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를 찾아온 환자에게 당장 약물을 처방하지 말고 상담을 통해서 그 사람의 본연에 다가가야 한다고 그저 멋있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울 보다는 수면제에 중독된 환자의 예나, 분석가라기 보다는 약물 자판기 같이 되어버린 의사의 예를 덧붙이면 더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와 답은 딜레마까지도 생각할 때 나오는 법이다. 정말로 이 상담과 약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약물로 삶 자체가 파괴되는 경우만이 아니라, 약물이 없다면 삶 자체를, 어쩌면 타인의 생까지도 환자 스스로 파괴해버리는 경우도 함께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니 이 경우, 당장 약물을 처방하지 않으면 내일 사고를 처도, 자진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판단이 확고히 드는 환자에게 의사가 자신의 심리학의 개진을 위해 상담을 택한다면 그것은 옳은 일일까? 의사가 환자에게, 선택은 당신이 하겠지만, 약물로 마비된 삶보다는 저 철인들처럼 자살이 나은 일일수 있다고 직접 혹은 간접으로 말하는 것이 옳은가? 마치 안락사를 거부하지 않는 의사처럼, 심리분석가는 약물을 처방할 바에야 그리할 각오까지도 해야하는가? 물론 이렇게 말하면 변명은 될 것이다. 자신은 길들을 제시했고 선택은 환자가 했노라고. 당신이 어떻게 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제는 처음 내가 제시한 것처럼 번드르르하게 말하고 끝내버릴 수 없는 매우 중층적인 문제인 것은 분명하다.
아니, 그가 열정있는 의사라 만사를 제쳐놓고 그러한 환자를 우선 살리려 꼬박 붙어 있겠다 결심했다할지라도 의사가 다치지 않기위해서는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 그저 순수자아에 대한 수호의지로 맨몸으로 부딪쳐보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다. 약물 처방이 필요한 심리분석의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의사의 실존은 실재로는 이 과잉 약물과 긴급 사태 사이에서 어떤 균형 점을 찾고자할 것이다. 소량의 수면제를 처방하면서 상담도 함께 병행해가는 방식, 혹은 다른 의사를 추천하는 방식 등등. 그런데 이를 논의로 전송하면 적절한것이 가장적당한것이라는, 마치 모든 논쟁들의 냉각제 같은 정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논사들은 피하려고만 한다. 특히 그래도 약물이 필요는 하다는 수긍을 한편에서 회피하고 싶겠다.
문제를 마주하여 넉넉한 여유 속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에게 이러저러하면 좋았을 거라고, 좋다고,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공허한 답변이다. 심리학은 그리할 수있지만, 심리분석학은 그리하면 안 된다. 그와 달리, 문제를 함께 마주하여, 아무 여유 없이 차라리 파괴만이 남아있으므로 그것으로 치달아버리겠다고 눈귀를 모두 닫고 움직이는 실존을 "지금 당장" 도울 수 있는 대책이 충실한 응대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다음이란 여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당신을 꼼짝 못하게 하는 상황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상황이야말로 그 모든 진정한 이해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적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상항에 처해 자존심을 버리고 이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질(삶) 전체애 대한 이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다른 일에서도 그렇지만 기계를 다루는 일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상황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질에 대한 이같은 이해로 인해, 너무도 자주 스스로 깨우친 정비사는 제도 안에서 훈련받는 정비사에 비해 그처럼 탁월한 정비사가 되는 것이다.
- Pirsig,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