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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올라
정진명(시인, 온깍지활쏘기학교 교두)
18. 백두산에 오르다
1979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상경한 촌놈이 서울 친구의 아파트 집으로 놀러 갔습니다. 탁자에 둘러앉아서 차를 마시는데, 친구 어머니가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명아, 내가 며칠 뒤면 일본에 가는데, 필요하면 백두산 지도 구해다 줄까?”
친구의 어머니는 일본인이었습니다. 친구의 한국인 아버지와 국제결혼 한 거죠. 아마도 제가 좋다고 대답했기에, 한 달쯤 뒤에 그 친구한테서 지도를 받았겠지요? 우리가 군대에서 쓴 지도는 1:50,000이었는데, 그때 기억으로는 1:200,000지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복사기로 복사한 것이었는데, 제법 큰 복사지에 흑백으로 나타난 백두산은 마치 설계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감동이었던 것은 그런 것조차도 외국인의 손을 거쳐야 겨우 얻어볼 수 있는 강퍅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시절의 저를 돌이켜보면 생각나는 게 거의 없습니다. 이 사건이 그중에서 제법 또렷한 기억인데, 친구의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을 정도면, 아마도 당시 저는 엔간히도 백두산 어쩌고 하며 떠벌리고 다녔나 봅니다. 애틋한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경향이 조금 있었달까? 그래서 유달리 백두산에 관심을 두었던 듯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백두산에 관한 정보를 전혀 접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북한 땅이었기 때문이죠. 학술 연구 차원이 아니라면 일반인은 그런 정보에 접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건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데 백두산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없다니. 남과 북을 가른 당시 이념이 얼마나 살벌하게 우리의 일상을 옥죄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그게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았죠.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떠벌이고 다니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안 걸린 것이 참 다행이기까지 합니다. 당시 북한에 관해서 함부로 말하다가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얻어터지는 일이 다반사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재수 없으면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간첩으로 옥살이해야 할 수도 있던 살벌한 때였죠. 그런 때에 물색없이 이러고 다녔으니, 참, 47년이나 흐른 지금에 돌이켜봐도 등골이 서늘한 일입니다.
그리고 1981년에 진태하의 『아, 백두산』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수필집이고 기행문인데, 아마도 해방 후에 처음으로 백두산에 다녀온 한국인의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중 수교가 1992년에 되었으니, 그보다 10년이나 더 앞선 시기에 다녀와서 쓴 글이고, 그런 만큼 저의 관심을 끌어서 교보문고인지 종로서적인지 직접 가서 그 책을 사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약력 속의 진태하는 중국어과 교수여서 학술 연구차 중국과 접촉이 많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백두산에 올랐던 듯합니다.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마치 옆집 다녀오듯이 사람들이 백두산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도 환승 버스 안에서 초로의 아주머니 몇 분을 만났는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네들도 우리와 같은 청주 사람이었고, 청주에서 연길까지 직항로로 왔다고 합니다. 오늘은 서파로 내일은 북파로 오른다고 합니다. 수곡동에서 떡집을 한다며 명함까지 주시더군요. 학생들 수학여행 코스로도 환영받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백두산은 우리에게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백두산과 인연이 닿지 않았습니다. 미루고 미루어지다가 이제사 백두산을 향해 발걸음을 뗀 것입니다.
27일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섭니다. 백두산 서쪽 기슭(西坡)으로 오를 계획입니다. 환승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뒤, 거기서는 공원 관리소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갈아타야 합니다. 버스는 숲을 헤치며 한참을 달립니다. 그리고 다시 작은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또 올라갑니다. 나무가 사라지고 풀로 가득한 비탈이 나타납니다. 잠시 후 봉우리에 드문드문 남은 눈이 보입니다. 6월 말에 보는 눈이 신기해서 자꾸 올려다보는 사이에 차는 천지 주차장에 다다릅니다. 거기서 주의 사항 몇 가지를 듣고 계단을 오릅니다. 계단 수는 1,442개. 한 20여 분 걸려 정확히 10시 01분에 백두산 정상에 섭니다.
