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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부의 사랑이니까.
1. 향수
봄 내내
꽃 속에 살아도
바람만 들락날락 하는
허전한 마음자리
육신의 꺼풀 벗기면
오롯이 남는
그리움.
졸시 한 수로 촌부의 빗장을 연다. 제주도에 유채가 만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나는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다. 30년 전, 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농사꾼 총각에게 시집을 갔었다. 3월의 신부가 되어 유채꽃밭에서 폼을 잡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촌부의 길이 어떤 길인지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전원생활의 꿈에 부푼 철부지 신부였다. 나는 지리산 골짝에서 자랐지만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시로 유학을 갔었다. 그때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살던 나에게 농촌은 그리움이자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었다.
초등학교 친구의 소개로 농촌총각을 만나 사랑을 키우다 결혼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촌부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랐다. ‘농촌에 시집가서 어찌 살래. 고초당초 매운 시집살이는 어찌 해 낼 거며 재산이라고는 소작농 몇 마지기라는데 그 가난한 촌살림을 어찌 할래’ 친정 부모님과 언니들이 반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고집스럽게 결혼을 강행했었다. 직장상사가 일 년만 주말부부로 살면 시댁 근처로 발령을 내준다는 것도 마다했다. 철 밥통이라는 공무원 신분조차 과감하게 날려버릴 정도로 나는 깡마르고 시커멓게 그을린 농촌총각에게 반했던 것일까.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을 했고, 3개월 후,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시댁으로 들어가던 날, 새댁의 짐은 책장과 책만 한 트럭이었다. 바람이 술렁거리는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신혼 방은 잠실로 사용하던 두 칸 자리 난달 방이었다. 시멘트 블록으로 대충 만든 방이라 겨울이면 방안의 자리끼가 꽁꽁 얼 정도였다. 방 하나는 서재로 꾸며 놓고 혼자 좋아했다. 그 서재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겠다는 모탕 같은 꿈은 채 석 달이 못 가 산산조각 났지만.
새벽 잠 없는 시어머님은 다섯 시도 되기 전에 들에 나가셨고 농사일과 집안일은 산 너머 산이었다. 허벅지에 가래톳이 설 정도로 뛰어다녀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줄지 않았다. 축사에는 비육우가 예닐곱 마리에, 비닐하우스 다섯 동에는 고추, 메론, 수박 등이 돌아가며 자랐고, 문중 산의 밤나무, 벼농사, 마늘과 양파, 콩, 고추 농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일감이었다. 날마다 벗어내는 시퍼런 풀물과 누런 황톳물 든 작업복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씻어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혼수로 장만한 세탁기도 시어머님은 전기세 걱정하며 못 돌리게 했다. 빨래거리를 개울에 가져가 빠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때가 빠지지 않았다.
철부지 새댁은 개울에 빨래하러 가면 빨래는 대충해 돌 위에 척척 걸쳐놓고 세숫대야 들고 다슬기며 재첩을 잡고 미꾸라지며 버들치 같은 민물고기를 잡으며 놀다가 시어머님께 철딱서니 없다고 꾸지람도 왕창 들었다. 타작 철이면 날마다 코피를 쏟았다. 오죽하면 뇌에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고 근교 도시 큰 병원에 가서 뇌 검사를 했을까. 피로가 누적되어 그렇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나오며 몇 십 만원의 병원비가 아까워 쩔쩔 맸다.
“이 바뿐 철에 병원 갈 여게가 오데 있노?”
시어머님의 모진 소리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내가 시집 올 때만 해도 시댁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었고, 곤로를 사용했다. 나는 혼수품으로 장만해 갔던 가스레인지를 재래식 부엌에 설치하고 전기밥솥에 밥을 지었지만 시어머님은 전기세를 겁내며 불편해 하셨다. 신혼 방 아궁이에는 쇠죽을 끓였고, 그 온기로 겨울나기를 했다. 육이오 때 백마고지에서 파편을 맞은 시아버님은 장애인이셨고, 평생 농사꾼 노릇은 못하셨다. 농사일과 집안일은 시어머님 몫이었고, 시어머님은 당신의 살아온 인생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 나를 부리셨다. 여자는 시집을 가면 삼종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배워 온 나는 배운 티낸다고 할까봐 책 한 줄 읽는 것도 시어머님 눈치를 봤다.
