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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강 인(仁)이란 무엇인가?
제17강 인(仁)이란 무엇인가?
1. 총욕약경
요새 제가 강의를 하면서, 걱정이 있는데 시청률이 너무 올라간다고 한다. 사실 그게 걱정이다. 뭐든지 잘 되면 그게 걱정이다. 지난번에 노자 강의를 할 때, 이야기했지만, ‘총욕약경’이라는 말을 했다.
총욕약경(寵辱若驚)
총애를 받으나 욕을 받으나 모두 놀란 것 같이 하라 - 노자 13장 -
이게 동양인들의 지혜다. 자기가 뭐든지 잘 되어서 총애를 받든지, 욕을 보든지, 최악의 상태에 있든지, 사회적으로 무엇이든 잘 되든지, 욕을 당하든지 간에 항상 똑같이 놀란 듯 하라는 것이다. ‘총욕약경’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다.
시청률이 오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보는 거지만, 그만큼 저도 조심스럽다. 또 말이 많아진다. 이쪽 사람들은 이래서 좋다고 하고, 저쪽 사람들은 이래서 싫다고 한다.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하여튼 많은 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좋게 생각해주시고, 열심히 들어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저도 100회라는 원래 약속된 시간이 계획되어 있으니깐, 이 계획에 맞추어서 최대한 노력을 하겠다.
2. 김미화
도올 : 그런데 여기 보니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올라오실래요? 방청객으로 오신 모양인데, 나는 이름도 잘 모르겠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미화 : 이름이 순악질인데요.
도올 : 하여튼 잘 웃기시는 분이죠?
김미화 : 요새 도올 선생님 시청률이 너무 좋아서, 코미디 프로 시청률을 빼앗아 가는 거 같다.
도올 : 이 프로가 뭐가 좋아서 이렇게 방청까지 하러 오셨나요?
김미화 : 선생님을 뵙고 싶어서 아침에 생방송 끝나고 기다렸다. 강의하시는 모습이 너무 열정적이시고, 그리고 분필로 땀 닦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집에서 남편하고 재미있게 보고 있다.
도올 : 결혼하셨군요. 개그우먼의 입장에서 여기서 들은 공자 사상 중에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김미화 : 공자가 아주 좋은 분이신 거 같다. 저는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너무 열심히 강의해 주시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셔서, 이야기 속에 푹 빠지다 보면, 재미있는 분도 계시고... 그런 것을 느끼고 있다. 공자에 대해서는 아직은 제가 잘 모른다. 이제 겨우 214쪽까지 해주셨다.
도올 : 근데 나오셔서 떠시는 거 같다.
김미화 : 네. 왜냐하면, 선생님의 눈빛이 예사 눈빛이 아니시고, 까만 동공과 흰자의 분리가 많이 되어 있으셔서...
美目盼兮(미목반혜)
아름다운 눈이여! 까만 눈동자가 영롱하도다!
-시경, 석인
도올 : 근데 더 좀 웃겨보시지?
김미화 : 선생님이 다 웃기셔서. 저 싸인 좀 해 주세요. 왜냐하면, 지금 안 받으면 선생님 싸인 받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러대요. 아까 줄 서 계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 강의 잘 듣겠습니다.
도올 : 이렇게 방청하러 오시는 분들 저는 환영한다.
3. 김성철의 이야기
사실 엊그제께 김성철 교수를 만났다. 우리나라의 아주 훌륭한 불교 학자인데, 지금 경주의 동국대학에 있는 학자이다. 원래 이 사람은 치과대를 나와서 치과의사를 했는데, 인도에 가서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를 아주 지독하게 공부해서, 지금은 동국대학교 교수가 된 분이다.