엷은 구름이 살짝 낀 하늘 아래, 거울 같은 연못이 있습니다. 하늘못, 천지(天池)입니다. 그걸 내려다보고 있자니, 아무 생각이 안 납니다. 잠시 후에 목이 울컥합니다. 정확한 감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으로 살아온 삶의 전체가 내 몸 어딘가에서 반응한다는 생각을 잠시 할 뿐, 이 감정을 뭐라고 정확히 짚을 수는 없습니다. 정체 모를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전망대 구석으로 잠시 몸을 옮겨 눈을 감습니다. 다시 눈 떠서 내려다보는 천지는 그야말로 아름답습니다. 60년 세월 꿈에도 그리워하던 그 모습입니다. 하늘에서 두레박을 타고 내려오는 선녀의 설화가 이런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습니다.
오전 10시에 올랐는데, 셀카로 사진 몇 장 찍다 보니 1시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11시가 넘어서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발치 아래 놓인 천지를 내려보다가 문득 제가 시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한동안 시를 잊고 살았는데, 백두산 천지를 내려다보며 그래도 명색이 시인이라는 생각에 이릅니다. 시인으로 돌아와 이 감정을 정리해 봅니다. 올라온 계단을 되짚어 내려가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고치고 손봅니다. 저만의 시 쓰는 버릇이자 방법이죠. 12시가 거의 다 되어 천지 주차장의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었는데, 그 비빔밥의 맛이 어땠는지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밥알을 씹던 그때 머릿속에서는 시 다듬기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점심을 먹고 나와 셔틀버스를 탈 때쯤에 시 한 편을 완성합니다.
천지
정진명
가장 큰 소리는
침묵이다.
반만년 동안 삼킨 말이
저리도 맑은 침묵이 되어
구름 문자로
하늘의 뜻을 비추는,
고요한 거울을 들여다본다.
휴화산 밑동에서 목구녁까지
울컥 치미는
마그마의 용트림에
질끈 눈 감을 밖에!
맨 끝 구절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앞서 휴화산의 연관어인 마그마가 나와 상상력의 상투성으로 인해 시의 긴장이 조금 풀리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을 잠시 하다가 일단 그대로 둡니다. 좀 더 나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바꿀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나저나 산꼭대기에서 색안경을 잃었습니다. 30분이나 기다려서 천지 비석을 앞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천지와 백두산에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쓰고 있던 색안경을 벗고 몸에 걸친 가방의 끈에 잠시 걸었습니다. 7,000원짜리 사진을 찾고서 하산했는데, 천지 주차장에서 다시 쓰려고 색안경을 찾으니 사라졌습니다. 아쉽지만 다시 백두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는 없어서 일행을 따라 떠나왔습니다. 그날 밤 백두산 산신령이 제 색안경을 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더군요. 너무 웃겨서 껄껄거리다가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 산신령은 지금도 제 안경을 끼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하하하.
19. 일송정, 또는 용두레
백두산 등정을 마치고, 오후에 연길로 떠납니다. 험한 산들을 비집고 뚫고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잠시 휴게소에 들릅니다. 선봉령 휴게소입니다. 저 봉우리 너머가 김좌진 장군이 봉오동 전투를 벌인 곳이라는 설명에 사람들이 잠시 숙연해집니다. 선봉령을 지나면서 산줄기들이 낮아집니다. 막 피는 밤꽃 향기가 정신을 아찔하게 하더니 잠시 후에 끝없는 옥수수밭이 산비탈에 나타나고 곧이어 용정이 다가옵니다. 2시간 넘게 달리는 이 길이 어쩐지 낯익습니다. 괴산이나 증평 혹은 음성의 어디쯤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두만강을 건너 한참 북으로 올라간 곳인데, 제 눈에 비치는 산과 들의 모습과 거기 사는 식물들의 식생은 괴산이나 음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속도로를 두 시간 넘게 달리는 차의 창문에 나타나는 저 끝없이 넓은 농지를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조상들이 일구어놓았다는 생각을 하니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청나라의 오래된 봉금령으로 인해 잡풀과 나무만 가득했을 땅으로 들어와 나무를 베고 풀을 뽑고 저렇게 기름진 밭으로 만들기까지 손톱은 남아나질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에 들에 자라는 푸나무들을 보며 고정된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스스로 깨닫습니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삼천리 화려강산을 노래하고, 지도는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구획진 그림을 머릿속에 새겨넣습니다.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한반도 영역만을 우리의 체험 가능 구역으로 제한하는 삶을 살아옵니다.
