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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활동과 사상 - 천문역산 분야를 중심으로
목 차
1. 서명응의 천문학 저술과 상수학
2. 전문적 천문학자 서호수
3.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활동과 탕평정치
1. 서명응의 천문학 저술과 상수학
1786년에 正祖에게 진상되었던 保晩齋叢書에는 지리학 저술인 緯史와 천문학 저술인 髀禮準과 先句齊, 농학 저술인 本史, 음악학 저술인 詩樂妙契와 元音錀, 참동계학 저술인 參同攷, 유서류 서적인 攷事十二集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보만재총서에 수록되지는 않은 자연과학 관련 문헌으로는 詩樂和聲과 國朝詩樂, 攷事新書, 千歲曆 등이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과학’이라는 용어의 범주를 보다 폭넓게 설정하여 전통적인 성리학적 자연철학의 저술까지 포함시킨다면, 서명응의 자연과학 저술의 목록에는 보만재집 권16에 수록된 「蠡則篇」이나 易學 관련 저술인 先天四演, 啓蒙圖說, 기년서인 皇極一元圖 등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서명응의 저술 중에서 천문학 저술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그다지 높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徐命膺은 비록 전문적인 천문학자는 아니었지만, 그가 지닌 천문학 지식은 상당히 전문적인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그는 전통적 천문학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지녔던 학자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중국을 거쳐 조선에 전래된 九重天說, 地圓說, 地半徑差, 淸蒙氣差 등의 서양천문학 지식들 또한 깊이 있게 소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보만재총서에 수록된 髀禮準과 先句齊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비례준은 하늘의 구조와 별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上篇과, 日月과 五行星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下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별자리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서양의 천문학이 전해지고 난 뒤에 새롭게 알려진 지식을 함께 정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비례준에서는 하늘의 전체 별자리를 북극, 동, 서, 남, 북, 남극 부근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북반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남극부근의 별들에 대한 지식들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 남극부근의 별들에 대한 내용은 서양의 천문학 서적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한편 별자리에 대한 서술내용은 각각의 별자리에 중국의 지역들을 배당하고 帝-候-臣의 階序 관계를 적용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史記 「天官書」 이후 정사正史의 ‘천문지天文志’에서 계속 채택되었던 것이다. 한편 下篇의 「太陽準」․「太陰準」․「五星準」․「天漢準」에서는 太陽과 太陰(달)과 五行星의 형체, 명칭, 크기, 거리와 은하수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들 내용 또한 상당부분 서양 천문학 서적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비례준에 서술된 ‘천문’ 관련 내용들은 사실 그다지 복잡하고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선구제는 曆法의 전문적 지식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이해를 지니지 않고서 저술될 수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구제의 내용 중에서 「黃赤齊」․「象限齊」․「極度齊」․「中星齊」에서는 역법에서 사용되고 있는 黃道, 赤道, 北極, 上限, 中星의 개념을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별들의 좌표를 구하는 방법 등을 설명하는 부분은 역법의 기초에 해당하는 부분이지만, 지구가 둥근 이치와 이로부터 발생하는 各地時差와 地半徑差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地圓齊」의 내용이나 태양과 달 및 오행성의 궤도계산과 日食․月食의 계산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日躔齊」․「月離齊」․「五星齊」의 내용은 曆法 지식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공부가 뒷받침되어야만이 그 내용을 이해하고 쓸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특히 地半徑差와 淸蒙氣差의 내용과 원리들은 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지식으로서, 앞서 말한 九重天說이나 地圓說 및 五行星들에 관한 관측사실에 비해 보다 전문적인 천문학 지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편, 천문학 저술들의 수준이나 분량에 견주어 볼 때, 서명응의 천문학 관련 활동은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인다. 1770년에 이루어진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시 그는 편집당상의 자리로 참여하였는데, 이는 당시 그의 아들인 서호수가 「상위고」의 편집을 찬집청 낭청의 자격으로 맡은 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며 그가 직접 「상위고」의 편집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천문학과 관련된 서명응의 활동으로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백두산에 올라 북극고도를 측정한 일이다. 1766년(영조 42)에 서명응은 갑산부로 유배를 간 처지로서 같이 유배되었던 조엄(趙曮, 1719-1777)과 함께 갑산부사와 삼수부사를 거느리고 백두산 유람을 하게 되는데, 백두산 등정 도중에 목수로 하여금 象限儀를 제작하도록 하고 이렇게 만든 상한의를 이용하여 백두산의 林魚水과 臙脂峯 아래, 그리고 泉水라는 지역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였다. 서명응은 백두산유람기에 이들 각 지역의 북극고도를 42度 小弱, 42度 3分, 42度 小强으로 적고 있다. 이러한 측정사실은 이후 조선의 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진듯 보이는데, 특히 천문과 역법 등의 과학지식에 관심이 많았던 황윤석은 서명응에게 이 일에 관해 묻기도 하였으며 이후 신경준과 정조도 이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를 한 바가 있다. 사실 1760년에 서명응은 晝講에서 8도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역서에 기재하자고 주장하였는데, 1766년에 이루어진 백두산 지역에서의 북극고도의 측정은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실천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북극고도의 측정의 주장은 서호수와 서유구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다.
