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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57. [역경의 열매] 이희조 (1-9) 어렵던 학창시절 되새겨 장학회 설립
나의 학창 시절은 온통 일제(日帝)로 채색돼 있다. 일본인 교사 밑에서 일본 말을 배우고, 일본 아이들과 싸우다시피 하며 학교를 다녔다. 거기다 집안 형편은 다른 아이들과 매한가지로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배우고 싶은 욕구는 강했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다.
나는 2006년에 ‘이희조장학회’를 설립했다. 평생 회사를 다니며 모았던 돈과 미국의 자녀들이 십시일반 낸 돈을 합쳐 10억원을 내놨다. 적어도 돈 때문에 어린 나이에 꿈의 싹마저 싹둑 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많은 학생들을 돕지는 못하겠지만 다만 몇 명이라도 꿈을 꾸도록 돕고 싶었다. 가난한 학생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내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았다. 특히 농촌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어릴 적엔 ‘이 다음에 먹고 살만 하면 장학회를 만들어 시골의 가난한 학생들을 돕자’는 생각을 가끔 했다.
비록 내가 돈을 댔지만 장학회는 교회가 관리하도록 했다. 그래야 잡음도 없어지고 다양한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이사장은 서울성남교회 배태덕 담임목사가 맡았다. 관리는 교회 교육위원회가 책임졌다.
장학금 수혜 대상은 대학생들의 경우 13∼14명, 고등학생은 4∼5명 정도 된다. 거기엔 한 가지 원칙 아닌 원칙이 있었다. 서울대나 연·고대 같은 소위 명문대생들은 수혜 대상에서 일부러 제외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굳이 이 장학금이 아니더라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통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신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 중 별로 유명하지 않은 대학 재학생들, 그중에서도 농어촌 출신들을 주로 대상으로 선정했다.
장학금 수혜 대상은 이들 외에도 교회가 속한 교단 신학교인 한신대와 내가 나온 대전공업전문학교 후신인 한밭대 학생들도 들어 있다. 대학생의 경우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년 장학금을 지급한다. 장학금은 등록금에 준하는 액수다. 물론 성적이 좋으면서도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이 대상이다.
요즘엔 장학금을 주는 곳이 많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주고, 교회에서도 주고, 대기업 같은 데서도 많이 준다. 그에 비하면 이희조장학회는 미미한 수준일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사랑과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기도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돈만 주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망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난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으면 가정도, 민족도 소망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 교육의 방편은 돈도, 지식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는 것을 체득했다. 은혜로 주신 신앙에 보답하는 것이 내 남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다. 난 평생 군인으로, 경제인으로, 사회인으로 다양한 일을 해왔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내가 없었을 것이란 분명한 경험과 확신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먼저 간 아내의 헌신적인 신앙과 사랑이 있었다. 그 세 분의 신앙이 장학회를 있게 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희조 (1) 어렵던 학창시절 되새겨 장학회 설립
* [역경의 열매] 이희조 (2) 할머니·어머니·아내가 내 신앙의 멘토
* [역경의 열매] 이희조 (3) 초교도 못가는 사람들 보며 장학회 소망
* [역경의 열매] 이희조 (4) 가세 기울자 유학 꿈 접고 직업학교로
* [역경의 열매] 이희조 (5) 6·25 전쟁터에서 신앙은 점점 깊어가
* [역경의 열매] 이희조 (6) 인민군에 쫓기며 몇 번의 죽을 고비
* [역경의 열매] 이희조 (7) 산업화 비전 품고 전역 후 비료회사로
* [역경의 열매] 이희조 (8) 집에서 시작된 개척교회 장로가 되다
* [역경의 열매] 이희조 (9·끝) 孝정신 확산에 인생 마지막 승부
◇약력=1923년 충남 논산 출생.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미국 포트벨보아 육군공병학교 졸업.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및 연세대 경영대학원 졸업. 보병 제6사단 공병대대장. 충주비료주식회사 기획이사. 한국에탄올주식회사 기획이사. 한아통상주식회사 대표이사 및 회장. 서울성남교회 원로장로. ‘이희조장학회’ 설립자 및 이사.