김성철(金星喆 1957~)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
현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교수, 중관학 전공
우리 사회의 동양학 분야에 저 말고도, 젊은 사람들 중에 훌륭한 학자들이 지금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렇게 간단한 사회가 아니다.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 김 교수가 제 제자인데, 경주에서 밤 12시 20분에 막차를 타려고 하는데, 경주의 버스 터미널에서 텔레비전이 켜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서 내 강의를 듣고 있었다고 한다. ‘기운생동’이니 ‘기철학’이니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밤 12시가 넘어서 어둑어둑한데, 그 막차를 타러 온 사람들이, 거기서 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경주 터미널에서 그런 것을 보는 모습에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고 한다. 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이제 우리나라는 위대한 나라 같다.’는 어떤 감동이 왔다고 한다.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여러분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나 래리 킹 쇼 같은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하버드 대학의 고전학 대가가 나와서 강의를 하고, 사람들이 강의하는 것을 재미있게 듣고, 서로 웃고, 그러면서 자막으로 희랍어가 착착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런 프로프램은 미국에서 상상도 못하는 것이다. 상상도 할 수도 없는 프로그램인데, 우리나라는 지금 하고 있다. 이게 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저력이다. 우리 민족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전통을 쌓아온 민족인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지금 2,000년전에 나온 사마천의 사기가 있는 그대로 자막으로 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분명히 내용 이해를 하고 있고, 내 입을 통해서 서로 교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대중문화다. 무슨 고급문화가 아니다. 우리나라를 우리는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게 이유가 있다.
오늘 김미화 씨 때문에 이야기가 어려워져 가는 거 같은데, 쉽게 풀려다가 자꾸 어렵게 간다.
4. 미디어의 이해
‘마셜 맥루한’이라는 사람이 ‘Understanding Media’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썼다. 최근 MIT Press에서 그 책이 다시 나왔다.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
캐나다 에드먼턴 출생의 문화비평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 위스콘신대, 토론토대 교수, 대표작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
이 책은 매스미디어 관련 학문 분야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책이다. 이 사람은 캐나다 사람인데,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했고, 문화비평가로 굉장히 탁월한 분이다.
이 책을 처음 펼치면 맥루한이 한 유명한 말인 ‘The Medium is the Message.’가 나온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메시지를 미디어를 통해서 표현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미디어 그 자체가 메시지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The Medium is the Message.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
예를 들면, 글을 돌에다 새기던 시절하고, 종이에 쓰던 시절하고, 컴퓨터로 치던 시절은 모든 정보 교환 방식이나, 생활 방식이 달라진다. 미디어가 인간의 정보를 결정한다는 이야기다.
5.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
이 사람은 미디어를 두 개로 나눈다. Hot media와 Cool Media라는 개념을 이 사람이 만들었다. 이게 원래 사진학에서 쓰는 말이다.
핫 미디어(Hot media) : 매체가 자세하다.
쿨 미디어(Cool Media) : 매체가 엉성하다.
여러분들 해상도라는 말을 아는가? 해상도라는 것은 두 점이 하나의 다른 두개의 점으로 인식될 수 있는 최소 거리다. 두 점을 분별할 수 있는 최소 거리다.
해상도(Resolution) : 두 점이 구분되어 보여질 수 있는, 두 점간의 최단거리
이 사람은 비슷한 이야기로 High Definition, Low Definition이라는 말을 썼다. 그것을 박정규 씨가 우리말로 정세도(精細度)라고 번역했다.
핫(Hot) = High Definition 정세도가 높다.
쿨(Cool) = Low Definition 정세도가 낮다.
High Definition, Low Definition은 정보의 밀도 문제이다. Cool하다는 것은 정보의 밀도가 낮은 것이다. Hot은 정보의 밀도가 높은 것이다.
예를 들면, 사진은 밀도가 높다. 만화는 사진에 비해서 엉성하다. 내 얼굴을 그리더라도 엉성하게 그린다. 사진은 굉장히 정밀하다. 해상도가 높다.
그러니깐 같은 미디어라도 이렇게 밀도가 높은 쪽을 핫 미디어라고 한다. 핫 미디어의 대표적인 것은 신문이고, 쿨 미디어의 대표적인 것은 TV다.
