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근본불교의 지향
3. 여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
순리를 따르는 도
여기서 다시 한 번 부처님을 찾아온 어떤 내방자와 오고간 명쾌한 문답 한 가지 더 살펴본다. 다음 경(남전 중부경전 107산수가목건련경 算數家木犍連經. 한역중아함경 144 산수가목건련경)은 부처님이 사밧디의 동쪽 숲 미가라마스 파사나에 계실 때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때, 가나카 목갈라나라는 바라문이부처님을 찾아와 인사하고 그 옆에 앉아 이런 질문을 던졌다.
“부처님, 제가 여기로 오는 데도 순서대로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문으로 하는 산수에서는 순리를 따라 공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당신이 가르치는 진리와 계율에서도 순리를 공부하는 방법이라든가 그런 길이 마련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가나카 목갈라나는 한역에서 번역하고 있는 그대로 산수를 잘 하는 목건련이었다. 그는 사리풋타와 함께 부처님께 귀의한 마하 목갈라나와는 또 다른 인물로써 대단한 산수의 전문가였던 듯하다. 그의 질문도 매우 전문가다운 측면이 보이고 있다. 방문자의 이런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바라문이여, 물론 내가 가르치는 진리와 계율도 순리를 쫒아 공부하는 방법과 그런 길이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능숙한 조마사가 좋은 말을 가지면 먼저 그 머리 부분을 단련하고 정확하게 붙들어 맨다. 그리고 나서 여러 가지 조절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라문이여, 나 또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면 먼저 그가 성스러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한다. 즉 비구에게는 먼저 계율을 구족할 것을 가르친다.”]
이렇게 말문을 연 부처님의 설명은 잠시 동안 계속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먼저 마땅히 계를 구족한 자가 되라고 교시한다. 그것이 되면 다음에는 육근(눈 귀 코 혀 몸 의식)의 문을 잘 지키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비구들에게 식사의 양을 조절해서 탐욕하지 않고 바른 생각으로 식사를 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만약 수행자들의 아란야에 앉아서 탐욕을 잃고 분노를 잃고 혼침을 떨치고 불안을 떠나 의혹을 벗고 지혜로서 번뇌를 제거하게 한다. 나아가서는 모든 집착과 불선(不善)을 떠나 무상안온의 경지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
이 대목을 읽으면 부처님이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제자들이 가르쳤는가를 알 수 있다. 즉 먼저 계를 받아 지니도록 하고 육근을 단속하는 훈련을 하며, 식사에 탐욕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친다. 아울러 아란야에 혼자 머물 때는 어떤 방법으로 수행해야 하는가를 자세히 일러주셨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에 대한 순서를 말하는 것을 들은 가나카 목갈라나라는 바라문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럼 부처님, 이런 점은 어떻습니까. 부처님이 가르치는 대로 수행하는 제자들은 과연 모두가 다 궁극의 목표인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내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가르침을 잘 따르기 때문에 궁극의 목표인 열반에 이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자 바라문은 다시 물었다.
“부처님, 정녕 열반이라는 것이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부처님께서 그곳으로 인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인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누구는 열반에 이를 수 있고, 또 누구는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라문이여,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먼저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너의 생각을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 바란다. 바라문이여, 너는 라자가하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부처님이 상대방과 토론을 하거나 설득을 시키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는 크로스퀘션, 즉 반문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사밧티에서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은 당시 중인도에서는 간선도로였다. 수학자인 바라문이 그 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잘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처님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바라문이여,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너에게로 와서 그 길을 물었다고 하자, 그러면 길을 잘 아는 너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라자가하로 가는 길이요. 얼마쯤 가다보면 이러 이러한 마을이 있을 것이요. 거기서 좀더 가면 이러이러한 거리가 있을 것이요... 그곳을 지나 잠시 더 걸어가면 마침내 아름다운 동산과 연못이 있는 라자가하라는 도시에 이를 것이요.’ 라고. 길을 묻는 사람이 당신의 말을 믿고 그 길로 간다면 그는 라가가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알고 엉뚱한 곳으로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라문이여, 이처럼 정녕 라자가하라는 도시가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친절하게 그 곳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원인과 인연으로 누구는 그 곳에 안전하게 도착하고 누구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인가?”
“부처님,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길을 가리켜 줄 뿐이지요.”
“바라문이여, 그와 같은 것이다. 정녕 열반이라는 것이 있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고, 또 그곳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바로 인도자이다. 내 제자 가운데는 나의 말을 믿고 내가 가르치는 대로 수행하여 마침내 궁극의 목표인 열반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바라문이여,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이니라.”]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키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이 문답의 결론으로 한 말이다. 이 경을 처음 대할 때 우리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그분은 왜 좀 더 자상하게, 어떤 종교가처럼 자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왜 ‘여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경에서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한 어쩌면 냉정하기까지 한 그 말씀은 몇 번이고 음미하다보면 그 속에 참된 도리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의 사랑을 더듬으면서 또, 실천을 위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살펴오는 동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다고나 할까 하여튼 기존의 종교가와는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방법’이란 영어로는 메서드(method)인데 그리스어인 ‘메토도스(methodos)'란 말은 원래 ‘메타(meta:after) +호도스(hodos:way)’ 즉 ‘길을 따라서’란 뜻이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의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부처님의 방법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 바로 메토도스 즉 ‘길을 따라서’란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말에서 부처님은 열반이라는 목적에 이르는 방법은 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공부하는 순서가 있느냐는 수학자 가나카 목갈라나라는 바라문의 질문에 부처님의 대답은 ‘나의 가르침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의심을 풀기 위해 좀 더 자세하게 비유를 들어 설명 하고 있다. 사밧티에서 라자가하에 이르는 당시 인도의 간선도로를 예로 들면서 그 길로 가면 라자가하에 이를 수 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면 마침내 궁극의 목표인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부처님이란 분은 어떤 길을 가셨던 분일까?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사유하여 그와 같은 사상체계에 도달하신 것일까? 우리는 지금 그러한 길, 그러한 사유, 그러한 사상과 실천방법을 물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첫댓글 나무아미타불_()()()_
根本佛敎理解 - 86. 如來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 ① 順理를 따르는 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