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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세미나에서는 12시부터 정진우 감독 영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과 다큐멘터리를 상영합니다.
이어 1부에서는 정진우 감독의 영화세계에 대해 안태근 회장이 발제합니다.
2부에서는 '제5차 이소룡 투어 대만 편'을 보고 후 10월 12일에 충북영상산업발전을 위한 세미나에서 발제했던 '청주국제무예영화제의 필요성'에 대해 재발제합니다. 당시 왕호 배우 및 지역 인사들이 참여하여 함께 영화제 시작을 위해 토론을 가졌었습니다. 지방에 있은 행사이기에 회원들이 참석치 못해 재발제를 합니다.
일시: 10월 28일 12시 영화상영~17시 까지
장소: 상암동 영상자료원 3관.
입장료: 무료
정진우 감독은 1950년대 영화계에 입문하여 반 세기 넘게 현역에서 활동하며 <초우>, <초연>, <동춘>,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자녀목>,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60여편을 감독하고 120편을 제작하였다. 그는 한국영화계에 동시녹음을 정착시키고 기술적인 향상으로 세계화를 이룬 한국영화계의 거인이다.
그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 6편의 동시녹음 영화를 제작, 한국동시녹음 시대를 정착시킨 개척자로 손꼽히며 미국에서 구입한 70㎜(TODD-AO방식) 6본 트랙 입체음향영화를 우리나라 최초로 제작한 바 있다. 함께 일했던 기술팀으로서는 손현채 촬영감독, 양후보 녹음감독 등이며 많은 조수들이 방송계로 진출하여 방송에서의 야외촬영에서 동시녹음시대를 열었다.
정진우 감독은 작품의 완성도와 흥행의 줄타기에서 성공한 몇 안되는 감독 중 한명이다. 한 때 한국 최고의 영화사인 우진필름을 통해 그 만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제 70대 중반을 넘긴 정 감독은 살아있는 한국영화사의 역사이며 증인이다.
1955년 신상옥 감독의 현장을 견학하고 1957년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의 투자자 겸 연출부로 본격적인 영화일을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오랜 현장에서의 활동으로 막힘없는 달변이다. 조미령 배우의 남편 이철혁 씨가 프로듀서로서 일했던 얘기부터 김강윤, 임희재, 장사공 작가. 김덕진, 이성춘, 강범구 등 촬영인. 신상옥, 정창화, 유현목, 박상호, 신경균, 노필 감독에 이르기 까지 그와 관련된 영화 이야기는 끝이 없다.
특히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 및 제작부장, 카메라맨으로 1인 3역을 했던 때의 이야기는 내가 알기로는 세계영화사에서 그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다.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 <대지의 지배자> <칠공주>, <장희빈>, <대지여 말해다오> 등 대작에서 활동했는데 당시 35만 원이던 감독 캐런티에 버금가는 20만 원의 캐런티를 받았다. 정창화 감독도 35만 원 캐런티를 받아 임권택 등 당시 연출부들에게 나눠주면 한 20만 원 정도 남았다는데 당시 정진우 감독의 인기는 제작자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이름이었었다.
그는 60여 명의 전쟁영화 엑스트라를 훈련시켜 트럭 2대에 태우고 다니며 때로는 독립군, 일본군, 국군, 인민군, 중공군으로 분장 시켜가며 촬영을 했다. 당시 실탄 사격을 해가며 위험하게 전쟁 장면을 찍다가 텅스텐 전구를 합선시켜 마그네슘을 터트리는 특수효과를 고안하기도 했다. 양회를 섞은 흙이 터지면 실감이 났고 정창화 감독의 영화가 성공한 요인 중 하나였다.
임권택 감독의 <두만강아 잘 있거라> 촬영 때에는 특효를 두려워 한 배우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 손에 화약을 올려놓고 설명을 하다가 특효팀이 잘못 터트리는 사고가 나기도 했었는데 손의 상처를 가리고 "아무렇지도 않구만!" 하며 태연한 척 촬영을 마쳤다는 무용담도 있다.