핫(Hot) : 사진, 신문
쿨(Cool) : 만화, 텔레비전
그러니깐 쿨 미디어에서는 세밀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책의 정보는 상당히 공간적이다. 그런데 텔레비전 정보는 시간적이다.
책의 정보 : 공간적(spatial)
텔레비젼의 정보 : 시간적(temporal)
책은 아무데 놓아도 다시 볼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같은 책은 언제고 가져다가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은 시간에 따라 흘러갈 뿐이다.
그러니깐 쿨 미디어일수록 정세도는 낮은데, 참여도가 높아진다. participation이 높아진다.
핫(Hot) : 정세도 높다, 참여도 낮다 : 책
쿨(Cool) : 정세도 낮다, 참여도 높다 : 만화
텔레비전은 여러분들이 참여를 해서, 같이 보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 버리고 만다. 공간적으로 있는 게 아니다. 시간적으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 만화 같은 것은 무지하게 재밌다. 항상 본다.
이러한 미디어론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이 사람 논의를 읽어보면, 헛점이 많다. 나는 쿨 미디어인 텔레비전이야말로 오히려 핫한 내용을 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핫과 쿨의 이원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론에서 이 핫과 쿨이라는 미디어 이론을 깨야 된다는 게 내 주장이다.
사실 세계적으로, 이 프로그램처럼 고등하고 핫한 내용을 쿨미디어에 이렇게 담겨진 유래가 없다. 이러한 것이 우리 조선 반도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 민족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얼마나 지적 갈구가 어마어마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저는 요즘 이러한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한 번 하고 싶었다.
나의 강의는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의 이원론을 근원적으로 거부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 도올 -
6. 정보 교환 방식의 변화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를 더 하면, 우리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맥루한이 한 이야기 중에 상당히 재미난 것이 있다.
옛날의 정보 교환 방식은 기본적으로 구전이었다. 말로 되었다. 공자 시대 때도 거의 그랬을 것이다. 공자 이전의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도 말로 했을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이런 모든 것을 활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대의 사람은 복수 감각형 인간이다. 감각이 다 동원된다. 옛날 문자가 없던 시절엔 오히려 사람들이 복수 감각적이었다.
제1시대 : 구전시대, 원시부족시대, 복수감각형 인간
그런데 그 뒤로 인류가 신석기 시대를 지나서 문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문자를 만들기 시작하면, 복수감각형에서 점점 시각중심형 인간으로 간다. 인간이 점점 시각 중심이 된다. 그러다 한 단계를 더 들어가면 인쇄 혁명이 일어난다.
맥루한은 인류의 혁명 중에서 가장 거대한 혁명이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이라고 한다.
제2시대 : 문자시대, 국가시대, 시각중심형 인간
인쇄혁명은 이 시대의 특징을 극단화시켰다.
활자는 우리나라가 구텐베르크보다 앞섰다고 하지만, 하여튼 이 인쇄 문화가 들어오면서 아주 완전한 정보를 책으로 쓰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가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뭐냐 하면, 인쇄 혁명 덕분에 혼자 앉아서, 혼자 책을 보고, 혼자 깨닫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러니깐 인쇄혁명이 들어오고 나서, 비로소 개인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인쇄혁명이전에는 인류사에 개인이란 말이 없다. 불가능하다. 인쇄혁명이 일어나고 비로소 개인주의가 가능해지고, 여기서부터 소위 민주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 안에 들어 있다고 한다.
개인(individual)의 출발은 인쇄혁명 이후의 사건이다. 데카르크의 코기탄스(생각하는 자아)도 시각중심적 인간을 통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전기가 들어온다. 이건 전혀 또 다른 것이다. 전기 문화에 의한 텔레비전 같은 미디어는 오히려 정보의 전달방식이 복수감각형으로 간다는 것이다. 시각중심적인 것에서 복수감각형으로 간다. 그래서 요새 아이들은 책만 보는 것에 만족 못한다. 노래를 불러도 노래만 불러서는 만족 못한다. 춤을 같이 추고 다 해야 한다.
