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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章閣
세종(世宗 1397~1450)에게 집현전과 학사들이 있었고,
성종(成宗 1457~1494)에게 홍문관과 그 관원들이 있었다면,
정조에게는규장각과 각신(閣臣 규장각 관원), 초계문신(抄啓文臣), 검서관들이 있었다.
개혁군주 정조(正祖 1752~1800)와 규장각을 들여다본다.
<규장각도> 김홍도, 비단에 채색, 144.4×115.6㎝, 1776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규장각이 있었던 2층 주합루와 그 정문이었던 魚水門,
주합루 앞의 연못 부용지와 정자 부용정,
그 우측 영화당의 모습이 지금 창덕궁 후원의 모습과 같다.
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 설립된 규장각은
숙종 대의 규장각을 계승하면서도 기능을 대폭 확대한 기구이고 法古創新의 조치였다.
역대 국왕의 글과 글씨를 보관하던 원래 기능에서 한걸음 나아가 조선과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수집하고,
여기에 소속된 엘리트 관료들이 학문을 닦고 국가 주요정책을 마련하는 정치기구로 발전했다.
규장각은 당대 학문과 정보의 '허브(Hub)'였다.
1781년경 규장각에는 중국본(本) 2만권, 조선본 1만권 등 3만권의 책이 소장돼 있었다.
규장각은 활자를 주조하고 서적 출판에도 나섰다.
정조대에 규장각에서 편찬된 서적은 153종, 3991권이나 된다. 양과 질에서 모두 뛰어났다.
정조는 규장각에 특별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도입, 젊은 엘리트 관료를 육성해
개혁정치의 주역으로 삼았다. 정조대에 선발된 초계문신만 정약용·정약전 형제와 19세기 세도정치를 연 김조순 등 142명이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에 위축됐던 규장각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은 1873년 고종 친정 (親政) 이후이다.
고종은 규장각을 왕의 친위기관으로 활용하려 했다.
특히 서양 관련 서적을 적극적으로 수집, 규장각에 비치함으로써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일본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등이 대표적이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이듬해 규장각을 폐지하고 규장각 도서를 인수했다.
총독부는 1928년부터 규장각 도서 14만 책을 경성제대로 이전했고, 해방 이후 서울대로 넘어왔다.
규장각의 후신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현재 고(古)도서 17만5000여 책과 고문서 5만여점, 책판 1만8000여점 등 28만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그중 《일성록(日省錄)》(국보 153호)《비변사등록부(備邊司謄錄附)》(152호)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148호)와 《송조표전총류(宋朝表�}總類)》(150호) 등 7종 7125책이 국보로, 25종 165책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정조시대에 가장 중시된 정치적·문화적 기구인 규장각.
걸출한 학자들을 양성하며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했던 규장각을 설치한 과정이
‘정조실록’(정조 즉위년 9월25일)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
규장각을 창덕궁 금원(禁苑)에 세우고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 관원을 뒀다.
국조에서 관직을 설치한 것이 모두 송나라 제도를 따랐으니 홍문관은 집현원(集賢院)을 모방했고, 예문관은 학사원(學士院)을 모방했으며, 춘추관은 국사원(國史院)을 모방했다
정조 이전인 세조대에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규장각 설치가 제창된 적이 있었다.
숙종대인 1694년(숙종 20)에는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 현판을 걸기도 했다.
숙종조에는 열성의 어제(御製)·어서(御書)를 봉안하기 위해 별도로 종정시에 소각(小閣)을 세우고 어서한
‘규장각’ 세 글자를 게시했는데, 규제(規制)는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규장각은 정조가 ‘계지술사(繼志述事·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의 명분 아래 재탄생시켰다.
처음에는 왕실 도서관 기능을 했지만 정조는 이곳을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키며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규장각은 본관 건물인 규장각과 주합루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됐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을 두었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御眞),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해 국내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曝曬: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휴식공간 부용정이 있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했는데,
이런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조는 규장각을 세운 후 규장각의 연혁과 직제 등을 기록한 ‘규장각지(奎章閣志)’를 편찬하기도 했다.
‘홍재전서’에 규장각지를 편찬한 뜻이 나타나 있다.
1798년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號를
萬川明月主人翁·(온 냇물에 비치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으로 정하고
preface(自序) by the old master of bright moons in all waters
이런 자부심의 바탕에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행한 정치, 문화운동의 성과를 확인하고
스스로 성인 군주가 되겠다는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규장각은 창덕궁의 후원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에 있었다.
