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갔다 왔다고 엄마 소리도 않더라”
“폐병 때문에 수녀의 꿈도 사라지고…”
김혜옥(79. 광주시 서구 쌍촌동)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이다. 교장 말만 철석같이 믿고 일본에 가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시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욕심도 많고 결코 남들한테 지기 싫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가정 형편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진학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때로부터 말 그대로 천석꾼 만석꾼 집안이었다. 아버지 김영화(金泳化)는 전남 나주에서 ‘영신상회’라는 소금 판매업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암모니아 배급소와 전당포 등을 운영하면서 나주 상권을 쥐다시피 하고 있었다.
“역전 곳간은 다 우리 것이었어. 나주 상권을 다 쥐고 있었으니까. 보리밥은 구경도 못해봤지. 아마 나주 골에서 금 수저로 밥 먹은 집은 나 밖에 없었을 거야.”
그랬을 법 하다. 그 당시에 벌써 4살 때부터 유치원엔 다녔다고 하니까. 당시 유치원생이라고는 고작 8명에 불과했다는 것. 아버지는 언제나 밖을 행차할 때 큰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 외 조랑말만 집에 3필이었단다. 어머니는 5살 때 일찍 여의었다. 그 뒤로 새 어머니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1944년 3월 나주 초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이듬해 다시 여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에서 ‘재습(再習)’이라는 과정을 치르고 있었다. 5월경 마사키 도시오(正木俊夫) 교장과 곤도 헌병이 교실에 들어섰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좋은 여학교에도 갈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 속으로 좋았지. 친구들은 여기서 학교를 다니는데 내가 일본 여학교에 다니면 내가 제일 최고가 되겠다 싶었지. 나 간 것 보고 간 사람도 많았을 거야. 나주 부잣집 딸도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절대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릴 적부터 별명이 ‘몽니’였다. 한번 고집을 피우면 못 당해 냈단다. 그렇잖아도 까탈스럽던 차에 새 어머니는 못내 반대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주 역에는 모두 24명이 집합했다. 이들의 인솔은 곤도헌병과 당시 학교 임시교사로 있던 손상옥(孫相玉) 선생이 담당했다. 나주를 떠나던 날은 특별히 아버지도 여수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리고 당시로는 남들은 쥐어보지도 못했을 꽤 큰 액수의 지폐 3장을 그녀의 손에 쥐어 줬다. 그녀의 나이 열 세살 때였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면서도 뛸 듯이 기뻤단다. 일본행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던 그녀였다. 이제 창창한 앞길만 남은 것 같았다.
근로정신대원들은 철저히 군대식 편재였다. 출신지별로 대대, 중대, 소대 등으로 편재됐고 대원들 중에 나이가 많거나 체구가 좋은 사람을 뽑아 중대장, 소대장을 뽑아 통솔하기도 했다. 전남지역에서 간 소녀들은 1중대로 편성됐다. 뒤 이어 도착한 충남 출신은 2중대였다. 출신지별로는 목포 1소대, 나주 2소대, 광주 5소대, 순천 3소대, 여수 4소대였다.
기대가 꺾인 건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녀에게 주로 배치된 일은 비행기 부품에 국방색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마스크라도 주고 그러면 되는데, 냄새가 아주 고약해. 환풍기도 없었거든. 머리가 아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도 두 번쯤 돼.”
학교는커녕 겨우 일본에 관한 공부와 군가 등을 외우도록 하는 정도였다. 월급 역시 없었다. 공장의 감시자와 일본 애들은 걸핏하면 ‘조센진’이라며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그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에는 공장 지붕이 붕괴되면서 오른쪽 어깨에 철골이 떨어져 병원에 실려 가기조차 했다. 당시 6명의 동료가 건물더미에 깔려 현장에서 숨졌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속임수였다.
어느 덧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철모르고 일본에 끌려가 갖은 고생을 했지만 귀국 후 고향에 돌아온 후의 삶도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귀국 후 곧바로 광주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해방정국과 연이어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집안은 여러 풍파를 견뎌야 했다. 친일파로 몰린 아버지는 한 동안 고향을 등지는 신세가 됐다. 그녀도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가는 바람에 광주 사범학교도 도중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녀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수녀원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했더니 폐결핵이라는 거야. 안 된데. 일본에서 독한 페인트 냄새 때문에 고생한 것 때문이었지….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나중에 화순에서 생활하던 도중 한 남자를 만나 아이 하나를 낳았다. 고향에는 갈 수 없었다.
“위안부 갔다 왔다고 아들이 처음에는 제 엄마 소리도 안 했어. 재판 때문에 일본만 갔다 오면 나를 죽일 듯이 달려들더라고. 사춘기 때는 나를 더러운 여자라고, 죽을란다고 칼 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뺏다가 다치기까지 했고….”
그래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들은 뒤늦게야 모든 오해를 풀었다. 어머니를 따라 일본 재판에 함께 동행 하고 난 뒤부터였다. 뭉쳐있던 가슴 속 어느 한 곳이 그때서야 풀리는 것 같았다.
김 할머니가 서랍 한 켠에서 웬 수첩을 꺼내 들었다. 15대부터 17대까지 국회의원 명단과 각 사무실 전화번화가 적혀있는 수첩이다. 1965년 한일협정 문서공개 운동, 일제 강제동원특별법 제정 등 숨 가쁜 일정을 달려온 흔적이었다.
“국회의원 만나려면 이 수첩이 있어야 돼. 순 도적놈들이야. 노인들이 도장 하나 찍어 달라고 하는데, 어떤 놈들은 우리를 아주 거지 취급을 해. 누가 자기들보고 돈 달라고 했어?. 국민들 세금 걷어 우릴 도와 달라고 하느냐고?. 우리들 목숨 값, 우리에게 돌려달라는 것뿐이여….”
세월과 함께 어느덧 세상을 보는 눈도 훨씬 너그러워졌다. 카랑카랑 하고 강단지던 그 목소리도 병마와 신음하는 김 할머니한테서 다시 들을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현재 광주시 서구 쌍촌동의 한 영구 임대 아파트에 홀로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몸이 아프고 나니, 이제 세상만사 다 싫어. 내가 죄를 많이 지었나 봐. 그래서 이렇게 고생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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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얘기 나눠본 할머니 중의 한 사람이 김혜옥 할머니입니다. 2007년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영혼'이란 책을 낸 적 있는데, 그 책에 김혜옥 할머니의 얘기는 없습니다. 비교적 가깝게 뵐수 있어서 언제 얘기 들어도 들을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책을 보완하기 위해 할머니를 인터뷰를 정리했지만, 이런 저런 일로 다시 책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제게는 일종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십니다. 그 카랑카랑하던 목소리마저도...
첫댓글 김혜옥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