제3시대 : 전기매체 시대, 재부족화 시대, 복수감각형 인간
그리고 문화도 오히려 옛날의 부족문화처럼 retribalization, 재부족화 현상이 일어난다. 옛날의 종족문화적인 형태로 사회가 점점 분화되어 가고 있다.
재부족화 현상(retribalization) : 사회분화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원시시대에 가깝게 되는 현대사회의 측면
바로 이러한 미디어의 변화가 인간의 메시지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주장은 사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우리가 말하는 근세의 모든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주의고, 민주주의고, 모든 인권의 문제고, 자유의 문제고, 이런 모든 것들이 인쇄혁명의 구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전개될 전기 문화라는 새로운 문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을 변화시킬지 모른다.
개인주의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도 인쇄혁명시대의 산물이다. 인쇄시대가 지나가면서 이런 가치관도 변할 것이다.
그러니깐 ‘도올의 논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복수 감각형의 인간들에게 던져지는 새로운 메시지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물론 저는 계속 책 쓰고,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지식인들은 집에 앉아서 혼자 책만 쓰고 있으면 안 된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텔레비전은 일방적인 게 불가능하다.
내가 독백하듯이 써놓은 것을, 어떤 사람이 그걸 보고, 혼자서 깨닫는 이런 전달방식에 의존하는 정보 체계만이 학자의 사명으로 볼 수는 없다. 이제 21세기에는 학자들이 TV로 나와야 한다.
남이 강의하는 것만 보고, 뒷짐 지고 뒤에 앉아서, ‘너 가짜다.’라고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소용없는 시대로 이제 진입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텔레비전과 같은 쿨 미디어를 가장 위대한 핫 미디어로 만들어 버려야겠다고 선포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많이 바뀌어야 한다.
7. 몸의 연장
그리고 맥루한은 또 하나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 미디어는 ‘the Extension of Man’이라는 말을 썼다. 미디어는 인간 몸의 연장(延長)이라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라. 미디어라는 게 모든 매체다. 옛날에 물건을 나르려면, 손으로 들고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수송이라는 것은 기차도 하고, 비행기도 한다. 손으로 했던 것을 기중기가 하고, 눈으로 봤던 것을 카메라가 한다. 그러니깐 인류 문명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몸을 연장(延長)한 역사라는 것이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나의 몸의 연장(the Extension of Man)의 역사다, 몸의 연장이 곧 미디어다.
미디어를 잘 생각해보라. 과거에는 이렇게 수천만 명이 한꺼번에 한 사람의 강의를 듣는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겠나? 그런데 지금 이것이 미디어의 혁명을 통해서 가능해지고 있다.
마틴 루터킹이 아무리 위대한 연설을 했어도, 그 당시 링컨 기념관 앞에 100만명이 모였을까 말까 하다. 이 강의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훨씬 위대한 집회다. 그러니 내가 긴장을 안할 수 있겠나?
이러한 ‘the Extension of Man’ 인간의 몸이 계속 확장되어 온 역사가 바로 우리가 말한 미디어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디어의 세계가 과거에는 외부로 explosion, 바깥으로 폭발해 나갔다. 점점 나의 몸이 밖으로 폭발해 나갔다.
그런데 컴퓨터의 시대에는 오히려 implosion, 안으로 폭발해 들어간다. 인간의 두뇌신경구조라든가 이런 것이 전 세계로 뻗어나간다.
explosion(외부폭발) : 몸이 밖으로 연장되는 현상
implosion(내부폭발) : 몸이 안으로 연장되는 현상
이것은 인간 몸의 확장 단계에서 거의 최후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인간의 두뇌가 매체화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인간의 몸의 연장의 최후단계(final phase)에 도달했으며, 이 현상은 세계를 하나로 묶는 지구촌락(the global village)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21세기 문명에 대해 문명 비판론자들이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앞으로 우리 젊은이들은 어떻게 정보를 교환해야 되고, 어떻게 지식의 형태를 쌓아나갈까? 하는 문제들을 같이 고민해야 된다.