정진우 감독과 임권택 감독은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으로 함께 일했다. 임권택 감독은 <장희빈>을 찍다 빠졌고 정진우 감독은 계속 조감독을 하며 <대지의 지배자>와 <칠공주>등 두 편의 영화에서 더 조연출을 하였 김시현 감독이 조감독으로 들어왔다. 정진우 감독과 임권택 감독은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한흥영화사의 최관두 사장에게 잘 보여 같이 감독 데뷔를 하게 되었다. 두 편의 영화를 해주는 조건이었는데 그래서 서로가 감독 데뷔를 하게 되면 조감독을 해주기로 약정하였다. 그때 정 감독의 아는 분이 서울역 앞 역마차 다방의 레지와 사연으로 자살을 하였다. 이를 알리려고 역마차 다방으로 가던 중 서울역 앞에서 무단행단으로 임시로 친 줄 안에 갇혔다. 이때가 5.16직후로 사방에서 군기잡기가 시작된 때의 풍경이다.
정 감독은 무단히 줄밖으로 나가 역마차 다방으로 향했는데 형사가 다방까지 쫓아와 공무집행 방해로 수갑을 채웠고 남대문 서로 끌려가 깡패로 몰려 수감생활을 하게 됐다. 이 때 한 방에 30여 명씩 수감되어 있었다. 정 감독은 석달 20일만에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의 고등군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 무죄로 풀려났다. 출감 후 와보니 임권택 감독이 쓴 시나리오 <싸우는 사자들>은 이미 김묵 감독이 김석훈을 주인공으로 찍고 있었다. 정 감독으로서는 데뷔작을 놓친 셈이다.
그러나 정진우 감독은 임권택 감독과의 약속대로 그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조연출을 한다. 그들은 평화여관에서 묵으며 유한철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정진우 감독이 각색해 1962년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완성했다. 정진우 감독은 다음해인 1963년 김지미, 최무룡 주연의 <외아들>로 데뷔한다. 만 스물다섯의 이른 나이였다.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1936년에 <독생자>를 연출하였는데 비슷한 이야기에 자신의 고생담을 함께 한 내용이었다.
<섬개구리 만세>는 전라남도 비금도 옆의 꿩섬인 사치도의 농구팀 이야기이다. 그 곳으로 촬영을 갔는데 여주인공은 신인 김영애 배우였다. 그녀는 모 방송국에 출연 중이었는데 정 감독에 의해 발탁되어 임권택 감독의 <삼국대협>에 캐스팅된다.
그 후 <섬개구리 만세>에 신일룡과 함께 선생님으로 출연하는데 마침 TV드라마 <민비>에 캐스팅되어 몰래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가 촬영이 중단되었다. 다른 배우들은 그녀 오기를 기다리다가 뻘에서 잡은 낙지를 안주로 댓병짜리 소주를 비웠는데 주선태 배우와 김칠성 배우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서울로 올라와 김칠성 배우는 위암선고를 받았는데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싶다해서 안인숙 주연의 <황소타고 시집왔네>에 출연하게 되었고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정 감독은 "잘 가시오." 했고 김칠성 배우는 "내 마지막 작품을 찍어줘서 고맙수다." 인사를 했다는데 다음날 운명했다는 이야기이다.
<섬개구리 만세>는 베를린영화제 본선 8편에 올랐는데 당시 경쟁작이 인도의 거장 샤트야 지트레이 감독의 <먼곳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였다. 인도에서는 취재단이 30여명이 몰려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명도 없었고 안기부원만 1명 따라왔다. 정 감독은 입고 온 옷이 시원치 않아 김지미 씨가 사온 옷을 입고 기자회견장에 갔다.