***[역경의 열매] 이희조 (2) 할머니·어머니·아내가 내 신앙의 멘토
할머니 이나헬 권사는 공주에서 논산으로 시집을 오셨다. 할머니는 공주에서 일찍부터 감리교에서 파송된 선교사가 사역하는 교회에 나가셨다. 아마 공주제일감리교회였던 것 같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할머니가 시집을 온 곳은 완전 유교풍의 시골 마을이었다. 전주이씨 이안대군파 100여호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시집온 지 얼마 안 돼 과부가 되셨다. 과거를 보러 가셨던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귀가하시자마자 얼마 안돼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할아버지 나이 23세였다. 할아버지와 동갑이셨던 할머니는 돌도 채 지나지 않은 아버지를 혼자 돌보다시피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힘든 세간살이에도 불구하고 문전걸식하는 사람들에게 밥상을 차려 대접하고, 동네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잊지 않고 쌀 한 톨이라도 도와주는 분이셨다. 그런 할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마음으로 존경하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할머니의 삶과 신앙은 며느리인 어머니 김기순 장로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셨다. 그때 교회는 마을로부터 10리나 떨어진 먼 곳에 있었다. 교회를 가려면 산길을 가야 했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데리고 매주 그 먼 길을 오가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언젠가부터 ‘교회를 지어야겠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늘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며느리한테도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교회 설립이라는 오랜 기도는 할머니 생전에는 이뤄지지 못했다. 할머니는 대신 돌아가시기 전에 산을 내놓았다. 살아생전 못다 이룬 교회 봉헌을 대신 해달라는 뜻이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본가를 허물고 그 터 위에 화악감리교회를 지었다. 재작년에야 준공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교회 옆에는 할머니의 헌신과 봉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를 세워드렸다. 동네 사람들은 교회를 지나다닐 때마다 그런 할머니를 덕인(德人)이라고 칭찬했다.
어머니도 차츰 신앙이 깊어지면서 할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돕기 시작하셨다. 일꾼들 밥 먹이고 일 시키고 하는 것도 모두 어머니 몫이었다.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는 항상 부지런하게 사셨다.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41세로 단명하셨다. 어머니는 고난의 세월을 언제나 변함없는 온화함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도우면서 사셨다. 할머니와 닮으신 데가 너무나 많았다.
내 아내 한은희 권사 역시 그런 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아내는 조용하지만 깊이가 있고 강직했다. 안으로는 자녀들을 잘 교육하고 말없이 내조했다. 아내의 그런 스타일은 교회에서도 변함없었다. 아내는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봉사했지만 이름을 내세우는 데는 나서는 일이 없었다. 아내는 큰 직분도 없었고, 크게 소리 내는 일도 없었다. 다만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을 조용히 도울 따름이었다.
지금의 서울성남교회 사회관을 봉헌하는 데도 아내는 누구보다 기도와 정성을 많이 쏟았다. 하지만 담임목사의 사회관 봉헌계획 선포에도 불구하고 헌금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2억원을 먼저 바쳤다. 교회에서는 내 이름으로 봉헌하기를 원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 이름보다는 누구보다 말없이 수고하고 헌신한 아내의 이름을 교인들이 기억해주길 바랐다. 아내의 믿음과 헌신은 지금 서울성남교회 사회관 1층 로비에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다. 아내는 지난 1997년에 나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3) 초교도 못가는 사람들 보며 장학회 소망
아버지는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셨다. 그렇게 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무서웠던 기억밖에 없다. 몸이 약했던 아버지는 결국 내가 17세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평생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죽기 직전에 어머니의 전도로 영접기도를 하셨다.
