이다. 무리지어 핀 하늘색 꽃들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척도를 불신하는 의혹이 서려 있다. 개체 중심적인 자아를 배제하면서 한 데 모여 흔들리는 물결의 존재를 선언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한 가지가 된다는 것이/아무 것도 아닌 것과 거의 마찬가지인 시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체가 그 중심에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 개체는 자기중심에서 정체성을 굳히는 순간 세상과 단절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쉴 새 없이 연동하면서 관계의 양상에 따라 움직여갈 뿐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모든 것은 피동적이다. 생명은 그 피동성이 자연에 원리에 따르는 순응성과 일치하는 순간에서 약동한다. 이것이 화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일 듯하다.
청자 “너희”는 “신의 목소리 같은/메아리 소리”를 기대하여 “위를 올려다보는” 버릇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신을 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러 꽃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어리석은/삶을 기획하고” 있다. 화자의 입장에서 청자 “너희”는 멍청하고 어리석다. 실러 꽃들의 비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신의 구원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고 자기중심의 우위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인생에 절대자의 섭리 혹은 고결한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실제에서 그들은 섭리의 추종자가 아니라 단지 “보내지는 곳으로/바람이 심어주는 곳으로” 옮겨갈 따름이다.
피동, 순응, 역동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실러 식물의 생존 방식이다. 실러 꽃들은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하지만 “너희”는 인간의 지위에서 진리를 구하는 우를 범한다. “너희” 중의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아주 오래” 실러 꽃을 내려다보다가 발견하는 것은 “물의/어느 표상”이다. 무리지어 핀 꽃들은 서로 엉겨 흔들리고 있다. 꽃들이 이루는 움직임은 물결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실러 꽃들이 물결치는 소리 그리고 그 위에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다. 실러 꽃들을 오래 바라보는 자는 정원사이거나 시인이거나 진리 탐구자일 것이다. “너희” 중의 이런 자들마저도 실러 꽃들이 이루는 물결의 표상과 소리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는 천국, 인간, 자기중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화자인 실러 꽃들은 청자인 인간을 매섭게 다그친다. “어이하여/너희는 자신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여기니?” 자기중심의 배제를 추구하거나 그 부재를 고통스럽게 확인하는 일은 그릭의 시에서 주요한 모티프를 이룬다. 시인이 자아를 버리고 세상의 와중으로 흘러가는 자세를 취한다. 자아의 부재가 초래할 혼란과 두려움과 무지 속에 스스로 처하려한다. 이 짧은 시 또한 이러한 큰 흐름의 한 고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릭의 시는 간단한 듯 간단하지 않다.
II-2. 「물러가는 바람」(“Retreating Wind”)
내가 너흴 만들었을 때, 난 너흴 사랑했어.
지금은 너흴 불쌍하게 여기지.
필요한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어:
흙을 두툼히 돋아주고 푸른 공기로 덮어주었지―
너희에게서 멀어질수록
더욱 뚜렷하게 너희가 보여.
너희의 영혼은 지금쯤 거대해졌어야 마땅하건만,
현재의 모습이어서는,
말을 하는 소소한 것들이어서는 안 되건만―
너희에게 모든 선물을 주었지,
봄날 아침의 푸름,
너희가 어찌 쓸 줄 몰랐던 시간까지도―
너희는 더 많은 것을 원했지, 다른 창조를 위해
따로 남겨둔 그 한 가지 선물까지도―
너희가 원했던 것이 무엇이든,
정원에서는, 자라는 식물들 사이에서는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거야.
너희의 삶은 그들의 삶처럼 순환적이지 않으니까:
너희의 삶은 새의 비행,
정적(靜寂)에서 시작하고 정적에서 끝나지
흰 자작나무에서 사과나무까지
이 궁형(弓形)을 반향(反響)하는
형식에서 시작하고 끝나지.
When I made you, I loved you.
Now I pity you.
I gave you all you needed:
Bed of earth, blanket of blue air―
As I get further away from you
I see you more clearly.
Your souls should have been immense by now,
Not what they are,
Small talking things―
I gave you every gift,
Blue of the spring morning,
Time you didn’t know how to use―
You wanted more, the one gift
Reserved for another creation.
Whatever you hoped,
You will not find yourselves in the garden,
Among the growing plants.
Your lives are not circular like theirs:
Your lives are the bird’s flight
Which begins and ends in stillness
Which begins and ends, in form echoing
This arc from the white birch
To the apple tree. (p. 15)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전개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인간은 결국 인간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러가는 바람”의 목소리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 화자는 사뭇 권위적이면서 아랫것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자의 어투로 말한다. 화자가 “내가 너흴 만들었을 때, 난 너흴 사랑했어”라고 회고하는 태도에는 신의 위엄이 서려 있다. 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였고 사랑한 나머지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저절로 상기된다. 그런 화자가 청자 “너희”에게 어쩐 일인지 지금 연민을 느끼고 있다.