기자회견장은 인도 취재진의 엉뚱한 질문공세였는데 "왜 말하는 것이 화면과 안맞느냐?"고 후시녹음을 따졌고 또 "부부생활도 옷을 입고 하느냐?"며 비사실성을 따져 정 감독은 후시녹음을 인정하고 러브신은 유교문화의 영향이라고 둘러댔지만 이미 수상권에서 밀려났다고 느꼈다.
정 감독은 영화제 후 바로 런던으로 갔고 "시네하우스"라는 영화기자재 가게로 가 한 달간 동시녹음 연수를 받고 무비오라 및 미첼 카메라를 구입하고 귀국한다. 그후로도 그의 영화기자재 구입은 계속된다. 제작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새로운 기자재 구입은 꾸준히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GNP가 500불 때의 이야기이다.
그의 그러한 뚝심이 한국영화 현대화의 견인차가 되었다. 한국영화의 현대화는 영화 기자재의 개선없이는 이룰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진우 감독은 1973년에 한국영화의 진흥과 세계화를 위해 설립된 영화진흥공사의 제작상임이사직을 맡아 우진필름의 제작활동을 접는다. 그리고 임권택, 이만희, 김시현 감독의 국책영화를 기획하고 프로듀싱한다. 그의 필모그래피에 1974년작이 없는 이유다. 이 당시 만들어진 <증언>이나 <들국화는 피었는데>, <잔류첩자> 등은 당시 개인영화사가 만들기 쉽지 않은 전쟁대작이었다. 일본에서 특수촬영팀까지 참여한 이런 영화들의 제작과정을 통해 우리는 보다 선진화된 촬영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수행에 정진우 이사의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영화 역사는 전쟁영화의 명 편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영화진흥공사에서 임기를 마치고 동시녹음에 대한 결실을 맺기 위해서 다시 제작 및 감독 생활을 계속한다. 그리고 <율곡과 신사임당>부터 동시녹음 시대를 열고 이후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의 영화를 감독한다. 그로부터 한국영화는 동시녹음 시대에 접어들었고 김성종 원작의 대하소설 <여명의 눈동자>의 제작에 착수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실을 볼 수 없었다.
1982년 임권택 감독과 함께 전쟁영화사의 뛰어난 한 편을 제작하는데 바로 <아벤고 공수군단>이다. 미국의 배우들을 초청하고 50회가 넘는 로케이션으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전쟁대작을 제작한 것이다. 대종상을 받았지만 꼭 대종상만을 바라보며 이런 대작을 제작할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그는 뚝심있는 제작자이다.
정진우 감독은 나의 영화 스승이기도 한데 그의 회사에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프리랜서로 일했다. 1983년 임권택 감독의 연출팀에 합류하기 전까지 <여명의 눈동자>,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등에서 영화연출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뚝배기 같은 걸쭉한 인간미에 호랑이 같은 영화의 열정이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그와 함께 있었던 시절이 벌써 3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영화의 열정을 잊지 않고자 나는 지금도 그의 콘티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정 감독은 카메라를 잘 아는 감독이다. 그가 이미 정창화 감독의 영화에서 제 2카메라를 잡았다는 말처럼 그의 카메라워킹은 남달랐다. 그는 때로 일본영화 스틸집을 갖고 현장에서 카메라맨과 구도 등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다. <초우> 등에서 선보인 영상미는 그가 영상에 어느 정도 집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가 미국에서 구입해 온 동시녹음 카메라 톳드AO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일반적인 아리플랙스 카메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인데 네다섯 배의 크기이다. 덩치 큰 카메라 조수 두세 명이 낑낑대고 나르는 것을 보면서 슬쩍 뷰파인더를 훔쳐봤더니 그야말로 눈이 시원해지는 것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그간 보렉스나 아리플렉스의 어두운 뷰파인더와는 차원이 달랐다. 자연히 화면도 달랐다. 그런 카메라를 갖고 있는 그가 부러웠다.