그래도 틈만 나면 책을 보는 나를 시아버님은 참 곱게 봐 주셨다. 당신도 늘 신문과 책을 읽고 붓글을 쓰고 분재를 키우셨기에 책을 곁에 두고 사는 며느리를 곱게 보신 것이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 했든가. 나들이라도 다녀오실 때는 과일이든 빵이든 들고 와서 내게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시어머님의 눈 밖에 난 것도 시아버님의 편애 탓은 아니었을까. 여자에게 남편의 사랑은 살아가는 힘이다. 남편도 시아버님도 나를 편애하셨으니 말없고 속 깊었던 시어머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렸을까.
이듬해, 한창 모내기철인 유월에 첫 딸을 낳았다. 모내기랑 마늘과 양파 수확으로 한창 바쁜 하지였다. 산모는 병원에서 이틀 만에 퇴원하고 바로 부엌으로 직행했다. 시어머님은 남편을 낳을 때 흰 고무신에 양수가 불그레하게 흘러내려도 아침을 짓고 들일을 했단다. 그때, 시고모님께서 일을 도와주고 계셨는데. 촌부는 아이 낳아 놓고 모꾼 밥해서 이고 십리 길을 오갔다며 산모가 일을 해야 몸이 빨리 야문다고 하셨다. 철부지였던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병원에서 오자마자 부엌에 들어가 삼시세끼를 챙겼다. 삼칠일 동안 산모의 몸조리는 필수요. 석 달 동안 꾸준히 먹어줘야 한다는 미역국을 일주일 만에 끝냈다. 내 손으로 끓여 먹는 미역국이 싫어서 그랬는지, 두 가지 국을 끓이기 귀찮아 그랬는지 모르겠다.
“산모가 미역국을 무야 젖이 풍부한데. 와 안 끼리 묵노?”
“괜찮아 예. 미역국이 먹기 싫어 예”
라고 대답했다.
친정에 가서 산후조리를 했으면 산후병을 얻지 않았을까. 아이 낳고 산후조리 못해서 얻은 병은 평생을 간다고 했다. 한 여름에 노산으로 첫 애를 낳고 찬물로 목욕을 했으니 내 몸이 온전할 리 없었다. 평생 고생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젊었으니까. 건강했으니까. 병치레라고는 해 본 적 없이 시집 왔던 내가 촌부의 햇수가 거듭날수록 병치레를 하게 된 것도 산후 조리를 잘못한 탓이라는 것을 이순이 지나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년생으로 아들이 태어났다. 나는 두 아이 엄마가 되었어도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 5학년, 여름 학기에 시아버님께 두 아이를 맡겨놓고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시어머님은 막내시누이 산후조리를 해 주러 서울에 가고 없었을 때다. 이틀 만에 시아버님이 병이 나셨다. 두 아이 때문에 졸업을 포기해 버렸다. 졸업사진 첩만 서재 구석에 놓여 있다. 펑크 난 몇 과목을 못 메워서 수료로 끝난 것이다. 졸업장 따려면 학교 다닐 필요 없다는 남편의 말 한 마디가 씨가 되어버렸다. 작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내게 대학졸업장보다 문학에 대한 공부가 더 간절했다.
그렇지만 독서와 글쓰기는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백일장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굵직한 상도 탔다. 신문이나 잡지에 내 글과 얼굴이 심심찮게 실렸다. 원고료는 나만이 간직할 수 있는 비상금이기도 했다. 지금도 고단한 농촌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글쓰기의 힘이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틈만 나면 책을 본다. 내게 책과 글이 없다면 열악하고 힘든 농촌에서 자리매김하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해가 지고 어두워진 후에야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고, 어미 품에서 보채는 두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나를 다독거린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나는 농촌에 시집 온 이래 이농 한 번 못 해 봤다. 두 아이가 집을 떠나 도시생활을 해도 촌부의 자리에 강력 접착제가 붙었는지 떨치지 못했다. 그 사이 두 아이는 장성해서 대학원생이 되었고, 상노인이신 시부모님도 건재하시다. 나는 여전히 봄에는 고사리 농사, 가을에는 단감 농사짓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됐다며 너스레를 푼다.