그만큼 정조의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규장각을 찾아서 18세기 개혁정치를 진두지휘했던 정조와 정약용 박제가등 규장각을 거쳐 갔던 학자들의 열정을 만났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함대의 일원이었던 쥬베르는 조선 사람들의 책 읽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또 한 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큼 책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한 민족. 조선시대 뛰어난 민족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기록물의 편찬과 보관이라고 필자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궤와 같은 국가적 사업으로 편찬된 기록물부터 개인의 일기나 문집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에는 글을 좀 읽는다는 사람 치고 자신의 기록물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규장각은 선인들이 남긴 뛰어난 기록물과 문화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보물 창고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남겨준 기록 유산들. 이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추구한 삶의 가치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녹아 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은?
우리 역사에서 정조 시대(1776~1800:생몰년 1752~1800)는 '왕조 중흥과 문화 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흥의 꽃을 피우는 데는 적지 않는 어려움이 따랐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세력들의 견제 속에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왕권을 강화하고,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인재의 양성. 이것은 정조가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정조는 왕권 강화와 함께 학문을 장려하고, 학문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구상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생각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공간이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에 의해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왕이 직접 지은 글)나 어필(御筆:왕이 쓴 글씨)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규장각은 정조의 즉위 이후 정치, 문화의 중심기구로 우뚝 섰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경희궁에서 15년을 지내다가 즉위 후 처소를 본궁인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리고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규장각'이라 이름 했다.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속속 규장각에 모았다. 정약용을 비롯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함께 규장각에 나와 연구하면서 정조 개혁정치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제 조선후기의 문화중흥을 이끌어 가는 두뇌집단의 산실이 된 것이다.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대 왕들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전통을 본받아 새 것을 창출한다)'은 규장각을 설립한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정신이었다.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이곳에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라)'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서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때로는 정조 자신이 몸소 그들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학문에 대해 토론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해 학문의 전당과 유교정치 이념을 전파하는 중심기관으로 만든 것처럼 정조 역시 규장각을 통해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개혁 정치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규장각에서는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의 학문적 열정이 담긴 책들이 간행됐다.
규장각은 각신(閣臣)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文院)을 두었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
국내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書庫)와 포쇄(曝쉆: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5022책) 등을 보관했는데, 이러한 책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물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임금의 지침을 적은 규장각 기둥 柱聯
見來客不起 -- 손님이 찾아와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
非先生勿入 -- 규장각 전임자가 아니면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
정조는 젊은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로서, 이들은 매월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르는 등 강도 높은 교육을 받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의 방향을 학습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뤄졌으며 총 138명이 뽑혔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다
*규장각의 영광과 수난
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자료의 보관 및 서적 수집, 출판 등 도서관의 기능과 더불어 문화정책 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나아가서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후원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1782년에는 강화도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외규장각'이라 하고, 역대 선왕의 어제,
선원보(璿源譜:왕실의 족보), 의궤(儀軌:조선시대 왕실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 등을 관리했다.
그러나 외규장각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잿더미가 됐으며, 당시 프랑스군대가
약탈해간 의궤 297책이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규장각은 1910년 일제의 강점과 함께 폐지됐다. 그리고 규장각 도서는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는 규장각 도서를 경성제국대학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1945년 해방이 되자 규장각 도서는 경성제국대학을 승계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됐다(1946년).
규장각 도서는 서울대학교에서도 오랫동안 도서관 소속으로 존재하다가, 1992년에 현재의 독립 건물을 짓고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존재하게 됐다.
현재의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국보 및 보물을 포함한 26만여 점의 고도서, 고문서, 고지도, 정부기록류, 책판 등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학 자료의 중심지이자 전적류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규장각은 자료를 보존, 관리함은 물론이고 한국학 자료를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하는 한편 자료의 D/B화, 전시 및 교육과 홍보 등의 업무를 아울러 수행하고 있다. 연구소이자, 도서관, 박물관으로서의 종합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법고창신'이 필요한 시대 규장각에는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서적들과 고지도, 책판, 고문서가 보관돼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와 같은 방대한 연대기 자료를 비롯해 조선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의궤, 조선시대 지도의 종합판인 '대동여지도' 등 제목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책들이 다수 소장돼 있다.조선왕조실록은 왕의 동정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기록이 중심이지만 사회, 경제, 문화사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조선에 들어온 코끼리 이야기, 도적 홍길동은 연산군대의 실존 도둑이었다는 것, 드라마 '대장금'이 실존인물 '장금'을 모델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 등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의궤에 기록된 왕실 결혼식, 장례식 등의 현장 모습을 담은 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게 한다. 전체 22첩을 모두 모으면 세로 6.7m, 가로 3.3m의 방대한 모습을 드러내는 대동여지도를 통해서는 김정호를 왜 최고의 지도학자라 부르는지에 대해 쉽게 수긍을 하게 된다.