그는 전쟁물을 통해 익히고 닦은 대형 액션 씬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지만 아기자기하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섬세함도 있다. 특히 콘티를 보면 그의 외모와 달리 섬세한 연출에 놀라게 된다. 그는 적어도 문학청년 같은 순수함으로 작품을 풀어나간다. 그러나 그의 무기는 스토리가 아닌 영상이다.
그의 영화가 비교적 원작이 아닌 오리지날 시나리오들인데 영상으로 시나리오를 풀어나가는 연출이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에 의한 연출이 전부였던 시절, 조연출을 하며 느꼈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콘티는 영상적이다.
연기자의 연기연출에 그는 자신 있어 한다. 중앙대 시절 연극무대 경험과 신상옥 감독 영화에서 단역 출연 했었고 간혹 직접 출연까지도 한 그는 연기에 자신을 한다. 따라서 그의 영화 출연자들은 긴장하기 마련이고 연기주문이 많을 수밖에 없다. 콘티에 적힌 영상은 배우의 연기에 의해서만이 표현 가능하다.
물론 현장 상황에 따른 omit(생략)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감정은 그의 계산대로 정확히 연기된다. 그는 연기자를 자신의 스타일대로 이끌어 연기하도록 하는데 연상법에 의한 스타니슬랍스키적인 연기법과는 다른 모주킨의 편집처럼 몽타쥬론을 더 신봉하는 듯 하다.
따라서 그의 영화 속 신인연기자들의 경우 제 능력을 보이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연출의도를 설명하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그의 인상에 오금을 못쓸 정도로 얼어붙기 마련이다. 그러나 많은 신인 연기자들과 많은 영화를 하며 그들에게 각종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케 했다. 배우를 관리하는 독특한 마법이라고나 할까, 축구감독 히딩크나 아드보카트같은 마법을 갖고 있다. 불같은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연기자와의 마찰은 심하지 않다. 내가 본 유일한 것은 신일룡 배우와의 갈등이었는데 무려 1년 간 촬영이 중단되었다가 연출부가 바뀌어 재촬영되기도 했다.
촬영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스태프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5,60명에 달하는 대식구가 그의 말 한마디에 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조금의 흐트러짐을 용납 못하는 현장은 일사불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석화촌>, <심봤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자녀목> 등 향토미 물씬 풍기는 영화들이다.
그의 스타일은 신상옥 감독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의 연출세계는 내가 아는 한 누구의 영향을 받은 바 없다. 오히려 기성에 반발하며 스스로 창조해 낸 스타일을 영화를 통해 보여주었다. 그만의 고집으로 그의 작품세계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고 할까.
그가 제작자로서의 열정을 연출에만 바쳤다면 지금 한국영화 발전상은 바뀌어져 있을 것이다. 내가 본 정진우 감독의 모습이다.
그는 우진필름을 경영했던 제작자로서 많은 합작영화에 관련되어 있다. 1970년대 <흑연비수>, <흑야괴객>, <혈육마방>, <몽녀한> 등의 위장합작영화가 우진필름 합작으로 소개되었다.
범잡으러 범굴로 가는 심정으로 정진우 감독의 사무실을 찾았다.
정 감독은 합작영화에 대해 한마디로 폭탄선언을 하였다. 자신도 합작을 했지만 한국의 합작영화사는 위장합작의 영화사라는 것이다. 영화제목이 이상한 건 모두 위장합작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합작은 우선 자본투자가 대등해야 하고 스토리가 합작영화로 당위성이 있어야 하며 감독 및 스태프, 배우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질 못했다. 진짜 합작영화가 드물고 대부분의 영화가 위장합작영화였다는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지만 그 주요인물이 신 감독을 비롯하여 3인방으로 강, 곽 사장이 거론된다.
정 감독은 제작자협회 부회장의 자격으로 자율정화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합작영화의 판정권을 가졌다. 즉 검열에서의 불합격 판정을 내리는 판정관 역을 맡았던 것이다. 그 자신도 해당되지만 공정을 기해야 하는 입장에서 위장합작영화를 판별했다.
