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장성한 신앙으로 자라라
04/23화(火)갈 4:8-11
“지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갈 4:9)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 마귀의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 하나님의 생각, 마귀의 통치를 받으면 마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면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지만 이 세상에는 미혹의 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이 같이 자라납니다. 기도할 때 마귀의 생각이 죽고 하나님의 생각이 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잡초가 자라납니다. 잡초는 마귀의 생각입니다. 주님의 지배를 받으면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가 살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엡 4:13).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교제이고 쌍방 간입니다.
잡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우상을 제거합니다.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갈 4:8)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으로 돈, 지식, 쾌락, 직장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제거하려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교회 봉사가 하나님보다 우선일 때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높은 우상은 정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 5:24).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죽음의 상태로 넘기는 것은 믿음으로 넘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내 안에 있던 우상이 하나씩 무너집니다. “...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갈 4:9).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극복합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른 분 곧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롬 7:4). 내 힘으로 열매 맺는 것을 끝내고 예수께서 나를 통해 열매 맺게 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롬 6:14). 신앙은 은혜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품속에서 벗어납니다.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됩니다”(갈 4:10-11). 가나안의 토속 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 6:14). 내가 세상에 대해 죽고, 세상이 나에 대해 죽었습니다. 세상에 붙들리지 말고 주님께 붙들려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십자가로 제거하면 됩니다.
And...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과 신앙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세상과 신앙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문화는 아름답지만, 문화 자체가 우선되면 우상입니다. 문화도 주님 안에서 주님과 연결시킬 때 그 문화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가 됩니다.
영화를 볼 때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거기에도 주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시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계절이 변하는 모습 속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들으면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에서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장성한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관점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일 뿐입니다.
제가 늘 다니는 동산 입구에는 정씨 일가촌의 무덤이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기 전에는 좀 섬뜩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서상 무덤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무덤을 보며 깨닫게 하시는 메시지가 있으니 늘 무덤을 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 자아의 죽음이 묵상 됩니다. 이미 죽었고, 날마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을 죽음에 넘기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일들이 많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유를 따지지 않으니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많이 힘들어할 때, 주님께서 너무 간단하게 ‘네가 힘든 것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 마음이 힘들고 상처가 될 때마다 내 자아가 죽었다면 이런 일들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겠지? 라고 묵상하면서 자아를 죽음에 넘기는 것이 예전에 비해 많이 수월합니다. 이 훈련은 육신이 깨어지는 날까지 이루어져야 합니다.
장례식장에 가 ‘나도 언젠가 저 자리에 있겠지?’라는 교훈을 받으면 삶이 겸허해집니다. 곧 죽을 사람에게 욕심은 사치입니다. 묘지를 보며 ‘죽은 사람은 비난에도 칭찬에도 응답이 없다’라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거나 칭찬에 우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말 내 마음이 요동하지 않을 때 내가 죽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의 원리로 보면 우리는 주님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상대에게 넘어가니 나는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나만 죽으면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 나타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나타내는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목표를 향해 무리하게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죽기만 하면 사는 능력을 주시는데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합니다. 아담의 죄 성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죽으면서 죄 성을 가지고 가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죄인의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믿는 그런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는 것과 비례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과연 하나님은 나를 아시는가? 그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내가 힘들 때 위로하시고, 말씀하시며 깨닫게 하십니다. 교제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입니다. 내가 질문하고 주님이 응답하시고 이런 상방의 교제가 있을 때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아는 것입니다. 많이 힘들어할 때 누군가를 통해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재정이 힘들 때 누군가를 통해 공급하심이 있다는 것이 바로 쌍방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은 짧은 단어, 보편적으로는 생각이나 깨달음을 통해 들립니다. 단어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의 삶이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도 그곳에 주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정입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하루 24시간을 주님을 인식하는 삶, 장성한 신앙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주님을 인식한다면 주님이 불법이라 하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지키는 울타리가 됩니다.
늘 일상에서 교훈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함으로 감사하는 것, 그것이 장성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 때문에 행복하고, 주님 때문에 날마다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와 함께 길 가는 것
https://youtu.be/uigD6DqFqZU?si=lU4yAjviLKsaCz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