이제 할머니처럼 어머니도 졸지에 과부 신세가 되셨다. 조용하던 할머니와는 달리 어머니는 강한 성격이셨다. 그런 어머니한테 나는 자주 매를 맞았다.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때리면 할머니는 그런 나를 안고 감싸주셨다. 할머니는 아비 없는 손주가 불쌍하셨는지 한번도 나를 혼내거나 매를 대신 적이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 말씀대로 따르지 않을 때는 가차 없이 매를 대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머니에게 수없이 맞은 것이 지금의 내가 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받들다시피 하며 키우는 요즘 자녀교육 행태에 대해 못마땅한 점이 많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은 예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예전의 위세와 활기는 없어졌다. 한마디로 집안이 폭삭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내 교육에 온 정성을 쏟으셨다. 당시 우리 동네엔 초등학교 다니는 사람이 나를 비롯해 몇 사람밖에 없었다. 그만큼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전답을 팔아 내 교육을 뒷바라지하셨다. 머리는 좋지만 가정형편이 안 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또래 아이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지금의 장학회를 구상하게 된 것 같다.
나는 미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그 꿈은 물거품이 됐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 속 저 밑동에서 스멀스멀 아쉬움과 쓰라림이 올라온다.
일제시대였기에 학교에서도 조선인들은 서러움을 많이 당했다. 대전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인데 근로봉사를 나갔다. 일본인 선생이 어디론가 데려갔는데 거기서 선생과 말을 주고받다가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내가 급장이었기에 나도 학생들 편에서 선생과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얼마 후 일본 고등계 형사가 와서 10여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중에서 3∼4명은 감옥을 보내더니 아예 퇴학을 시켜버렸다. 이런 사건은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몸은 일제 치하에 일본인 선생이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지만 내 마음은 한시도 일본의 사상에 동조한 적이 없다. ‘일본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독립이 될 거다’는 게 당시 조선 학생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었다.
가난과 설움의 세월이었지만 어머니는 조금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새벽 이른 시간이면 집 마루에 나와 앉아 울면서 기도하셨다. 이웃집에서조차 시끄러워할 정도였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셨던 것 같다. 뜨거우면서도 철저했던 어머니의 신앙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내일 모레면 아흔의 나이지만 나는 지금도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어디든지 여행을 다닌다.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 그래서인지 주위에서 내 건강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많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인이 하나 떠오른다. 10리가 넘는 교회와 초등학교를 매일 걸어 다닌 것이다. 그것은 내 체력을 길러주고, 신앙과 지식을 살찌웠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4) 가세 기울자 유학 꿈 접고 직업학교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도 주저앉고 내 꿈도 좌절되고 말았다. 10대 시절, 나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공부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면 조국을 위해 뭔가 기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 모든 꿈을 접어버리게 했다. 대신 나는 직업학교를 선택했다. 내가 다닌 대전공립직업학교(한밭대 전신)는 충남 연산에서 기차로만 1시간 20분 거리였다. 유학의 꿈은 접고 가정형편도 어려우니 일단 취업이라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래도 학교 다닐 때는 급장을 하면서 공부를 잘해 학교 대표로 뽑혀 부상으로 일본 여행을 하게 됐다.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쿄를 돌아오는 코스였다. 나에겐 좌절된 유학을 맛보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학교 졸업 후엔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에 입사했다. 학교에서 한 사람을 뽑는데 유일하게 내가 뽑힌 것이다. 회사는 전쟁에 필요한 특수강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였기에 당연히 일본 회사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기존 금광은 모두 올스톱시키고 특수강 채굴에 주력하고 있었다.
거기서 1년 반 있다가 만주로 전근을 갔다. 당시 만주엔 만주광업개발진흥주식회사가 있었다. 당시 만주는 일본 군대가 만주국을 만들어 점령하고 있었다. 조선의 많은 젊은이가 만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유는 나처럼 취업이 목적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는 회사 일에 쫓겨 독립투사들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내가 하는 일이 곧 조국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은 있었다.