당시 1년에 6편의 의무제작을 하던 때이다. 제작자들은 위장합작으로 의무제작 한 편을 해결하고 외화를 수입하고 세금도 안내는 일석삼조의 이득을 취했다. <흑야괴객>의 경우 엄격하게 생각할 때 자본은 홍콩에서 투자했고 한국은 현지 로케이션을 하며 한국 스태프가 참여하여 제작했고 우진필름은 국내 판권만 갖는 자본 유치형태였다. 이런 관례가 대명 제작 등의 부정 사례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영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영화제작 자유화는 그 시대의 흐름이며 정신이 되었다.
정 감독의 의견은 일제강점기 감독들의 대명도 심했는데 모 감독이 스물한 살에 일본 제작자의 영화를 감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이다. 마찬가지로 합작영화가 아닌데 이걸 합작이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다. 물론 자신이 제작한 영화도 해당된다고 덧붙였다. 실로 용기있는 고해성사였다.
이야기 끝에 왜 1960년대, 1970년대 당시의 영화들이 많이 없어졌냐고 질문을 했다. 그는 당시 수출된 영화들은 네가필름 채 수출되었는데 원본필름이 회수가 안되었거나 서울세관 보관창고에서 찾아가지 않는 물품과 함께 소각되어 볼 수가 없는 영화들이 많다고 한다. 자신도 이 사실을 접하고 세관을 찾아갔으나 이미 소각된 후였다고 한다. 그 안타까움이야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그만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이도 드물다. 그가 영화진흥공사에 재임하던 시절인 1974년에 한국필름보관소가 설립된다. 한국영화 보존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늦게나마 그가 산파가 되어 설립이 추진된 것이다.
2014년, 정진우 감독은 70대 중반을 넘겼지만 감독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로서는 마지막 봉사의 자리이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회고전이 예정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을 1970년작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으로 꼽는다. 그외 30여 편의 영화들이 지금 공개해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들이라고 자평했다. 자신의 영화들을 불살라버리고 싶다는 소회를 밝힌 감독들도 있지만 생계를 위한 다작을 하며 생긴 일들이고 정 감독은 비교적 제작, 감독을 겸하며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꼽는 그의 대표작은 <초우>,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이다.
그는 여전히 나이와 상관없는 젊은이며 그런 그의 모습은 영화인의 이상이다. 신상옥 감독을 빼곤 정 감독만큼 영화인생을 멋지게 보내시는 분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자신의 영화사를 갖고 평생에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고 지금까지 건재하기는 쉽지않다.
그는 현재 (재)한국영화복지재단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신사동에 그의 건물에 위치한 영화인복지재단은 5회째까지 위대한 영화인 시리즈 행사를 개최해왔으나 1억 원 예산의 문제와 위대한 영화인 선정의 어려움으로 매번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음은 그의 간략 필모그래피이다.