지금도 유채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아련한 그리움에 젖는다. 내가 살아온 촌부로서의 30년 세월, 여전히 나는 행복한가. 여전히 나는 후회하지 않는가. 반생을 회고하는 셈치고 흙길을 돌아보니 유채꽃이 먼저 향수를 불러온다.
2. 촌부로 걸어온 길
1987년, 촌부의 첫 십 년은 생업이 벼농사와 마늘농사, 고추농사, 콩농사, 밤농사에 겨울농사로 비닐하우스 특수 재배를 했었다. 여름에는 벼농사를 짓고, 서너 마지기 소작논에 마늘농사를 지었지만 겨울에는 비닐하우스에서 고추와 메론, 수박 농사를 지었다. 농업인 후계자 자금으로 산 논 다섯 마지기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남편과 시어머님과 나는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일에 치어 살았다. 마늘을 수확하면 도시의 아파트촌에 싣고 가서 팔았고, 벼는 수매를 했고, 고추나 콩은 읍내 장에 가서 팔았지만 경제권은 시아버님이 쥐고 계셨다.
시집 올 때 가져왔던 비상금은 소리 소문도 없이 빠져나갔다. 퇴직금과 저축했던 돈은 남편의 발이었던 자전거가 오토바이로 바뀌었다가 1톤 트럭으로 바뀐 것과 상반되게 마지막 비상금을 털어 표고버섯 재배에 뛰어들었다. 표고버섯도 다른 작목과 마찬가지로 투자금 회수도 못하고 빚만 떠안는 꼴이 되었다. 국가에서 주는 저리 융자금은 농가 부채만을 키웠다. 농산물 판매로 얻은 수익은 매달 쓰는 생활비와, 매년 들어가는 이자와 원금 갚기에도 턱 없이 부족했다. 시집살이 오륙 년 사이 시누이와 시동생이 시집 장가를 갔다. 마구간도 비고 곳간도 비었다. 나는 더 이상 농촌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소리쳤다.
“더는 희망이 없어. 농사 지어 애들 뒷바라지도 못하겠어. 나 직장 나갈래.”
1992년,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 분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남편은 시댁 농사며 문중의 대소사를 도맡아 하는 입장이라 시아버님은 분가를 반대하셨지만 남편은 완강했다. 시댁을 오가며 농사를 짓고 문중 대소사를 맡아하는 조건으로 분가를 허락 받았지만 우리는 빈손으로 시댁을 나와야 했다. 빈손만이 아니었다. 시댁 빚까지 몽땅 안고 나왔다. 시집 온지 다섯 해 만이었다. 윗동네 남의 빈집을 빌렸다. 재래식 아궁이를 고쳐 연탄보일러로 바꾸고 마당가에 수도꼭지를 설치했다. 마당 넓은 집이었다. 삽짝을 지키는 고목이 된 감나무 한 그루 멋졌다. 나는 <마당 깊은 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집에서 이태를 살다가 국가의 저리 융자를 얻어 그 골짝의 다랑이 일곱 도가리를 샀다. 동네에서 오리쯤 떨어진 외딴 산중턱이었다. 염소를 방목해서 키우기 위해서였다. 다랑이를 합쳐 터를 다졌다. 남편과 블록을 사다 얼기설기 집을 짓고 집 뒤에 축사를 지어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낮에는 염소들을 산에 풀고, 밤에는 염소우리에 가두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아침이면 남편은 유치원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출근을 했다. 시어머님과 논밭 농사를 짓고, 나는 홀로 염소 대장이 되어 300두가 넘는 염소를 돌보는 것이 일과였다. 건강원도 함께 운영했었다. 산골 외딴집, 혼자 노는 것을 배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2002년, 십 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집 앞으로 지방도가 개설되면서 집이 도로에 편입 되었다. 자연히 염소 방목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우리는 다시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국가에서 쥐꼬리만큼 준 보상금으로는 살림집조차 번듯하게 지을 수 없었다. 주택 융자를 받았다. 남편은 나무 다루는 것을 좋아한다. 외삼촌이 목수였던 영향인지 손재주가 좋다. 손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면소재지 초등학교를 개축하면서 뜯어낸 골판지와 동네 재실을 지으면서 뜯어내 버리는 헌 재목을 구해와 씻고 다듬어서 전원주택을 지었다. 나는 자투리로 꾸민 짜깁기 집이라고 부른다. 물론 부부 싸움도 오지게 했다. 7개월에 걸려 나무집을 완성하고 남편은 죽을 것처럼 앓아누웠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신 없이 나 혼자 여기 못 살아.”