난 일본이 지배하는 만주 땅에서, 일본인이 북적거리는 일본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절대 일본인에게 굽신거리지 않으려 했다. 조선의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일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내와 나는 당시 일본인이 밀집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조선인으로서 행동거지가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마치 일본에 굽히지 않겠다는 뜻인 듯 늘 한복을 입고 지냈다. 아내는 이른 아침만 되면 방안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마루에서 기도하던 게 떠올랐다. 그 기도 속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도 들어 있었다. 당시 만주 상공엔 미군의 폭격기인 B-29가 자주 출몰했다. 비행기 소리만 나도 일본 사람들은 방공호로 뛰어들었다. 나와 아내 또한 적잖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태연하게 집에서 일을 봤다. 그들은 그런 우리를 늘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내가 다니던 회사도 망하고 말았다. 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은 오합지졸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배편으로 아내를 먼저 한국에 보내고, 나는 남한과는 비교적 단거리인 해주, 즉 예성강 쪽 길을 택했다. 당시만 해도 이미 러시아군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일본의 전세가 기울자 러시아가 선전포고를 하면서 대동아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그 같은 러시아의 참여는 포츠담회담으로 가시화되었다. 러시아 군인들은 조선 사람들의 시계를 모조리 뺏어갔다. 내가 차고 있던 시계도 빼앗겼음은 물론이다. 당시는 이미 38선이 쳐져 있어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데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5) 6·25 전쟁터에서 신앙은 점점 깊어가
조국의 광복과 함께 나는 고향에 돌아왔다. 새로운 조국 건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신탁통치 정국 속에서 조국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김구 선생이 돌아오고 여운형이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이데올로기 싸움도 치열해졌다. 조국이 어떤 방향으로 갈 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안개 정국이었다.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지만 뚜렷한 목표가 서지 않았다. 당시 한국 정치는 유학파나 외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들어갔다.
미군정 하에서 잠시 충청남도 재산관리처 감정관으로 일했다. 패전으로 한국에 남겨놓고 간 일본인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하에서 고난당한 민족의 재산이었기에 철저히 감정하고 공정하게 분배되는 데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솟구쳐 오르는 조국애와 뜨거운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을까’ 골몰했다. 그때 내 나이는 아직 20대 중반, 피 끓는 청춘이었던 것이다.
마침 내 친구가 “육사가 괜찮다는데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난 그 말을 무시했다. 당시 육사(육군사관학교)는 직업 없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쯤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서 귀가 솔깃해졌다. 그 친구는 “중학교만 나와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너도 소위가 될 수 있다”며 거듭 입학을 종용했다.
결국 친구의 권유대로 재산관리처 감정관 직업을 그만두고 1947년 육사 시험에 응시했다. 비록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 할지라도 수립된 정부의 국군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1949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8기. 김종필씨가 동기였다. 첫 발령지는 대전의 제2 보병사단 사령부였다.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남한은 여순사건, 제주4·3사건으로 극도의 혼미상태였다. 그토록 한민족이 소원했던 광복이었지만 조국의 현실은 남북의 분단과 이념 갈등으로 나뉘는 미완의 광복이 되고 말았다.
