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계속해 가는 일
5년 전 6월, 어느 토요일 이사를 한 날이었다. 짐 정리를 하느라 저녁 늦게까지 창문을 열어 놓았고 그날 밤바람이 꽤 차가웠다. 저녁을 먹고 깜빡 졸았는데 발이 시려 잠에서 깼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지만 출근해야 했으므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일요일은 방송통신고등학교 수업을 해야했다. 감기가 자주 걸리는 편은 아니어서 곧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 여섯 시간이나 수업이 있는데 갑자기 결근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아픈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출근을 했다.
그런데 열이 점점 더 오르고 몸이 가라앉았다. 여섯 시간의 강의가 모든 끝난 시간은 네 시였다. 마이크를 사용하며 수업을 했는데도 수업이 끝나자 목소리가 잠겼다. 마지막 시간에는 거의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아, 하고 몇 번씩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당장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칠판을 꽉 채워 필기만 하기도 했고, 컴퓨터에 해야 할 말을 입력하여 스크린으로 띄우기도 했다. 이런 시간이 한 달 넘게 계속되었다. 병원에서도 별다른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학생들도 처음에는 놀리기도 하고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곧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무뚝뚝한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이 선생님 힘내라는 말을 건네왔다. 밤에는 열 때문에 잠을 설쳤고, 아침에는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깨워 줄 사람 없어 눈을 떠 보니 여덟 시가 넘은 적도 있었다.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여덟 시가 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영영 목소리가 안 나오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거의 두 달이 걸렸다. 계속된 열, 두 달 내내 먹었던 약으로 다른 병을 얻었다. 왜 이렇게 오래 앓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마흔 중반의 나이가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마흔이 넘으면 한 번쯤 건강에 큰 위기를 겪는다는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과로가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즈음 체력적으로도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넘어서 일하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을 하고, 격주로 일요일에 또 6시간의 수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스트레스가 있었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던 때였다. 그리고 지지 않기 위해, 대항하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건강을 위협했고, 삶을 흔들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이가 든다는 것, 혼자 산다는 것, 그리고 삶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서른 중반 즈음에 나이든 삶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시작은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것에서부터였다. 이미 십 년 넘게 해 온 일이지만, 일의 무게는 늘 무거웠고,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점점 커졌다. 마흔에는 그만둘 수 있을? 호기롭게 사표를 들이밀던 이십 대 때와는 달랐다. 먹고 사는 일은 중요했다.
한편 일을 그만두자니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무게가 느껴졌다. 서른이 되면서 우연한 기회로 독립을 하게 되었고 나는 혼자 사는 삶에 익숙했다. 원래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혼자 살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나 혼자만의 힘으로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그런데 젊을 때, 건강할 때는 그래도 어떻게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이가 들면, 병들면, 이렇게 생각하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누가 나이 들어 아프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면 “요양원 가야죠. 지금 돈 버는 것 잘 모았다가 나중에 요양원 비용으로 다 쓸 예정입니다.”라고 자조적으로 대답해 버리곤 했다.
어차피 혼자인데 큰 병에 걸린다면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가 암에 걸렸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업을 지키기 위해 현대 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자신을 생명을 맡기기는 것을 거부하고 죽어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독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답을 찾지 못하고 미뤄둔 지 근 십 년 만에, 걱정했던 시간이 진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생각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될 것이었다. 병이라는 것이 그 자체도 고통이지만, 그것만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어쩌면 몸이 좋지 않았을 때 일을 바로 쉬었으면, 더 빨리 몸이 회복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병이 또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을 일시적으로라도 중단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상태로 일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병이라는 것이 꼭 신체적인 원인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스트레스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견디라고, 힘내라고, 쉬라고, 취미 생활을 하며 풀어보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조직 안에서 한 존재로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함께하는 동료가 있어서 서로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외롭게 버텨야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을 버틴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때로는 혼자 감당하겠지만, 앞으로 겪게 되는 많은 시간에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 몸이 아파 스스로 움직이기도 힘들 때, 마음의 고통으로 해가 져도 불을 켤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예측할 수 없던 일 앞에 끌려 나오게 되었을 때, 나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나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그리고 나에 비추어 또 다른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앞으로 이 숙제를 풀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게 될 것 이다.
첫댓글 마음이 무거워지는 글입니다. 고독사 노인 발견 같은 뉴스를 들으면 혼자 산다고 다 고독한가 하는 반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막상 혼자 돌아가신 분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니까 그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같이 산다고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나, 돌봄이 필요할 때는 마음이 다급해질 것 같아요. 종이님의 고민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언급이 있으셨는데, 그게 이 글의 메시지인 것 같아요. 숙제를 해결하면 도 글로 풀어주세요.
갑자기 목소리가 안나오는 경험, 생각만해도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종이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을 생각조차 안하고 살고 있었구나 반성하게 되어요. 인생은 누군가 내민 손을 붙잡고 끊임없이 손을 내미는 순간들의 연속이라는..어디선가 본 글귀도 떠오르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돌봄, 은퇴, 일상 그리고 사회 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감정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는 독립하여 온전한 일인분의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 대부분 럭셔리한 일상, 자유 등 다양한 환상으로만 꾸며지는게 현실입니다. 종이님의 용기있고 담담한 고백이 더 와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목소리를 매일 써야하는 일에 갑작스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일상속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을 상실하면서 오는 괴로움이 얼마나 두려우셨을까요. "또 다른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는 부분에서 이미 그 숙제의 도입부를 성실하게 해놓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증이나 아픔에 더해 혼자 돌보는 삶에 대한 내용도 들어있네요. 아픔에 가족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면서 혼자 나이 들어 스스로를 챙길 모습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거 보니 전 아직 이 프레임을 깨기엔 많이 멀었나 봅니다. 혼자 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이 많아 관심이 갑니다. 숙제 해결하시면 글 또 올려주세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삶을 계속 해가는 일의 무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네요. 묵혔던 고민이 몸의 변화로 떠오른 사건은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아요. 그 고민 잘 이어가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어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