한편 서명응의 천문학 저술에서 드러나는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서양에서 전래된 천문학 지식들을 포함한 天文・曆法 지식 전반을 易學的 이론을 동원해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천문학 지식에 대한 易學的, 象數學的 해석은 비례준, 선구제에서뿐만 아니라 易學 저술인 先天四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河圖와 先天方圓圖의 內圖를 이용하여 地圓說을 합리화하고 있으며, 先天8괘를 이용하여 九重天說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서양에서 전래된 十二重天說이 아닌 구중천설이 올바른 이유는 先天易에서 乾一과 坤八의 數가 합하면 9가 되는 이치에서 명확하게 드러나 있으며, 지구가 둥들다고 하는 地圓說의 이치는 先天方圓圖의 내도 속에 깃들어 있다. 서명응은 전문적인 역법지식에 속하는 同升之差또한 선천방원도에서 나타나는 12辟卦와 8純卦들의 배치로 해석하고 있으며, 북극과 남극의 별자리와 일주운동 방향, 천체의 左旋과 日月의 右行, 五行星의 역행운동에 대해서도 선천방원도의 順數와 逆數의 관계를 이용하여 해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구표면의 위도에 따라 각 지방의 기후에 선천방원도의 몇 가지 卦들을 배당하는 새로운 卦氣說을 펼치고 있으며, 納甲法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일어나는 달의 천구상 위치변화에 8宮卦를 배당하고 있다.
천문학 지식들에 대한 이러한 역학적 해석은 象數學者로서의 서명응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상수학의 논의 맥락 속에서 서양천문학의 지식들은 易學的으로 재해석되면서 전통적인 천문학 지식들과 함께 통합되어 그의 천문학 체계를 구성하였던 셈이다. 그리고 易學과 象數學을 중심으로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고하는 서명응의 모습은 전문적인 과학자의 모습이라기보다는 博學多識을 통해 物理와 人事의 이치를 꿰뚫고자 하는 전통적인 유학자의 또다른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전문적 천문학자 서호수
서명응의 자연과학 저술들 대부분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데 반해, 徐浩修의 자연과학 저술은 海東農書와 數理精蘊補解를 제외하면 대부분 전하지 않고 있다.(數理精蘊補解는 1723년 중국에서 강희제의 명으로 편찬된 수학서인 數理精蘊을 해설한 책이다. 한편 서호수의 문집이 편찬되지 못한 것이나 그의 저술이 흩어지고 사라진 것은 純祖 초반 서유구가 유배를 가게 되고 서씨 집안이 쇠락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서호수는 이 외에도 曆象考成(1721)과 曆象考成後編(1742)을 해설한 曆象考成補解와 曆象考成後編補解와 1713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律呂正義를 해설한 것으로 짐작되는 律呂通義, 數理精蘊의 이론을 요약 정리한 比例約說, 이지조가 저술한 渾蓋通憲圖說을 해설한 渾蓋通憲圖說集箋 등을 편찬하였으나 이들 대부분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서호수의 문집의 일부가 私稿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전해져오는데, 그 속에는 「數理精蘊補解序」를 비롯하여 「曆象考成補解序」와 「曆象考成後編補解序」, 「比例約說序」 등의 서문들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비록 대부분의 저술이 전해지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서호수의 저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천문학 관련 저술이라는 점이다.
