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노트 54
< 수행 노트는 1996년도부터 미얀마 마하시 명상원의 수행지도 스승과 한국인 수행자들의 수행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참고는 수행자를 돕기 위한 묘원의 글입니다. >
질문 : 좌선을 하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답변 : 좌선을 하면서 소리가 들릴 때 마음이 고요해고 집중이 되면 작은 소리에도 크게 놀라게 된다. 어떤 때는 귀가 아플 수도 있다. 심한 경우가 아니면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뒤에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려라.
< 참고 >
수행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수행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집중이 되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작은 소리에도 크게 놀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리에 놀라거나 다른 일이 일어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크게 소리가 나면서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집중이 되면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놀란 마음을 알아차리고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느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런 뒤에 느낌이 고요해지면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이 순간에 호수에 던지 돌은 놀란 마음이고 파문이 일어난 것은 가슴의 느낌입니다. 마음은 순식간에 일어나서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마음이 남긴 느낌을 가슴에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수행을 하는 중에 때로는 귀가 먹먹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침을 삼키면 이런 증상이 없어집니다. 집중이 되지 않았을 때와 집중이 되었을 때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어느 것도 놀라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 중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스승에게 보고해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일도 크게 생각하면 걱정이 생겨 집중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을 하다 나타난 현상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질 때는 반드시 수행을 하다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만 바르지 못한 수행을 할 때는 문제가 생기거나 도의 길을 벗어나서 삿된 길로 갈 수 있으므로 스승에게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2. 질문 : 좌선 중에 다리에 통증이 심해서 견디다 못해 다리를 펴기도 합니다.
답변 : 느낌을 견디기 어려울 때는 다리를 펴도 좋다. 다만 이때 ‘다리를 펴려함’ ‘다리를 펴려함’하고 알아차리면서 하라. 그런 뒤에 ‘다리를 폄’ ‘다리를 폄’하고 알아차리면서 다리를 펴라. 다리를 폈다가 다시 오므리려고 할 때는 ‘다리를 오므리려함’ ‘다리를 오므리려함’하고 알아차린 뒤에 ‘다리를 오므림’ ‘다리를 오므림’하고 알아차리면서 다리를 오므려라. 어떤 동작이나 알아차리면서 하면 움직여도 좋다. 괴로운 느낌은 누구나 겪는 현상이다. 다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아픈 느낌은 쉽게 사라진다. 수행을 할 때 느낌을 밀착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좌선을 할 때 어떤 행동이나 불가피한 행동은 해도 좋으나 모두 알아차리면서 해야 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 참고 >
미얀마에서 스승과 수행에 대한 인터뷰를 할 때 통증을 웨다나(vedanā)라고 합니다. 그러나 빨리어 웨다나(vedanā)는 느낌이란 뜻입니다. 느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움은 느낌, 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덤덤한 느낌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도 합니다. 즐거운 느낌은 수카 웨다나(sukha vedanā), 괴로운 느낌은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 덤덤한 느낌을 우뻭카 웨다나(upekkhā vedanā)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행을 하면서 생긴 통증은 정확히 표현하면 둑카 웨다나(dukkha vedanā)인데 그냥 웨다나(vedanā)라고 합니다.
즐겁다는 뜻의 수카(sukha)는 행복이라도 합니다. 괴롭다는 뜻의 둑카(dukkha)는 불행, 고(苦), 고통이라고도 합니다. 덤덤한 느낌을 표현 할 때 사용하는 우뻭카((upekkhā)는 말은 원래 평등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느낌에서만 우뻭카 웨다나(upekkhā vedanā)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또 평등이라는 의미가 아닌 무관심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평등은 알아차림에 의해서 생긴 균형이지만 무관심은 알아차림이 없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멍한 상태의 느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느낌에서 우뻭카라고 할 때는 평등으로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행복과 불행이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은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내가 소유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무아입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을 느낌으로 보면 나의 행복과 불행이 아니고 단지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일 뿐입니다. 누구나 단지 일어나서 사라지고 없는 것을 기억해서 나의 행복과 불행으로 알고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좌선을 할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이면 집중력이 생기기 않기 때문입니다. 통증이 있다고 자세를 바꾸면 통증에 반응한 것입니다. 이때의 반응은 싫어하고 좋아한 것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통증 때문에 자세를 바꾸는 것은 미세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미세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무심히 바꿉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세 가지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작용한 것입니다. 몸이 가려울 때도 신경질적으로 긁는 것도 미세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권장합니다. 통증에도 자세를 바꾸지 않으면 인내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얼마간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통증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수행이 이로운 것은 미세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세한 부분에서부터 선하지 못한 마음이 제어되어야 차츰 더 큰 선하지 못한 마음이 제어되어 고질적인 괴로움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플 때 절대 자세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못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 이런 원칙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이 극단적인 투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 자체가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자세를 바꾸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렇다고 절대 바꾸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아플 때는 자세를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자세를 바꿀 때 먼저 자세를 바꾸려는 의도를 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자세를 바꿀 때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바꿉니다. 이렇게 의도를 낸 뒤에 몸을 움직이면 위빠사나 수행의 1단계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이때 의도는 정신이고 움직임은 물질입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알아차리면 2단계 지혜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몸을 바꾸려는 의도는 원인이고 의도에 의해 자세를 바꾸는 것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움직이는 몸이 전부 의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연기법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움직이는 몸만 알았지 사실은 의도가 있어서 움직이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의 성숙입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계속해서 더 높은 단계의 지혜가 성숙됩니다.
지도하는 스승에 따라서 자세를 바꾸는 것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스승의 경우는 1시간 좌선에 두 번 이상은 자세를 바꾸지 않도록 합니다. 자세를 한 번 바꾸면 참지 못하고 자꾸 신경질적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고통은 참고 견디도록 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누구나 몸의 통증으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불가피합니다. 이런 과정은 초기에 수행자의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통증도 수행 중에 생기는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때 참고 견디면 전에 없는 인내력도 생깁니다. 이처럼 수행은 상황에 알맞게 대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무엇이나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