내가 맡은 임무는 제2사단 16연대 3중대장으로서 태백산 구마동 일대와 경북 영주, 봉화 근방의 소천, 춘향 지역을 담당해 북한으로부터 내려오는 빨치산을 봉쇄하는 일이었다. 당시 북한은 10대 남녀들까지 방한복을 입혀 남하시키고 있었다. 끊임없이 침투하는 공비들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국지전은 결국 남북한 간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나는 중대를 이끌고 곧바로 의정부로 출동했다. 창동 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틀 정도 버티다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의 6·25전쟁은 나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신앙이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했다. 잘 사는 자와 못 사는 자의 구별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겠다는 그들의 꿈은 그들이 떠받드는 수많은 인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동족에게 인정사정없이 총을 겨누어야 하는 나의 번민도 깊어갔다. 나는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인간의 추악한 생존본능과 이기성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은 허구임을 절실히 느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맞닥뜨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점점 신앙에 눈떠갔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6) 인민군에 쫓기며 몇 번의 죽을 고비
창동에서 후퇴해 서울 중심가로 가니 황당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한강 다리는 전부 끊겼고, 육군본부는 인민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배를 타러 서빙고로 갔지만 총을 든 몇 사람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넋을 놓은 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당시 한남동 일대는 온통 배와 참외밭이었다. 아직 채 익지 않은 배와 참외를 따먹으며, 민간인 집에서 밥도 얻어먹으면서 요기를 했다. 함께한 중대원은 3∼4명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난행렬 속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뱃사공은 군복을 입은 채 계속 배만 응시하는 우리가 불쌍했던지 나중엔 그냥 태워주었다. 뱃사공의 따뜻한 배려로 겨우 한강 다리를 건넜다.
미군들도 밭에서 참외와 오이를 훔쳐 먹으며 피난행렬에 동참하고 있었다. 한강, 금강 일대에서는 아군을 적군으로 오인한 비행기 폭격이 수시로 있었다.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갔더니 미군이 집결해 있었다. 그런데 다시 군인들을 차에 태워 안양으로 올려보냈다. 남하하는 인민군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탱크가 밀려내려 오는데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보리밭에 숨었다가 인민군 탱크를 뒤쫓아 조금씩 내려왔다.
청주에서 회인으로 넘어가는 곳에 피발령이란 재가 있었다. 1개 소대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쌕쌕이’(제트기)가 폭격을 퍼부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며 가슴을 졸였다. 폭격은 나를 피해갔다. 남은 소대원들을 이끌고 황간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 체력도 전의(戰意)도 바닥났지만 오직 신앙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인민군에 포위됐을 때는 몇 번이나 내 목에 총을 갖다 댔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살고 싶어 사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어서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의 고비를 통해 생명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았다.
대구에 주둔하고 있을 때 공병학교 창설 지시가 떨어졌다. 난 공병학교 행정처장으로 발령이 났다. 김해로 내려갔는데 당시 김해군수의 협조로 농업학교 자리에 공병학교를 설립했다. 얼마 후엔 공병학교 특별부대인 철교중대 중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단시간 내 다리를 놓는 특수임무를 맡은 부대였다.
당시 미군은 장기적인 한국군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미군을 한국군으로 대체하는 게 비용이나 전략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 일환으로 한국군 장교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해 미국 본토의 공병학교에서 교육을 시켰다. 그렇게 해서 1952년 미국 버지니아 주 포트 벨보아의 육군공병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워싱턴DC까지 17일이 걸려 도착했다. 한국은 전쟁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지만 미국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했다. 당시 양유찬 주미 대사,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강영훈 준장이 무관으로 나와서 우리 일행을 영접했다. 난 무엇보다 ‘젊은 시절 못다 이룬 꿈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이뤄주시는구나’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공부했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곳에서 꿈같은 6개월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유학 후엔 진해의 육군대학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육군대학은 해군사관학교 내에 있었다. 나는 교관으로 고급 장교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거기서 마음껏 책을 보고 공부했던 기억은 지금도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7) 산업화 비전 품고 전역 후 비료회사로
1960년 부패한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은 4·19 학생혁명으로 물러났다. 이 혼란기를 수습하고 사회적 안정을 가져와야 할 정치계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휴전 상황에서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군의 일부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바라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61년의 5·16 군사정변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나는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정치를 비롯해 사회, 산업, 교육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누군가는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국애와 청년의 꿈을 키웠던 군복을 벗고 전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충주비료주식회사의 기획이사직을 맡았다. 한국 산업계에 봉사하기로 한 것이다.
농업이 주업이었던 60년대 한국 사회에서 비료 생산은 매우 중요한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료공장 추가 건설을 위해 덴마크에서 사람을 불러와 적정성 검사를 실시했다. 그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나주와 충주 비료공장 외에 3개가 더 있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당시 나주와 충주비료공장에서 생산하는 비료도 남아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보고를 수용했다.