각본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1)
풍운 일지매 (1976)
각색
두만강아 잘 있거라 (1962)
감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1995)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199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1)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984)
자녀목 (1984)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1982)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1)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
바다로 간 목마 (1980)
가시를 삼킨 장미 (1979)
심봤다 (1979)
율곡과 신사임당 (1978)
삼인호객 (1977)
애종 (1975)
초연 (1975)
황소타고 시집왔네 (1973)
섬개구리 만세 (1972)
석화촌 (1972)
풋사랑 (1971)
동춘(凍春)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
항구무정 (1970)
국경의 밤 (1970)
동백꽃 피고지고 (1970)
돌아오지 않는 밤 (1970)
차라리 남이라면 (1969)
청춘 (1969)
황진이의 첫사랑 (1969)
미로 (1968)
별아 내 가슴에 (1968)
여(女) (1968) - 1편
파란 이별의 글씨 (1968)
구름 (1968)
정부 마농 (1968)
폭로(暴露) (1967)
하얀 까마귀 (1967)
춘희 (1967)
사월이 가면 (1967)
밀월 (1967)
8240 K.L.O (1966)
초우 (1966)
하숙생 (1966)
초연 (1966)
악인시대 (1966)
밀회 (1965)
가을에 온 여인 (1965)
무정의 사십계단 (1965)
란의 비가 (1965)
배신 (1964)
국경아닌 국경선 (1964)
목마른 나무들 (1964)
외아들 (1963)
제작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1995)
밀월여행 (1993)
이혼녀 (1993)
차라리 불덩이가 되리 (1985)
사슴사냥 (1984)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198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984)
자녀목 (1984)
나비품에서 울었다 (1983)
내가 마지막 본 흥남 (1983)
밤이 무너질 때 (1983)
몽녀한 (1983)
신입사원 얄개 (1983)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 (1982)
춘희 (1982)
아벤고 공수군단 (1982)
복수는 내게 맡겨라 (1981)
내 이름은 마야 (1981)
여자는 괴로워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1)
바다로 간 목마 (1980)
조용히 살고 싶다 (1980)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
매권 (1980)
혈육마방 (1979)
석양의 10번가(빛을 마셔라) (1979)
말띠며느리 (1979)
가시를 삼킨 장미 (1979)
심봤다 (1979)
무림오걸 (1979)
호반의 메아리 (1978)
오빠하고 누나하고 (1978)
제갈 맹순이 (1978)
화조 (1978)
오륙도 이무기 (1978)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율곡과 신사임당 (1978)
소림백호문 (1978)
4인의 실력자 (1977)
미스터 오(O) (1977)
평양의 비밀지령 (1977)
삼인호객 (1977)
임진란과 계월향(임진왜란과 계월향) (1977)
영광의 9회말 (1977)
옥례기 (1977)
쾌걸 일지매 (1976)
제7교실 (1976)
대탈출 (1976)
과거는 왜 물어 (1976)
청색시대 (1976)
맨발의 눈길 (1976)
나는 고백한다 (1976)
이런 마음 처음이야 (1976)
풍운 일지매 (1976)
아내 (1976)
송화강의 비객 (1976)
춘풍연풍 (1976)
낙동강은 흐르는가 (1976)
강인의 무덤 (1975)
애종 (1975)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 (1975)
초연 (1975)
비녀 (1975)
황금마담 (1975)
연화(속) (1974)
흑묘 (1974)
연화 (1974)
장안명기 오백화 (1973)
흑연비수 (1973)
고향에 진달래 (1973)
청춘 하이웨이 (1973)
그 얼굴에 햇살을 (1973)
태백산의 결투 (1973)
방년 18세 (1973)
흑야괴객 (1973)
또순이와 갑순이 (1973)
섬개구리 만세 (1972)
목소리 (1972)
작은 꿈이 꽃필 때(일명:불타라 청춘) (1972)
인왕산 호랑이 (1972)
삼국대협 (1972)
사랑하는 아들의 심판 (1972)
석화촌 (1972)
두 딸 (1971)
여창 (1971)
인간사표를 써라 (1971)
화녀 (1971) -
오빠 (1971)
항구의 왼손잽이 (1971)
원한의 40계단 (1971)
풋사랑 (1971)
지금은 남이지만 (1971)
경복궁의 여인들 (1971)
남매는 단둘이다 (1971)
맨주먹으로 왔다 (1970)
동백꽃 피고지고 (1970)
돌아오지 않는 밤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
삼호탈출 (1970)
국경의 밤 (1970)
동춘(凍春) (1970)
맨발로 왔다 (1970)
제5차 이소룡투어로 10월 1일부터 3박 4일간 대만을 다녀왔다.
충북영상산업발전을 위한 세미나에서 청주국제무예영화제에 대해 발제했다. 왕호 배우 및 지역 인사들이 참여하여 함께 영화제 발전을 위해 토론을 가졌다.
전세계 유일무이한 영화제로 한국영화 장르의 한 부분인 무예영화는 이를 계기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