그런데 다롄에서 이곳 길림에 다다를 때까지 무려 6시간 동안 버스 차창 밖으로 나타나는 풍경은 한반도와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정말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산도 들도 식생도 닮았습니다. 굴참나무 소나무 아까시나무 전나무는 물론 저 사는 청주보다 한 달이나 뒤늦게 밀려드는 밤꽃 향기까지, 제 이목구비가 고향과 다르지 않다고 느낌을 전해줍니다. 지도에서는 중국과 한국으로 나뉘었지만, 자연은 전혀 그럴 수 없이 한 덩어리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길 안내판에 용정이 나타날 즈음, 안내원이 마이크로 설명을 해줍니다. 용정은 우물에서 용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용이 나왔다는 그 우물이 용정에 있다는 말에 저의 고개는 저절로 왼쪽으로 갸웃해집니다. 또 우리가 용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이미지가 일송정인데, 용정의 옆 야트막한 산꼭대기에 일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다녀온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실망만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잘못된 정보입니다. 관광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죠.
용정(龍井)은 용이 나와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게 아닙니다. 조선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동네 우물이 있고, 이런 우물에는 두레박이 있습니다. 이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방식이 여러 가지인데 그중에 용두레가 있습니다. 시소처럼 한쪽에 돌덩이 같은 무거운 물건을 매달고, 그 반대편에 두레박을 달아서 손쉽게 물을 퍼 올릴 수 있게 한 도구입니다. 이런 장비가 있는 우물을 ‘용두레 우물’이라고 합니다. 용정은 이것을 한문으로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대단한 오해가 일송정(一松亭)입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하는 가곡 때문에 유명해졌죠. 그래서 용정의 어느 산꼭대기에 일송정이라는 정자까지 만들어서 관광객의 기대에 맞춘 것인데, 이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입니다. 농사꾼들이 일할 때 가장 힘든 것이 쉴 곳이 마땅찮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간하는 곳에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를 한 그루 남겨둡니다. 동네가 오래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느티나무가 그 노릇을 하죠.
그러나 이주민들이 막 몰려든 이곳 용정에서는 산에 있는 가장 큰 나무를 그대로 하나 남겨두는 방식으로 개간했기 때문에 그늘이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됩니다. 그에 딱 걸맞은 나무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듬성듬성 소나무를 남겨두는데, 소나무는 처음엔 위로 자라다가 나중에는 가지를 땅 쪽으로 늘어뜨립니다. 이런 소나무를 낙락장송이라고 하죠. 드넓은 밭의 한 귀퉁이에 있는 이런 소나무는 그대로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나무의 노릇을 합니다. 이런 소나무를 일송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자를 짓고 그 옆에 심어놓은 소나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정자처럼 사람에게 잠시 쉴 그늘을 드리워주는 소나무를 정자에 빗댄 것입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양꼬치로 먹은 뒤, 연변대학 앞 거리로 나갑니다. 요즘의 핫스팟이라고 합니다. 나가보니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연변대학 앞의 큰길 건너편에 6~7층짜리 상가 건물이 늘어섰는데, 벽이 빛나는 간판으로 가득합니다. 저게 왜 구경거리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데, 동행한 분이 설명합니다. 한류 이후에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글을 참 재미있게 생겼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모습을 보려면 한국에 가야 하는데, 그럴 여건이 못 되는 사람들이 한국의 분위기를 느끼려고 이곳 연변으로 놀러온다는 것입니다. 야시장이 펼쳐졌고, 수많은 사람이 오가며 어깨를 부딪칩니다. 곱게 차려입은 청춘들이 경관조명으로 휘황찬란한 밤거리를 가득 메우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내 청춘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는 저 청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첫댓글 백두산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임을 느낍니다
천지가 너무 아름답고 청명하게
보입니다
내년엔 저도 가보렵니다
올해 갈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형제자매 중에서
저만 빠졌습니다 ㅎㅎ
백두산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내년에 색안경 찾아서 갖고 올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