냉면집이 그려진 '평양지도', 거북선이 그려진 '해남지도' 등 조선후기의 지방지도에는 특색 있는 각 지방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얼굴이 까만 사람은 까맣게, 천연두를 앓아 곰보가 생긴 사람은 곰보 자국까지 정밀히 그린 선현들의 초상화 첩을 통해서는 시대를 이끌어간 인물들의 실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외에도 규장각은 한 인물의 사상과 행적을 볼 수 있는 개인 문집들, 각종 기행문과 백과사전류 저술, 또 앞으로 연구돼야 할 희귀본 자료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우리의 시대에 선조들이 남겨 준 기록유산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큰 행운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처음 설립할 때의 법고창신의 정신은 2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魚水, 물과 물고기
친위세력의 정치적 거처 규장각의 탄생과 활동,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정조의 험난한 즉위 과정과 권력투쟁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규장각은 전적으로 국왕 정조의 의지에 의해 탄생했고, 정조의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 아래 규장각의 관료들은 국정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영조는 노론(老論)의 지원으로 왕이 되었고, 소론(小論)의 지지를 받았던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다. 할머니 선희궁 이씨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마저 아들과 남편의 죽음에 일조하거나 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무력(無力) 상태.
정조를 암살하려는 자객이 궁궐 담을 넘는 등 정조는 권력을 행사하기는커녕 목숨마저 걱정해야하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었다. 이 때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정조의 사부이자 핵심 참모, 행동대장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야심가 홍국영은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어갈 그릇이 되지 못했고,
1779년(정조3) 정조는 자신의 오른팔이지만 이젠 세도가로 변질된 홍국영을 과감히 잘라낸다.
그 공백을 개혁세력으로 채워나간다. 새로운 인재 등용에 출신과 배경은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기존의 파워엘리트들은 오히려 정조에게 거북한 존재였다. 새로운 친위세력은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젊은 문관으로 품은 뜻은 높으나 출신이 좋지 못했던 서얼(庶孼)들이었다. 정조는 이들이 활동할 정치적 거처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규장각 탄생의 정치적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정문 ‘어수문(魚水門)’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어수(魚水)’ 물과 물고기로 상징한 것이다.
이는 단지 군신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 만난 고기처럼 규장각의 서고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과 규장각의 관계이기도 했다.
*규장각 - 초계문신
규장각이 설립되자 초계문신과 검서관들이 규장각에 자리를 잡았다.
초계문신 제도는 일종의 ‘관료 업그레이드 프로그램’으로 37세 이하의 초급 문관 중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제도였다. 1781년(정조5) 2월부터 시행하여 정조가 승하하는 1800년까지 142명의 초계문신이 선발되어 학문에 전념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 서유구 등이 초계문신 출신의 관료들이다.
초계문신들은 경전과 역사서, 제술(製述 문장 짓기)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며 한 달에 네 차례의 시험을 쳤다. 그 가운데 출제부터 채점에까지 전 과정을 정조가 직접 챙겼던 ‘친림(親臨)’ 시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조는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한 초계문신들의 참신한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자신의 개혁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초계문신들은 다시 국정 최일선으로 나가 정조의 개혁정책을 자신의 실무에 적용했다.
또한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3만여 권의 도서를 수집 보관하고 4천여 권의 서적을 편찬했다. 명실 공히 규장각은 정조의 싱크탱크이자 인재 양성소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규장각 관료들에 대한 정조의 관심과 애정은 규장각의 근무방침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정조는 규장각에 4개의 수교현판(受敎懸板 왕의 교시를 적은 현판)을 내렸는데 그 중에는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객래불기 客來不起)’ ‘비록 고위 관리나 문형이라도 규장각을 거쳐 간 학자가 아니면 규장각으로 올라올 수 없다 雖大官文衡非先生毋得升堂 라고 쓰인 현판도 볼 수 있다.
외부의 간섭과 방해로부터 규장각을 최대한 보호하고, 규장각 관원들이 학문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정조의 배려인 것이다.
*규장각 - 검서관
검서관(檢書官)은 규장각의 실무를 담당했던 일종의 비정규직으로 규장각의 정식 관원은 아니었다.
정원은 4명으로 연구와 필사 등 규장각의 실제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초대 검서관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였다. 서얼(庶孼) 출신인 이들에 대한 정조의 사랑도 각별했다.
실제로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불손을 문제 삼으며 그의 파직을 요청한 노론의 수장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정조는 “관례를 모르고 한 일이니 뭐 나무랄것이 있겠는가”라며 박제가를 두둔하기도 했다. (정조실록 21년 (1797) 2월 25일)
검서관들은 모두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수용하자’고 주장했던 북학파 학자들이었다.