그것은 적중했다. 공장을 세우는 족족 비료가 모자랐다. 그러다 보니 일본 회사와의 합작 기회도 많이 생겼다. 미쓰이, 미쓰비시사가 주로 그 대상이었는데 우리 회사는 미쓰이를 상대했다. 합작 내용 중엔 에탄올을 이용한 소주공장 건설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일본어를 잘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고 잘 상대해 주었다.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느낀 것은 당시만 해도 기술이나 문화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가 50년은 뒤처졌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많은 게 인간관계에 달려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바로 기업이라는 것이다. 상명하복의 군 사회에서는 지시와 복종밖에 몰랐다. 그러나 인간의 이해관계로 모인 기업에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화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이란 조직사회에서 경험한 것들이 큰 힘이 되었지만 경영 차원에서는 부족한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배움에는 지각이 없다’는 신념으로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힘겹게 마쳤다.
71년 충주비료 기획이사를 사임하고 한국에탄올과 한아통상을 실질적으로 경영했다. 일본의 앞선 산업기술과 경영정보는 과감히 도입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수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은 거부하고, 일본식 모델 중 필요한 것은 우리 상황에 맞게 활용하면서 창의적으로 개발한 부분들은 거꾸로 일본에 전수하기도 했다. 나는 친일파는 아니다.
그 때의 경험을 토대로 2004년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회상과 기대’라는 책을 썼다.
최근 일본 극우 정당 관계자들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는 문제로 또 다시 양국 관계가 틀어졌다. 이들의 울릉도 입성은 분명 막아야 한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 점령했던 땅을 아직도 자기들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양국의 과거사나 진실 문제는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8) 집에서 시작된 개척교회 장로가 되다
나는 할머니 때부터 감리교회를 다녔지만 결혼 후엔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와 장인 한상룡 장로가 예장에 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6·25전쟁이 채 끝나기 전에 분열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신학적 입장, 지역적 입장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언젠가 대전 집에 내려갔는데 10여명의 교인이 우리 집에서 예배를 보겠다고 모여 있었다. 전주의 한 목사가 장인에게 ‘대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데 기왕이면 당신 사위집에서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모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전 문화동 도청 뒤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장로가 없던 터라 내게 강권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장로 임직을 하게 됐다.
이후 군을 제대하고 충주비료공장 이사로 서울에서 근무할 때 기장 교회인 서울성남교회를 다니게 됐다. 교회가 자리한 서울역 맞은편의 동자동은 당시 ‘양동골목’이라는 유명한 사창가였다. 불량배가 많이 살았고, 지금도 쪽방촌이 있다. 다른 교단의 어떤 교회보다 먼저 서울성남교회가 구제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담임이었던 이해영 목사가 처음 구제 사업을 시작했다.
활발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잘 성장하지 못했다. 어려운 지역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회가 지역주민들을 전도해 교회로 인도하면 처음엔 교회에 잘 다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이사를 가는 게 흔한 일이었다. 지금도 무료급식, 노인대학 등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이어오고 있다. 은퇴한 지 오래된 장로가 됐지만 지금도 노인대학 강사는 여전히 하고 있다. 아흔을 코앞에 둔 노인의 활기찬 강의에 많은 노인들이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할 따름이다.
송창근 목사가 설립한 서울성남교회는 원래 천리교 본부 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 군정청이 되면서 일제 때 재산을 분배했고, 그걸 송 목사에게 준 것이다. 영락교회와 경동교회 터도 송 목사가 미 군정청으로부터 받아 각각 친분 있었던 한경직 목사와 김재준 목사에게 나눠줬다. 꾸준히 성장했던 영락교회나 경동교회와 달리 서울성남교회는 광복 1년 만에 화재로 전소되고, 송 목사도 6·25 때 납북되는 바람에 어려움이 많았다. 만약 송 목사가 납북되지 않았다면 교단 분열도 없고, 서울성남교회는 훨씬 위상이 높아졌을 것이다.