나는 나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남편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염소농장을 접은 대신 생계를 위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야 했다. 부지런한 솜씨꾼 남편은 농사를 짓는 틈새를 이용해 마당 옆에 아담한 황토 집을 지었다. 염소 막으로 쓰던 축사를 목재 작업장으로 개조해서 목수 일도 병행 했다. 남편은 직접 구해 온 고목을 다듬어 찻상을 만들었다. 나는 <나무그늘>이라는 당호를 걸고 찻집 운영을 시작했다. 한창 녹차가 참살이 바람을 타고 인기를 끌 때였다. 임대한 논에 우리밀을 심었다. 직접 심어 거둔 우리밀을 재래식 방앗간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밀가루로 빻아왔다. 우리밀수제비와 녹차와 황차, 대용차를 팔았다. 지인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주었다.
나는 처녀시절부터 커피보다 녹차를 사랑했다. 지금도 봄이면 찻잎을 따서 덖음 차나 발효차를 만들어 먹는다. 우리는 농사와 찻집 운영을 병행했다. 집 앞 산에다 녹차 밭을 꾸몄다. 하동에서 녹차 씨를 사다 아이들과 함께 심었다. 현재 십 수 년생이 된 녹차 밭은 멋지게 어우러졌지만 녹차 역시 생활고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농사꾼으로 반생을 살아온 우리에게 장사 수완이 있을 수도 없었고 손님 시중드는 것은 남편의 성격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산골 살이 좋다 해도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나는 허리디스크와 퇴행성관절염을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입소문으로 찾아들던 손님에게 미안했지만 이태 만에 폐업을 했다. 가끔 생각한다. 예쁘고 아늑하다고 소문났던 찻집 <나무그늘>, 우리밀수제비는 아무리 먹어도 속이 편하다고 자주 찾던 손님들, 아마추어 목수가 만든 투박한 모양새지만 자연그대로를 살렸다고 찻상을 주문해 주셨던 손님들, 늘 고맙다. 농사짓기와 찻집 운영의 병행이 힘들어도 찻집을 폐업하지 않고 계속 했더라면 지금쯤 우리 고장의 명소로 자리 잡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찻집을 접으면서 고사리 농사를 생각했다. 십 년 전만 해도 우리 고장에는 고사리 농사를 짓는 집이 없었고, 전라도 운봉과 지리산 두어 곳에서 고사리 농사를 짓는다는 입소문만 들었다. 다시 고사리 농가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하고 실상을 확인했다. 집 아래 버려둔 묵정이를 임대해서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몇 날 며칠 굴착기 작업을 하고, 주말이면 두 아이도 일터로 밀어 넣었다. 온 식구가 매달려 풀뿌리를 캐낸 후 흙을 고르고 거름을 낸 후 지리산 인근의 고사리 농가에 가서 고사리 뿌리를 직접 사다 심었다. 우리 고장에서 처음 시작한 고사리 농사였다. 또한 틈새에 찰옥수수 농사, 산초나무 농사도 짓는다. 단감 과수원도 임대해서 단감 농사도 짓는다. 일복 많은 것이 촌부다.
터전, 아들이 네 살 때 이곳 산중턱의 외딴 집으로 들어왔었다. 친구 없는 외로움을 책과 공부로 풀었던 두 아이는 읍내 중학교를 졸업 하고 간디 대안학교에 이어 대학원생이 되었다. 두 아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둘 다 인문학이라 배고플 것 같지만 스스로 원하는 길이라면 행복한 인생살이가 될 것이라 믿는다. 남매는 내게 희망이고 자랑이다. 남매는 늘 성적우수 장학금에 대내외 굵직한 상을 타 와서 나를 행복하게 했다. 열악한 농촌 살림에서 기죽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자라 준 두 아이는 여전히 내겐 살아가는 힘이고 희망이다.