21세기를 주도할 젊은이들은 시각중심적 시대의 장점과 복수감각적 시대의 강점을 모두 통달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8. 제자
같이 읽어보겠다. 지난번 것을 복습하고 들어가겠다.
子曰 ;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이번 시간에 할 것은 학이편의 여섯 번 째 장이다.
子曰 : 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여길 보면, 아주 전형적인 논어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자왈’이라고 하면, 반드시 공자왈로 결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 다음에 ‘제자들이여.’라고 한다.
여러분은 제자라고 하면, 영어로 student를 생각해서, 배우는 학생들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논어에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의미로 쓸 때가 있고, 어떤 때는 그저 젊은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젊은 청년들이여!’라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쓰기도 한다.
弟子
1. 배우는 학생의 뜻(student, disciple)
2. 그냥 젊은이들의 뜻(young fellows)
여기서 ‘제자’는 공자가 젊은 사람들을 향해서 외친 말씀으로 이해된다.
공자는 상당히 말년인 68세쯤 노나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한 5년을 더 살다가 73세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면 노나라에 있는 짧은 기간 동안에 공자 교단에는 젊은 학생들이 사방에서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제자’라는 말은 그 어린 학생들을 향해서 특별히 외친 말로 여겨진다.
9. 입즉효, 출즉제
入則孝, 出則弟
그래서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 入則孝, 出則弟라고 했다.
여기서 입(入)과 출(出)이라고 하는 것은 집에 대한 것이다. 이것도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중국 가옥에서는 부모님 댁을 들어가는 집이 따로 있고, 자기 집이 따로 있어서 그 궁을 달리했다고 한다. ‘由命士以上, 父子皆異宮.’라는 말이 있는데, 들어가는 집과 나오는 집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그렇게 생각할 건 없을 거 같다.
由命士以上, 父子皆異宮. -예기, 內則 편
입출이라고 하는 것은 한 군데 살았으니깐, ‘집에 들어가면 효(孝)하고, 사회로 나오면 제(弟)하라.’는 뜻이다.
저번에도 계속 이야기했지만, 대개 논어에서 말하는 효라는 것은 수직관계를 총칭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제라는 것은 수평적 인간관계를 총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弟)는 형제간의 우애도 있지만, 나는 ‘뭇사람과 다정하게 지낸다’고 번역을 했다.
효(孝) : 수직적 관계의 덕성의 총칭
제(弟) : 수평적 관계의 덕성의 총칭
그러니깐,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오.’라는 뜻이 된다.
10. 근이신
謹而信
그 다음에 근이신(謹而信)이라고 했다. 여기를 보면, 근(謹)이라고 할 때도 말씀 언(言)이 있고, 신(信)이라고 할 때도 말씀 언(言)이 있다. 근(謹)이라고 하는 것은 삼간다는 것인데, 원래 의미는 말을 삼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화(禍)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말을 잘못해서 불러일으키는 게 많다.
그러니깐 말을 삼가라는 것이고, 신(信)이라는 것은 신험이 있는, 증명이 될 수 있는, 헛소리가 아닌 말을 하라는 것이다. 신(信)은 요새말의 믿음이라기보다는 증명이 되는, 신험이 되는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말을 하더라도 믿을 수 있는 신험이 있는 말들만 하라는 뜻이다.
11. 범애중
그 다음에 ‘汎愛衆’이라고 한다.
여기서 범(汎)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넓게’라는 뜻이다. 넓게, 보편적으로, 뭇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아낀다’라고 했다. 우리 동양 말에서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상대를 아낀다는 뜻이라고 했다.
愛: 사랑한다의 원래 의미는 '아낀다'이다.
여기서 애중(愛衆)이라는 말도 중요하다.
유교라고 하는 것은 아주 편협해서 자기 부모만 알고, 자기 형제만 안다고 생각한다. 효제도 자기 부모에 관한 것이고, 자기 형제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효(孝)도 군사부일체라고 해서 모든 수직관계에 해당하는 것이고, 제(弟)라고 하는 것도 자기 형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등 모든 수평관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유교의 윤리를 그렇게 좁게 해석하면 안 된다.