이런 사실들은 서호수를 분명 ‘전문적인 천문학자’로서 규정할 수 있게 만드는데, 실제로 그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로부터 최고의 曆算家로 인정을 받았으며 또 정부의 천문학 관련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서호수의 천문학 활동은 1770년(영조46) 동국문헌비고의 편집시 천문학 부분인 「상위고」의 편집을 담당하는 일로서 시작되는데, 이때 그는 태조 때에 만들어진 「石刻天文圖」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여 그 결과 英祖로 하여금 흠경각을 새로 짓고 「석각천문도」의 新本을 만들어 舊本과 함께 보관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을 통해 영조대 말부터 천문역산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은 그는 정조시대 동안 줄곧 관상감 제조를 맡으면서 각종 천문학 관련 사업을 관장하였다. 1789년에는 시헌력법의 제도에 의거하여 赤道經緯儀와 地平日咎를 새로 만들었는데, 이 일들은 曆官인 金泳이 실무를 맡아 행하였지만 김영을 추천하고 또 업무를 지도, 감독한 이는 바로 서호수였다. 김영은 이 해에 시각측정의 기준이 되는 中星의 위치를 새로 정하여 新法中星기를 편찬하였으며 시헌력의 96각법에 의거하여 물시계의 부표를 새로 바꾸고 시각측정법을 기준을 수정한 新法漏籌通義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일들 역시 서호수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1791년에는 서호수의 주도로 관상감의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그 결과 大統推步官과 같은 필요 없는 관직이 폐지되고 命科學 분과의 정원이 새로 규정되었으며 관상감 각 부분의 업무와 녹봉에 대한 규정이 새로 節目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1796년에 서호수는 曆官인 김영, 成周悳과 함께 國朝曆象考를 편찬하였는데, 서호수의 지도를 받아 성장한 성주덕은 1818년에 書雲觀志를 편찬하게 된다. 정조 말기에 서호수는 관상감 제조로서 18세기 이후의 천문학 발전들을 정리하였으며 관상감의 조직을 정비하여 향후의 정부의 천문학 관련 업무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던 것이다.
한편 상수학적 해석으로 천문학 지식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던 서명응과는 달리 서호수는 易學과 천문학이 긴밀히 결합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식분야의 개별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1790년 謝恩副使의 자격으로 燕京을 방문하여 翁方綱(1733-1818)과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잘 드러나 있다. 당시 徐浩修는 자신이 지은 渾蓋圖說集箋을 에게 보내어 옳고 그른 점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옹방강은 이 책을 자세히 보고 난 뒤에 서호수에게 “徐公은 一行의 大衍曆을 응당 보셨을 것입니다. 옳다고 여기십니까?”라는 질문을 보내왔다. 서호수는 이 질문과 더불어 옹방강이 春秋의 朔閏表에 대한 교정을 一行의 대연력과 비교하여 행하고 있다는 언급을 듣고서 옹방강의 천문학 지식이 얕음을 비판한다. 그는 옹방강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태초력과 대연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피력하였다.
