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누구에게도 똑같이 흐르지는 않는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일주일이 유난히 길었다. 주말이 아직 멀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기다리는 여행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반대로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날이면 시간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듯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며 불안에 잠식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멀찌감치 도망가 버렸다.
공간도 그렇다. 같은 크기의 방이라도 어떤 곳은 숨이 막히고 어떤 곳은 안식을 준다. 어릴 적 나는 화장실에 앉아 공부하는 버릇이 있었다. 집 안에서 가장 좁고 불편한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에 들어가면 집중이 잘됐다.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았고,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았다. 그 은밀한 공간에 들어서면 나는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온전히 나만의 시간 속에 머무는 것 같았다.
예수님은 넓은 회당보다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골방은 단순히 벽으로 둘러싸인 장소가 아니다. 타인의 시선과 소음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공간이다. 인간은 때때로 그런 장소를 필요로 한다. 신(神)이나 세상을 향해 열려 있기 위해 먼저 자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 말이다.
나는 한밤중 거실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가장 많은 생각을 만난다. 가족이 잠든 시간. 집 안의 모든 소리가 가라앉은 시간. 그 적막과 은은한 불빛 속에서 생각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샤워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샤워기 물줄기가 머리와 어깨를 두드리는 동안, 머릿속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르고, 쓰고 싶은 문장이 떠오른다. 때로는 머리에 비누를 한 번 칠했는지 두 번 칠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몸은 욕실에 있지만 정신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떠돌고 있는 셈이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다 보면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곳에는 언제나 시간이 함께 머문다. 공간은 시간을 품고 있고, 시간은 공간에 흔적을 남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울프는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간 오백 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경제적 자립과 독립된 공간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읽을수록 그것은 단순히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울프가 말한 방은 벽과 문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정신의 영역이었다. 오백 파운드는 생존의 불안에서 벗어나 사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가난은 돈의 가난만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없는 가난, 생각할 힘과 여유를 빼앗긴 가난도 있다.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나 자신의 방’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한밤중의 식탁이 떠올랐고, 이어 욕실과 어린 시절의 화장실까지 생각났다. 그러다 일기를 쓰고 있던 어느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잔잔히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누구의 간섭도 시선도 닿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차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책장에는 오래된 일기장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가끔 한 권을 꺼내 펼쳐 본다. 그러면 잊었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되살아난다. 그때의 고민, 슬픔, 열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입꼬리가 올라가고 어떤 페이지에서는 숙연해진다. 지나간 시간을 읽는 일은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 순간 깨닫는다. 일기장은 공간이면서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그 안에는 과거의 내가 살고 있으며 현재의 내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미래의 나는 또 다른 어느 날 그 기록을 펼쳐 보며 오늘의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스페인어로 ‘안식처’ 또는 ‘피난처’를 뜻하는 단어에 '퀘렌시아(Querencia)'가 있다. 원래는 투우 경기에서 소가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뒤 잠시 숨을 고르며 기력을 회복하는, 경기장 안의 특정 공간을 가리킨다. 그곳에 들어서면 소는 더 이상 두려움에 쫓기지 않는다. 현대인에게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나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는 나에게 있어서 퀘렌시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더불어 나의 시간을 차곡차곡 저장해 두는 곳. 시간은 흘러가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록된 시간은 다시 돌아온다. 공간은 단순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다. 한 사람의 기억과 사유를 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얻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도 결국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만의 시간과 생각을 지켜낼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 누군가는 마침내 자기 목소리를 발견할 테니까.
돌아보니 나는 오래전부터 그 방의 문을 드나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