범애중이란 말도 그런 의미도 읽어야 한다.
범애중(汎愛衆)이라는 표현은 유교가 편협한 가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 범(汎)이라는 것은 물결이 범람하는, 창창한 바다와 같은 모습이다. 그런 모습처럼 뭇사람들을 널리 보편적으로 넓은 마음으로 아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12. 친인
그리고 사람들을 가리지 말고, 그렇게 널리 사람들을 많이 수용을 하고 친인(親仁)이라고 했다. 이게 중요한 말이다.
汎愛衆而親仁.
한문에서 仁이라고 쓰면 추상명사가 아니고, ‘인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인자(仁者) 즉 인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친(親)이라는 것은 ‘인한 사람’을 목적어로 받기 때문에 친(親)이라는 것은 동사가 된다. 친(親)은 동사가 되고, 인(仁)은 목적어가 된다.
親仁
親 : 친하게 지낸다. 가까이 사귄다(동사)
仁 : 인한 사람(목적)
그럼 이 친(親)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 된다.
즉 ‘汎愛衆而親仁.’은 많은 사람을 널리 사귀고 아끼고, 항상 인(仁)한 자들과 친(親)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야기다.
13. 인(仁)=느낌
여기서 다음 장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 여기서 인(仁)이라는 글자가 나왔으니깐 인(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여태까지 공자의 인(仁)이라는 사상을 계속 여러분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과연 인(仁)이라는 게 뭘까? 제가 강의하는 것을 들어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제가 끊임없이 인(仁)의 이야기를 했지만, 인(仁)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자는 인(仁)이라는 것을 숙제로 남겨두었다. 그래서 공자의 인(仁)의 사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인(仁)에 대한 논어의 구절을 이렇게 저렇게 틀어서 아무리 해석해 본들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럼 과연 공자라는 사람이 말하고 있는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생각난 김에 간단하게, 이 중요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공자의 인(仁) 사상이 무엇인지 말씀 드리려 한다.
여러분 행인(杏仁)이라는 말을 아는가? 행인이 뭔가? 바로 살구씨다. 행인은 한약재로 쓰인다.
杏仁(행인, semen armeniacae)
장미과 살구나무의 종자, 기침을 멈추게 하고 통변시키는 효과가 있는 한약재
예를 들면 마자인(麻子仁)이라든가, 욱리인(郁李仁)이라든가, 산조인(酸棗仁)이라든가, 전부 인(仁)이라는 말을 쓰는데, 인(仁)이라는 것이 씨다.
마자인(麻子仁) : 대마과 삼의 종자, 통변, 자양제로 쓰임
욱리인(郁李仁) : 장미과 이스라지 종자, 통변, 이뇨약재
산조인(酸棗仁, semen zizyphi spinpsae) : 갈매나무과 묏대추나무의 종자, 보간, 안신의 약재
그런데 이 씨라는 것의 특징은 무엇인가? 싹이 트는 것이다. 싹이 안 트면, 안 된다.
겉으로 보면 딱딱하게 죽어 있는 것 같은데, 물을 주고 환경을 만나면 생명이 돋는다. 그런데 왜 동양 사람들은 씨를 인(仁)이라고 했을까? 한약재를 전부 인(仁)이라고 한다. 왜 씨를 인(仁)이라고 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쉬운 것이다.
인(仁)은 항상 생명의 가능성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주변 것과 살아서 교섭을 한다. 내 철학에서는 인(仁)이라는 것을 느낌이라고 한다.
인(仁)은 생명(Life)이며 느낌(Feeling)이다.