그 사이 나는 작가의 꿈을 이루었지만 작가로 불리기보다 촌부로 불리는 것이 편하다. 글 쓰는 일은 천형이고 농사는 천직이라 믿으며 산다. 또한 연로하신 시부모님 수발드는 일도 내 몫이다. 내게 농사는 생업이지만 글쓰기는 농촌에서 붙박이로 살아가는 힘이다. 농사나 글이나 돈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옳은 농사꾼, 옳은 글쟁이 소리를 듣고 싶은 욕심은 아직 못 버리고 살기에 주경야독은 습관이 되었다. 글쟁이로 사는 것이나 촌부로 사는 것이나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큰다고 한다. 무엇이든 정성을 들이면 수확은 따라온다. 아쉬운 것은 장사꾼이 못 되어 늘 아랫돌 빼서 윗돌 공구는 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지만.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촌부다. 자급자족할 정도 농사만 지어도 좋을 때가 오겠지만 아직 괜찮다. 평생 촌부로 자리매김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참 여유롭고 좋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책과 농사를 벗 삼아 살아가는 지금 이대로도 좋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겠나. 노력한 만큼 수확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촌부의 힘 아닐까.
3. 고사리 밭에서
2017년, 환갑 년을 맞은 나는 여전히 사월 중순부터 고사리 밭에서 산다. 사방에 꽃들이 만개해도 상춘객이 도로를 메워도 그 상춘객 대열에 끼어들 틈이 없다. 고사리 꺾다가 마음 내키면 놉으로 오신 동네 할머니들과 뒷산 꽃 잔치 구경도 가고, 몸이 고단하면 일 탁 접어버리고 멀거나 가깝거나 숯불 가마에도 가고, 바닷바람도 쐬고 온다. 아흔 살 넘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맛 집 순례도 자주 한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했다. 마이너스 통장은 열심히 고사리와 단감 농사 지어 팔아서 갚으면 되고, 또 마이너스로 살아도 농사지어 갚을 여력이 남아 있다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
“고사리를 원도 한도 없이 꺾어보네. 고사리 꺾는 일이 이래 재밌는 줄 몰랐어요.”
처음 고사리를 꺾어주러 온 귀농한 형님은 재미있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 형님이 앓아누웠다. 겨우 대 여섯 번 고사리 꺾어주고 몸살로 드러누웠지만 눈앞에 고물거리는 고사리와 들밥 때문에 가만히 누워있지를 못하겠다고 하소연이다. 빨리 일어나 고사리 꺾어주러 가야겠다고 넋두리를 하고, 여든의 앞뒤 집인 동네 할머니 두 어른은 먼저 전화를 하신다.
“아요? 낼이나 모레 새 꾀사리 꺾어야 안 되나? 꾀사리가 좀 올라 왔더나? 비가 질금질금 와야 꾀사리가 쑥쑥 올라 올긴데. 가무새 타서 우짜노?”
고사리 농사 걱정해 주는 두 할머니는 십년이 넘도록 우리 집 고사리를 꺾어주신 베테랑이다. ‘내년에도 이 집 고사리 꺾어주러 올 수 있을 랑가.’하실 때는 가슴이 찡하다. 나도 다리와 허리가 아파 약을 먹어가며 고사리를 꺾지만 두 할머니는 오죽 힘드실까 싶어 새참과 점심 한 끼라도 정성껏 마련해 드리려고 애를 쓴다.