漢의 太初曆은 黃鐘에서 數를 일으켰고, 唐의 大衍曆은 蓍策에서 數를 일으켰으니, 근원을 근원으로 하고 근본을 근본으로 하여 종횡으로 펴서 벌여 놓은 것입니다. 班史의 曆志와 唐書의 曆議를 先儒들이 매우 칭찬하였습니다만, 초하루와 보름이 분명치 않으며 交食이 맞지 않아 마침내 觀象授時에 실익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樂과 曆, 易과 曆의 이치는 하나로 통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그 법은 아주 다른 것이니 결코 억지로 갖다 붙여서 현혹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서호수가 보기에, 태초력과 대연력의 문제는 이들이 천문학적으로 정확한 계산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데 있었다. 초하루와 보름이 분명치 않으며 交食이 맞지 않음이란 이러한 천문학적 부정확성을 지적한 부분이다. 따라서 태초력과 대연력이 비록 律管과 蓍策, 즉 주역의 대연지수를 토대로 天文象數들을 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역법이 천문학적으로 정확한 계산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서호수는 이와 같은 천문학적인 부정확성이 애초 이들 역법들을 천문학과는 무관한 易과 黃鐘의 원리에다 억지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억지로 갖다 붙여서 현혹하게 한다’라는 비판은 易과 黃鐘, 그리고 曆法이 구체적 방법의 차원에서는 상이한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호수는 ‘樂과 易, 曆과 易의 이치가 기본적으로 일관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역법과 황종, 시책의 이론이 근본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별개의 것이고까지 생각한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수리정온보해의 서문에서도 서호수는 曆法의 바탕으로서 數를 양웅이나 소옹 등이 이야기하는 數, 나아가 卦나 施策에서 사용되는 數와는 분명하게 다른 것으로 구분 짓는다.
옛부터 楊子雲(楊雄, 필자)이 數를 안다고 하였으나 太玄은 物과 事를 이루지 못하였고, 邵堯夫(邵雍, 필자)도 數를 알았다고 하나 가배법은 끝내 실제의 쓰임이 없었다. 대저 卦와 蓍策을 끌어다 합치는 것과 氣運에다 부회하는 일은 그 말이 광할하고 그 이치가 황홀할 뿐이니, 내가 말하는 數가 아니다. 物에는 많고 적음, 가벼움과 무거움, 크고 작음이 있다. 수로써 행하면서 사물에 유리되어 수를 말하면 이는 虛數가 되고, 사물에 즉해서 수를 말하면 이것은 眞數가 된다. 一과 一은 二가 되고, 二와 一은 三이 되니, 曆을 공교하게 하는 자가 이것을 궁구할 수 없다면 많고 적음의 수가 아닌가?
그에 따르면, 양웅이 태현경에서 논의한 數나 소옹이 황극경세서에서 서술한 수는 ‘그 말이 광활하고 이치가 황홀한’ 虛數이다. 그에 비해 사물을 측정해서 나오는 수가 바로 眞數이며 이것이 曆法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易學과 천문학을 별개의 지식분야라고 취급하는 서호수의 생각은 위에서 보는 것처럼 曆法의 기초인 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전문적인 천문학자와 수학자로서의 활동으로부터 가능해진 것이며 또한 더욱 강화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 결과 우리가 보기에 서호수는 자신의 아버지인 서명응의 상수학적 관념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3.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활동과 탕평정치
비록 서명응과 서호수 부자가 각각 상수학자와 전문적 천문학자라고 하는 상이한 면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이 수행한 과학활동과 저술활동은 공통적으로 영정조 시대의 왕권강화와 탕평정치를 위한 중요한 이념적 기초와 도구로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1760년 서명응에 의해 제창되고 이후 아들인 서호수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강조된 8도 북극고도의 측정의 문제는 이와 같은 ‘御用’의 혐의를 지니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하늘의 命을 받는 제왕은 王天下者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모든 백성들에게 제대로 된 시각을 알려줘야 한다고 여겨졌다. 