내가 여러분들과 지금 느낌이 없으면 강의가 안 된다. 이게 서로가 느끼는 것이다. 씨도 느낌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땅에 들어가서 주변의 흙과 느끼고, 자기가 어떠한 양분을 빨아먹어서, 어떠한 DNA 정보에 따라서, 어떻게 커나가야 되겠다는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인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느낌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한의학 이야기가 나왔으니깐, 아예 한의학으로 풀면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인(仁)이라고 하는 것이 거꾸로 말하면 不仁이 된다. 불인이란 말은 한의학에서도 그렇지만, 일상적인 말에서 불인(不仁)이라는 말은 마비 상태이다. 볼 같은 곳이 마비되면 불인이라고 한다.
仁의 반대어는 不仁이며, 불인이란 신체마비현상을 가리킨다.
14. 인(仁)=느낌
그런데 재미난 게 있다. 동서양이 얼마나 상통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서양에서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을 미학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것을 aesthetics라고 한다.
aesthetics(미학) :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
a가 들어가도 되고, 안 들어가도 된다. 미학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학문인데, 이 말의 어원이 원래 감성, 느낌이라는 뜻이다.
미학(aesthetics)의 어원은 ‘아이스케시스’(aisthesis)이며, 이것은 감각(sense perception)의 뜻이다.
여러분들은 느끼지 않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가? 꽃을 보고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tom에 a를 붙이면, 자르지 못하는 atom이라고 했다. 부정어는 a가 붙을 때도 있고, an이 붙을 때도 있다. aesthetics에다가 an이라는 부정사를 붙이면 anesthesia가 되는데, 이게 마취라는 뜻이다.
anesthesia 마취, 무감각 증세
그러니깐 인과 불인이나, aesthetics와 anesthesia가 아주 동일하게 대응된다. 서양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仁 아름다움 (aesthetics)
不仁 마취 (anesthesia)
즉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느낄 줄 아는 것이다. 단순한 것이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의 사상이라는 것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느낌이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계까지 다 느낄 줄 아는 것이다.
그러니깐 공자의 인을 나에게 현대말로 간단하게 해설하라고 하면, 심미적 감수성이라고 하겠다.
인(仁)은 심미적 감수성(Aesthetic Sensitivity)이다.
맹자는 인이라는 것을 측은지심이라고 한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맹자
측은하다고 하는 것은 느끼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간다고 하면, 그 아이를 보고서 그냥 돌맹이가 굴러들어가나 보다 하고, 우물로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돌맹이가 떨어졌네.’라고 무심하게 바라보면, 인간이 아니다. 그가 떨어져서 아플 것을, 그가 죽게 되고, 그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그냥 순간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乍見孺子將入於井,皆有怵惕惻隱之心.
맹자, 공손추 上
그러니깐 이렇게 느낄 줄 아는 상태가 인(仁)이다.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은 뭐냐? 이렇게 느낄 줄 아는 것이다.
人皆有不忍人之心.
사람은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 맹자 -
그러니깐 느낄 줄 알게 된다면,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을 줄 알고, 남이 나에게 해서 싫은 것은 남한테 하지 않게 된다. 기소불욕(己所不欲)이 물시어인(勿施於人)이라고 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안연 2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아니하고, 내가 달(達)하고 싶으면 먼저 남을 달(達)하게 해주고, 내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서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공자가 말하는 인(仁)의 세계이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옹야 28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차원을 넘어선다. 여태까지 인(仁)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도덕적 규범으로 생각했다. 내 강의의 본질은 인(仁)을 도덕적으로, 규범적으로만 해석할 게 아니라, 느낄 줄 아는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 사상의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공자의 인은 규범윤리로 해석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심미적 감수성이며 윤리규범을 초월하는 우주적 느낌이다 - 도올 -
지금 우리 사회에 토막살인 등 별의별 끔찍한 일들이 많다. 정말 느낄 줄 아는 인간이라면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나? 뭔가 우리는 불인, 마비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우리 사회는 이 마비를 풀어야 한다. 이 마비에서 헤어나야 한다.
공자의 사상은 우리사회를 마비상태에서 느낄 줄 아는 상태로 탈출시킨다.
불인한 상태에서 어떻게 인한 상태로 사람을 데려가느냐? 이것이 공자 사상이다.