우리 동네는 귀농 인구가 는다. 육십 대 중반의 귀농 형님 같은 분이 두엇만 있어도 내년 고사리 꺾을 걱정은 없겠는데. 촌로는 한 해가 다르다. 고사리 꺾어주시던 할머니 한 분도 치매환자가 되셨다. 품앗이도 놉도 사라져가는 농촌, 자꾸 늙어가는 농촌, 환갑 년을 맞은 내가 막차를 탄 기분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젊어지는 농촌, 젊은이가 돌아오는 농촌, 촌부가 대접받는 세상이 열릴 테니까. 자연은 날마다 다른 모습으로 반겨주기 때문에 경이롭다. 고사리 포대 들고 밭골 헤매다가 논두렁에 퍼질러 앉아 맞이하는 청량한 바람과 나풀거리는 녹색의 향연은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 걸작의 전시장이다. 산야 어디든 쳐다만 봐도 곱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이 하는 일은 공평하다. 농사가 풍년이 들던지 흉년이 들던지 철따라 어떤 작물이든 심고 가꾸는 일에 신명을 다 하는 것이 촌부고 촌부의 사랑이니까.
“아요? 꾀사리 필요하모 주문 해 주이소. 우리 집 꾀사리 참말로 맛나 예.”
첫댓글 할 수 없소. 이미 소문은 났으니 글 여기 올리오.ㅋ
래녀언니 감사합니다 언니집 꾀사리 최고 맛난것 맞습니다
ㅎㅎ 아우님, 고마워! 우리 집 꾀사리 맛나다는 소문이 이미 났는데. 꾀사리 꺾기 자꾸 힘들어 ㅋ
박래녀 쌤! 글 잘 읽었어요. ㅎㅎ 혼자 상상에 나갔다 들어왔다를 겪을 줄 알았는데 순탄하게 살았네요. 감사해요.
순간의 선택이 평생가는 우린 역시 동지죠.
순탄하게 산 것 맞아요. 마음 힘들지만 삭이면서 사는 것도 촌부의 일면이겠지요. 길숙 샘, 그대도 멋져요.^^
래녀언니 훌륭하시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정말 수고 많이 하시면서 사셨네요 앞으로는 이제 몸만 생각 하세요 언니가 건강 해야 온 식구가 행복하니까요 언니 아무쪼록 건강하세요
봉희 씨, 반가워요. 노란 원피스 입은 그대 모습이 선하네요. 우리 회원들 모두 멋져요. 우리가 있어 농촌이 빛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촌부의삶이결코고달픈것만은아니지요.글잘읽었습니다.신혼이없던예전에내모습을봅니다.산모가고통을잊고다시또임신하여산고를치루듯철따라씨앗을뿌리는것이진정한농부가아닐런지요.축하드립니다.
ㅎㅎ 촌부의 사는 일은 비슷비슷 하리라 생각해요. 두릉 댁 고마워요.^^
래녀샘 글 잘 읽었습니다. 읽기만해도 한참 걸리는데 글 쓰시느라 얼마나 고생 많으셨어요. 글의 솜씨야 말해 무엇하나요. 모두가 대상감인걸요. 참으로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시부모님 잘 모시고 남편을 사랑하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에 읽는 내내 제 마음도 행복했습니다.
래녀샘의 아름다운 삶은 긍정의 힘에서 오는게 아닐까요?
자랑스런 래녀샘~~언제나 건강하세요~^^
ㅎㅎ 어른들 모시는 일이 자꾸 힘들어져서 가능하면 짐을 비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함께 늙어가는 처진 걸.ㅋ 그래도 삶은 여전해요.^^ 유송 님, 고마워요. 그대에게 복을 ^^
래녀씨 남편을 잘 만나 농촌에 살고있으니 행복해보여 보기좋습니다 시부모님께 잘하면 내 자식이 잘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많이 받을겁니다 언제나 래녀씨 글을 읽고 있으면 제가 더 행복해집니다 수기 수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종순 씨 반가워라. 늘 그대랑 보영 씨 생각나요. 고마워요. 촌부로 사는 일 비슷하잖아요. 다들 힘들어도 밝게 웃고 사는 우리 문우들 참 좋아요.^^
히유 ....삶이 눈에 보이네요,,,그 맘이 왜이리 가슴에 와 닿을까요?..엉겁결에 시집이라고 와서 겪은 내 절망이 뒤돌아 보이네요,,
잘 사셨습니다,,,글고 지금은 행복해 보여요,,ㅎㅎ..추카드립니다,,,진심으로
ㅎㅎ 우리 모두 잘 견디며 살아오고 있잖아요. 찌지고 볶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잖우.^^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