이런 생각들은 都城 이외의 지역에서도 曆書에 기재된 시각이 그 지역의 天象의 변화와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이는 결국 도성 이외의 몇몇 지역의 시각, 즉 지방시들을 구하여 역서에 기재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時刻을 내려주는 일, 즉 敬天授時를 곧 국왕이 행하는 齊民支配의 또다른 실현방식이라고 한다면, 都城으로부터 먼 지역에까지도 정확한 시각을 내려주는 일은 곧 국왕의 통치행위가 먼 지역에까지 차질 없이 구현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서명응이 영조에게 ‘팔도 북극고도 측정’을 주장하는 맥락은 이와 같은 상징적 차원에서 국왕의 聖德을 전체 백성들에게 실현하는 데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晝夜節氣之差에 대해 한번 상세히 말해보라. 徐命膺이 말하기를, (중략) 北極出地는 매 2백50里마다 1도씩 차이나는 것이니, 晝夜의 차는 이로부터 말미암아 생기는 것입니다. (중략) 東西 절기의 빠르고 느림 역시 4분으로서 번갈아 서로 더하고 감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曆書는 都城으로부터 3백리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을 뿐 그 바깥의 지방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서명응에 따르면, 북극출지, 즉 북극고도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주야와 절기시각의 오차는, 실제로 당시 사용하던 曆書의 시각이 都城에서 먼 지역의 실제시각과 차이가 나는 현상으로 표출된다. 따라서 한양을 표준지점으로 하여 사용하던 역서는 결국 한양으로부터 3백리 내에서만 적용되는 시각을 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군왕으로서 堯舜과 같은 성인들의 규범을 따르고 王天下者서의 자격을 갖추고자 한다면, 군왕이 백성에게 내리는 시각이 都城 부근에서만 국한되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무릇 하늘을 공경하고 시각을 내려주는 것은 王政이 첫번째로 힘 쓸 바이니, 堯임금의 다스림도 이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땅 수천 리를 돌아봐서 王土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성인이 정치를 행함이 어찌 3백리 내에서는 두텁고 3백리 바깥에서는 박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우리 나라의 땅 수천리를 돌아봐서 王土가 아닌 곳이 없”으며, “聖人이 정치를 행함”, 곧 국왕의 통치행위가 “3백리 내에서는 두텁고 3백리 바깥에서는 박할 수 없다”는 구절은 이런 생각을 왕도정치의 이념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에서 서명응은 도성 이외의 지역의 주야와 절기시각을 역서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소루하고 구차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도성으로부터 3백리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역서를 만들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聖王의 法이라는 말로 표현된 曆書의 理想은 보다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현실적인 필요성과 관련된 문제인데, 과연 우리나라와 같은 작은 국가에서 역서에다 도성을 중심으로 하는 표준시 외에 각 지방의 시각을 기재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점이다. 실제로 위의 인용문과 이어지는 기사에서 영조는 중국의 예를 들어 팔도의 節氣時刻을 역서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중국의 曆書에도 반드시 매 州와 매 縣마다 그 晝夜와 節氣를 나누고 있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 역시 매 주 매 현에서 測驗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에 대해 서명응은 조선을 중국 전체에, 그리고 조선의 팔도를 중국의 省에 대응시켜 대등한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논리도 대응하고 있다. 즉 서명응에 따르면, 중국의 황제가 각 지역의 시각을 별도로 내려주듯이, 조선의 국왕도 각 지역의 시각을 별도로 내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天子의 국가가 아닌 일개 제후국에서는 엄밀히 말해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13省으로써 주야와 절기를 나누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역시 팔도의 監營으로써 주야와 절기를 나누는 것”을 과거에는 꺼려왔으나 이제는 “마땅한” 일로 생각하고 있는 서명응의 주장에서는 중국과의 외교적 문제에 대한 부담감도 느끼기는 힘든 것이다.