경건과신학연구소 이사장을 맡은 적이 있다. 연구소는 송창근 목사와 그의 제자 김정준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1999년 설립한 것이다. 경건과 학문의 조화로운 삶을 살다 간 두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한 연구소다. 한신대 총장을 했던 주재용 목사가 김 목사의 매부였다. 주 목사가 한신대 총장을 그만둔 뒤 연구소 초대 소장을 했고, 내가 초대 이사장을 했다. 연구소 사무실이 필요했는데 서울성남교회 배태덕 목사가 선뜻 내줬다.
하지만 기존 건물도 좋다는 교인들의 반발도 없지 않았다. 결국 내가 이사장을 맡아야 한다는 배 목사의 설득에 내가 이사장직을 수락했다. 지금은 배 목사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1년에 두 차례 공개 강연을 한다. 경건, 영성과 관련 신학대학 논문 등 자료 수집과 출판을 하고 있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장학 사업도 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이희조 (9·끝) 孝정신 확산에 인생 마지막 승부
일제의 억압과 한국전쟁은 한국인을 처절한 생존 위기로 내몰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나 또한 지난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일제의 길고 잔혹했던 억압 속에서도 믿음과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한국인으로, 신앙인으로 지낼 수 있었다. 빗발치는 포화 속에서 숱한 죽음의 고비를 맞았지만 그때마다 기적처럼 생명을 지켜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부족한 자에게 덕 있는 사람들을 붙여서 돌봐주셨다.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1999년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첫 번째 부인 못지않게 장점이 참 많다. 무엇보다 가정과 교회에서 모두 잘 섬기는 등 신실하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할머니, 어머니를 통해 어릴 적부터 내 마음에 믿음을 심어주셨다. 그들은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가끔 고향엘 갈 때마다 할머니, 어머니의 덕을 생각하고 깊이 감사하게 된다. 비록 지금도 유교 전통이 강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가정들이 많지만 두 분의 덕에 대해서만큼은 칭찬 일색이다. 두 분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던 것도 이런 분들을 기려야 한다는 동네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연로하지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내 인생 마지막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효훈련센터’를 짓는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나이 드신 분의 잔소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하고 공부해 봐도 그것밖에는 해답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경제는 과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나 발전했다. 앞으로도 이런 발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할수록 비윤리적인 사회문제는 더 많이 발생한다. 난 이 원인을 놓고 깊이 생각하고 기도했다. 가정 해체가 주요인임을 깨달았다. 내가 자라던 때와 달리 지금은 부모 자식간의 도리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부모는 너무나 쉽게 이혼을 하고, 자식들은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제 가정 문제는 너무나 보편화돼 잔인한 뉴스가 나와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정도다.
나는 감히 우리나라의 효정신을 글로벌화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미국은 청교도정신과 개척정신으로 나라를 세우고 움직였다. 효는 사라져가는 옛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살려가야 하고,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가장 경쟁력 있는 우리만의 정신이다.
요즘 독도와 관련한 문제로 또 다시 역사 공부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여기엔 정부의 딜레마가 있다. 역사는 결국 해석인데, 좌우가 나누어진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정부가 역사를 강조하는 것은 곧 또 다른 정파의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돼 왔다. 하지만 효는 다르다. 좌우의 구분이 필요없다. 공산주의 사회에도 부모가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도 부모가 있다. 어느 사회나 효를 필요로 한다.
효를 유럽 여러 나라는 이해하지 못한다. 동양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의식 있는 목회자, 평신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효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용기 장로가 가나안농군학교를 통해 농민들을 일깨우고 국민들을 일깨웠던 것처럼 이 효운동이 제대로만 시작된다면 금세 전국민 운동이 될 것이다. 이 생각을 하면 금세 가슴이 뜨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