그리고 이 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하게 내 차원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심미적인 세계, 아름다운 세계까지 sensitive하게, 감수성 있게 느낄 줄 아는 것이다.
공자는 위대한 음악가이며 예술인이었다. 그의 모든 관심에는 심미적 감성이 배어 있다. 仁은 이러한 그의 예술적 감성에서 우러나온 사상이다.
그러니깐 ‘여는 인하지는 못하다(予之不仁也)’고 한 것은 모든 것을 골고루 느낄 줄 아는 그런 감수성에는 도달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뜻이다.
15. 行有餘力, 則以學文.
그래서 공자가 하는 최후의 말은 行有餘力이면 則以學文이라고 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行有餘力, 則以學文.
논어의 이 구절로 결정타를 치는 것이다. 처음에 뭐라고 했나?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 효성스러운 인간이 되고, 나와서 다정스런 인간이 되십시오. 그리고 뭇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仁)한 사람과 친하고 가깝게 하려고 노력하시오. 그래서 효하고, 제하고, 애중하고, 친인하고, 그러한 것을 실천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가서 글을 배우라고 한다.
공자가 말하길,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인한 자가 드물다고 했다.
巧言令色, 鮮矣仁. 학이 3
무슨 이야기냐? 그 당시에 공자에게 상당히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학문(學文)이라고 할 때, 문(文)이라는 글자는 지금 같이 문장을 배운다는 뜻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그냥 文字다. 글씨다. 옛날 글자를 보면, 문(文)은 사람의 옷깃 모양이다. 이것의 오리지널은 몸에 하는 문신이었다고 한다. 이게 문(紋)이라는 것도 된다. 이것은 하나의 심볼(symbol)이라는 의미가 된다.
문(文) : 문신에서 유래한 상형자. 문자학에서는 형성(形聲)자나 회의(會意)자가 아닌 가장 단순한 初文의 뜻. 문(紋)과도 통한다.
그 당시에 문자를 배운다는 것이 엄청난 권력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젊은이들이 와서 문자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권력으로 얻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말하길, 문(文)을 배우기 전에 근원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자는 것이다. 공자가 이러이러한 것을 하고 남음이 있으면 배우라고 했지만, 이것은 어떠한 시간선 상에서 무엇을 하고 남아서 이걸 하라는 게 아니다. 이건 강조형이다. 문자를 배운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사소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왜 배우냐?’ ‘배움의 목적이 뭐냐?’는 것이다.
공자가 근원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 효성스러운 인간이 되고, 나와서 다정스러운 인간이 되어라. 어진 자를 벗할 줄 모르고, 그것을 실행할 줄 모르는 자가 아무리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공자는 그 당시에 굉장히 문자를 잘 가르치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학문을 가르쳐서 사(士)라고 하는 새로운 계급을 출현시켰지만, 공자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굉장히 anti-intellectualism이다. 반주지주의적이다.
anti-intellectualism(반주지주의)
지식이 삶의 으뜸가는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생각.
우리는 20세기를 통해서 너무 지식에 대한 열등의식 속에서 살아왔다. 여태까지 논어를 안다는 거 가지고 어디 가서 생색을 낼 수 있었나? 영어, 수학을 잘하고, 방정식을 척척 풀어야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와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게 무엇이고, 지식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 지식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여. 컴퓨터 앞에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전에, 들어가서 최소한 부모님한테 효성스러운 인간이 되고, 나와서 친구들과 다정한 인간이 되고, 항상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벗하려고 노력하는, 그러한 인간이 되지 않는 이상, 공부해서 뭐하냐?
이것이 이번 장(章)의 공자님 말씀이다.
30분이 지난 후에, 자하(子夏)의 말이 나온다. 자하라고 하는 사람은 상당히 재미있는 캐릭터다. 복잡한 캐릭터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 역사에 사상운동을 일으킨 사람이기 때문에 자하 주변으로 많은 인물들이 모인다.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다음 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을 깊게 생각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