화자 “바람”이 청자 “너희”에게서 물러가고 있다. 온갖 애정과 필요한 것을 주었지만 결국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아쉽게 떠나가고 있다. 바람의 실망은 인간의 미성숙과 관계가 있다. “봄날 아침의 푸름”과 “시간”을 충분히 주었지만 제대로 쓸 줄 몰랐고 현재 “말을 하는 소소한 것들”에 머물고 있다. “더 많은 것”을 원할 뿐 거대한 영혼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인간세상에서 바람이 기대를 접고 있다. 인간세상에서 신은 사라지고 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후 인간은 정신력에 의존해 세상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 힘마저도 어쩌면 신이 “다른 창조를 위해/따로 남겨둔 그 한 가지 선물”인지 모른다. 그 선물은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이 맹신했던 상상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철학자가 초인으로, 시인이 창조자로 자처했던 시절은 갔다. 상상력은 신을 대체하지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도 못했다. 정원은 두툼하게 돋운 흙과 따뜻한 대기에 싸여 생명을 틔울 수 있다. 신이 이렇게 흙과 대기를 선물로서 주는 것은 그곳에서 영혼이 성장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과 온갖 선물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다. 바람이 지상의 정원을 떠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람의 관점에서 인간은 정원의 식물보다 못하다. 인간은 다년생 식물처럼 새로운 생의 주기를 누릴 수 없다. 인간 외의 다른 창조를 위해 아껴두었으나 그마저도 인간에게 주고 말았던 “그 한 가지 재능”이 큰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것이 자유의지이든 상상력이든, 신에게서 얻어낸 것이 무엇이든, 오늘의 인간은 정적 속에서 시작하고 정적 속에서 끝나고 있다. 그가 일생 이룩하는 일은 자작나무에서 사과나무에 이르는 짧은 궤적을 메아리처럼 되울리는 것에 불과하다. 영혼의 결핍에서 창조는 궁극에 이르지 못한다. 창조의 원초적 힘이었던 바람이 물러가고 있다. 오래 애정을 두고 머물던 거처를 떠나면서 그이가 뒤에 남겨지는 자들에게 던지는 말은 가혹하게 적절하다. 차라리 다년생 풀이라면 몇 년을 다시 사는 순환 속에 있겠지만 인간의 생애는 여기서 저기까지 새의 짧은 비행이 형성하는 궁형의 메아리에 그친다.
II-3. 「야곱의 사다리」(“The Jacob’s Ladder”)
땅에 갇혀 있어도
당신 또한 하늘나라에 가고 싶지
않은가요? 내가 사는 곳은
어느 귀부인의 정원이에요. 용서하세요, 귀부인이시어;
갈망이 내 품위를 앗아가 버렸으니. 현재의 나는
당신께서 원했던 바가 아니지요.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갈망하는 것 같듯이, 나 역시
천국의 지식을 갈망하고 있지요―그런데 지금
당신의 비탄, 헐벗은 나뭇가지가
현관 창문에 도달하여
결국엔, 무엇이죠? 별을 닮은
한 송이 작은 푸른 꽃이에요. 결코
세상을 떠나지 못하리라! 당신의 눈물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인가요?
Trapped in the earth,
wouldn’t you too want to go
to heaven? I live
in a lady’s garden. Forgive me, lady;
longing has taken my grace. I am
not what you wanted. But
as men and women seem
to desire each other, I too desire
knowledge of paradise―and now
your grief, a naked stem
reaching the porch window,
And at the end, what? A small blue flower
like a star. Never
to leave the world! Is this
not what your tears mean? (p. 24)
야곱의 사다리는 꽃고비속(屬)의 다년생 원예식물로서 잎이 사다리 모양으로 병렬한다. 식물의 이름을 꽃고비로 옮겨 쓰지 않고 원뜻으로 번역한 것은 제목이 함축하는 성서의 인유가 시의 내용에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에서 야곱은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의 꿈을 꾸었다고 묘사되고 있다.