서명응의 저술활동이 영정조대의 왕권강화 이념과 결합한 예는 1774년에 왼성되어 영조에게 진상된 皇極一元圖를 통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758년(영조 34)에 洪啓禧(1703-1771)가 만든 經世指掌을 개정, 증보하여 황극일원도는 시헌력을 토대로 연대표를 교정하였으며 미래의 시간을 예비하기 위해 100년간의 장기역서인 「천세력」을 온전히 만들어 덧붙인 기년서였다. 황극일원도에서 국왕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론적 맥락을 통해서이다. 서명응은 이 책의 이론적 기초가 된 소옹의 우주론적 연대기 이론과 ‘三代의 정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유학의 이념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언급한다. 즉 황극일원도가 전제하고 있는 연대기 이론에 따르면, 12만 9천년의 주기로 움직이는 천지의 大運과 그것에 따른 氣數의 변화는 禹임금 이후부터 이미 쇠퇴의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世運의 큰 흐름을 고려한다면, ‘삼대의 회복’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통치가 여하하든 간에 우주적 시간표는 이미 後天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면, 인간의 문명은 차츰 쇠퇴로 나아갈 것이고 세 성인의 다스림(三聖之治)은 또다시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서명응은 이러한 모순을 군주의 心法과 의지에 대한 강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우주의] 氣運이 이미 巳會와 午會를 지나 未會와 申會가 되었으며 乾姤를 지나 遯否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세상의 人主가 만약 능히 세 성인의 道를 행하고 세 성인의 다스림을 행하며 항상 세 성인의 心法之中으로 세상에 흐르고 행하게 한다면, 가히 천하의 運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며 氣數가 침탈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夏禹의 시기로부터 3,900여년밖에 지나지 않아 아직 午會의 초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군주가 세 성인의 심법과 통치를 이어서 행한다면 氣運의 변화도 어쩌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군주의 역할을 보다 적극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명응은 이 책의 편찬의 통해 국왕인 영조의 치세노력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 [책의 편찬]은 우리 성상께서 개연히 마음을 품어 先天心法의 中으로 인해서 세 성인의 심법의 中을 이으려고 하심을 의미한다. 날마다 儒臣들에게 명하여 이 책을 읊도록 명하시는 것이 대개 孔子께서 周公을 꿈꾼 것과 같은 뜻이 있어서 이지, 어찌 運世의 정밀함과 투박함을 논하고 살피고자 하심이겠는가!
결국 그는 자신의 시대가 처한 우주론적 운명과는 상관없이 세 성인의 다스림이 다시 실현될 수 있으며, 쇠퇴의 운명은 통치의 妙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황극일원도는 군주의 통치의 묘를 얻기 위한 지침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군주가 신하들로 하여금 매일 그 연대기의 내용을 읊도록 함으로써 세운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서 氣數의 변화에 따른 실천적 노력을 빈틈없이 행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책이라는 것이다.
군주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영조의 치세노력에 대한 서명응의 강조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조선후기 탕평정치 이념이 적극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황극일원도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皇極’의 개념은 당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자주 논의되었던 ‘洪範’의 개념과 더불어 탕평정치의 이론적 뒷받침에 곧장 사용된 핵심적 용어였다. 서경 「홍범편」을 이용한 황극 개념의 재해석은 임금이 최고의 극점에서 초월적 존재로서 군림하며 만물을 蕩蕩平平하게 골고루 다스린다고 하는 皇極의 존재로 격상됨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황극탕평의 이념은 역사이론과 결부되어 왕권강화의 이론으로 전용되었으니, 서명응이 편찬한 皇極一元圖가 바로 그것이었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인 ‘황극일원’이라는 용어는 군주인 皇極이 萬事의 一元으로 역할을 수행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극고도의 측정과 반영, 황극정치의 구현에 관한 서명응의 이론이 영정조대 왕권강화를 직접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라면, 정조대 들어와서 서호수의 주도로 이루어진 천문학 관련 사업의 대대적 시행과 관상감 제도의 대대적 정비는 ‘왕도정치의 구현’이라는 명목 하에 왕권의 위엄을 강조하는 간접적인 수단이 되었다. 특히 정조대에 이루어진 각종 천문관측 기구의 조성과 시각측정 체계의 개수와 천문학 및 명과학 서적의 편찬, 국조보감과 국조역상고와 같이 천문학을 비롯한 제도와 역사에 관한 총정리, 8도 북극고도의 산정 등은 한편으로는 새롭게 발전한 천문학의 성과를 반영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통해 백성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내려주고’ 天命을 대행하는 王天下者의 위상을 백성과 신하들에게 다시금 강하게 각인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초기부터 세종대까지 「석각천문도」를 판각하고 천문의기를 만들고 칠정산과 같은 천문역산서를 편찬한 일들이 궁극적으로 新王朝의 위신 강화와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듯이, 영정조대의 천문학 관서의 정비와 각종 서적들의 편찬역시 탕평정치 아래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과학활동은. 비록 그 형태는 약간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탕평정치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었으며 과학과 정치의 결합의 또다른 일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