의문문으로 시작하는 첫 문장의 청자는 누구일까? “당신 또한”이 상정하는 화자의 입지는 무엇인가? 화자가 청자인 누군가를 끌어들여 자신의 입장에 동참시키고 있다. 그들은 모두 지상의 거주자들이면서 하늘나라를 꿈꾸고 있다. 지상에 살면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땅에 갇혀” 있다는 억압의 느낌 속에 있다. 화자가 사는 곳은 좀 더 구체적으로 정원이다. 그이는 귀부인이 가꾸는 정원의 식물이다. 야곱의 사다리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서 하늘을 향해 사다리를 높인다. 귀부인 또한 지상에 살면서 천국을 갈망한다. 둘은 어찌 보면 닮았다. 귀부인이 애지중지 그 식물을 키우는 것은 그것의 표상을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그런 귀부인에게 말은 공손하나 빈정대는 어투로 “현재의 나는/당신께서 원했던 바가 아니지요”라고 잘라 말한다. 화자 역시 귀부인과 마찬가지로 “천국의 지식”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그이와 다르게 그 추구가 종국에 도달하게 될 결과가 무익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식물 화자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의존해온 관념들에서 자유롭다. 신, 천사, 천국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인간의 산물이다. 세상은 인간의 열망이 투영되는 공간이다. 야곱의 사다리라는 이름이 특정 식물에 붙여진 것도 인간의 종교적 갈증 탓이다. 하지만 식물에게 세상은 그저 세상이다. 화자에게 “천국의 지식”은 종교나 진리의 추구로서가 아니라 남녀가 서로를 탐하는 욕망과 유사한 것으로서 접근된다. 식물 화자는 인간의 허상에서 철저히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다가올 결말을 냉정하게 직시할 수 있다. 이승의 삶이 한 번 주어지는 인간에 비하여 다년생 풀은 순환의 삶을 산다. 화자의 목소리는 결말을 알고 시작했고 다시 그 결말을 향해 가는 자의 것이다. 그래서 그 목소리에는 환상이 제거되어 있다. 귀부인은 “결코/세상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현실에 직면해서 “눈물”을 짓지만 식물 화자는 “별을 닮은/한 송이 작은 푸른 꽃”을 맺는다.
“당신의 비탄”과 “헐벗은 나뭇가지”가 쉼표를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동격을 이루고 있다. 전자는 청자인 귀부인의 것이고 후자는 식물 화자의 것이다. 양자는 마찬가지로 하늘을 갈망하지만 둘 다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현관 창문”에 이르는 데 그친다. 땅속에서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지상에 머무는 처지에서 귀부인은 “비탄”의 눈물을 보이지만 야곱의 사다리는 작지만 푸른 꽃을 맺는다. 귀부인의 “결코/세상을 떠나지 못하리라”는 한탄은 야곱의 사다리에게 “결코/세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영탄일 수 있다. 영시 원문은 “못하리라”와 “않으리라” 두 가지 해석 모두에 열려 있다. 이 짧은 시가 주는 묘미는 이렇게 정교하게 변주되는 의미의 함축에 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 외부에서 인간을 비판하는 식물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없다면 발현될 수 없을 듯하다.
III. 시인의 자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릭의 시 세 편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서로 다른 목소리의 결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위 세 편은 화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어투와 어조 또한 다르다. 비인간적 사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장치를 통해 시인은 인간 외부에서 인간을 관찰하는 입지를 확보한다. 시집 『야생 붓꽃』에서 시인은 다양한 탈인간적 목소리를 전개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비판의 척도를 예리하게 다듬고 있다. 자아의 중심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태도는 그릭의 시적 경력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목격된다.
그릭의 시는 서정성과 투명성이 뛰어나 대중적이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대다수 서정 시인이 빠지기 쉬운 유아론적 몰입에서 자유롭다. 자아가 위험하고 불순한 것임을 출발단계에서부터 인식하고 있다. 그녀의 시는 사적(私的)인 듯 보이지만 개인적 과거마저도 무대 위의 공연처럼 다뤄지고 모두의 삶에 핵심적인 문제와 결부된다.
그릭은 심리치료를 장기간 받으면서 정신분석학자의 접근법으로 자아를 다루는 법을 배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예언자나 입법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자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연 그릭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했는가? 그녀는 실험시인들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있지 않지만 주체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신을 시인의 길로 가게 했던 힘이 의식의 저편 어둡고 위험한 곳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파편화나 문법의 파괴에 의존하지 않고 정연하며 서정적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혁신적 언어시인들과 매우 다르지만, 여전히 그들처럼 세상과 자아를,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재건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릭은 가진 지식을 내세우거나, 숨겨진 것을 발견하거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시인이 아닌 듯하다. 신이 없는 세상의 믿음, 그 깊이까지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어둠, 이렇듯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을 투명한 언어로 대화체 호흡 속에 끌고 가는 균형 감각이 뛰어나다. 결이 다른 서정의 가능성, 이것이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부분일 것이다.
인용문헌
Louise Glück. The Wild Iris. New York: Ecco,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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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균원(楊均元)
1960년 담양 출생. 『광주일보』(1981)와 『서정시학』(2004) 시 부문으로 등단. 시집으로 『허공에 줄을 긋다』 『딱따구리에게는 두통이 없다』 『집밥의 왕자』가 있고 연구서로 『1990년대 미국시의 경향』 『욕망의 고삐를 늦추다』가 있음. 현 대진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