병자호란(1636) 후 청나라의 볼모생활을 겪었던 효종(孝宗 1619~1659)이후 조선의 대청외교 기조는 ‘북벌(北伐)’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청나라를 통한 신학문 유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이 같은 모순과 충돌을 북학파를 곁에 둠으로써 해결했던 것이다.
규장각검서관들의 활동은 그 동안 국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서얼이 관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기념비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정조의 개방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당시의 사회발전상과 개방성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등에 난 종기로 고생하다가 허망하게 승하한다. 설립자이나 후견인을 잃은 규장각도 점차 위축되어 규장각은 어제를 보관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적을 편찬하는 기관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정옥자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김문식 외 <규장각 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신병주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외규장각의 설립
정조대의 규장각은 8만여 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148종의 저술과 편찬 사업을 주관했으며, 아름다운 활자를
개발하여 출판 사업을 촉진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정조 6)에 강화도 행궁 자리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규장각의 도서 가운데 왕실의 주요 물품과 도서를 보관하는 외부 書庫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강화도는 서울에서 6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해안의 갯벌이 넓고 깊게 펼쳐져 국방상의 요해지로 간주되었다.
앞서 강화도의 정족산성에는 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설치되어 있었다.
정조는 여기에 외규장각을 추가함으로써 강화도를 국가의 주요 기록물을 보관하는 거점으로 만들었다.
19세기에 서양 증기선 군함이 들어왔을 때 강화도는 방어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갯벌의 상태가 선박의 접안이 용이해졌고, 서양식 화포의 위력을 감당할 방어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 프랑스 해군의 강화도 점령
1866년(고종 3), 프랑스 해군은 대원군 정권이 천주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한 사건을 구실로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자국인의 인명이 손실된 것에 항의하고 보복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청나라 체푸芝罘 항에 본거지를 둔 프랑스 극동 함대는 처음에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위협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1866년 10월 11일, 프랑스 함대는 7척의 군함과 1,400 여명의 병력이 동원하여 2차 출병을 했다. 10월 14일에 갑곶진에 상륙했고, 10월 16일에 강화도 관아를 점령했다. 조선 정부는 숙종 대에 갑곶진이 내려다보는 곳에 문수산성을 쌓아 강화도를 비호했다. 프랑스 군이 강화도에 진입했을 때 조선 정부는 병력을 문수산성에 집결시켰다. 10월 26일,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문수산성으로 정찰대를 파견했다가 역습을 받아 3명이 죽고 2명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외규장각 자료의 약탈
1866년 10월 16일, 강화부에 입성한 프랑스군은 19개의 은궤銀櫃를 발견하고 군함으로 옮겨 실었다.
은의 양은 총 887.55kg이었고, 화폐 가치로는 197,231프랑 36상띰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했다. 로즈 제독은 조선의 역사, 문학, 문화 등을 밝혀줄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고, 참모장으로 있던 해군 중령 앙리 주앙Henri Jouan을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0월 20일, 위원회는 외규장각에 있던 도서 340책을 비롯한 약탈 물품의 목록을 작성하고, 강화도 주민들을 동원하여 군함으로 옮겨 실었다.
외규장각 자료 가운데 340책의 도서는 프랑스 황립도서관皇立圖書館으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로즈 제독은 이 신기한 수집품을 각하에게 보낼 생각이었다. 또한 막대한 양의 은괴는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보내졌다. 한문이 기록된 회색 대리석판은 국왕이나 왕비에게 올린 옥책玉冊을 말하는데, 로즈 제독은 이것이 조선의 ‘국왕에게 고유한 사건이나 어떠한 기념할만한 사실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는데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프랑스 국왕과 상관에게 기증했다
외규장각 의궤 가운데 유일본의 자료적 가치는 가장 크다.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풍부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이관된 297책 가운데 289책이 어람용 의궤인데, 이는 국왕이 직접 열람하는 의궤로 비단 표지에 최고급 종이인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했고, 궁중의 寫字官이 필사하고, 궁중의 畵員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어람용 의궤는 책 자체가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국내에는 병인양요 이전에 작성된 어람용 의궤의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이번에 돌아온 어람용 의궤의 가치는 매우 크다.
*세계 주요 선진국의 기록유산을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일본과 중국이다.
의아할지 모르지만 일본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이 현재 아무 것도 없다.
이미 기원 전부터 기록문화가 시작되어 유구히 내려오고 있는 중국도 등재된 것은 5개뿐이다.
그것도 기본적으로 청조 이후의 것들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록에 대한 의식 및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훈민정음
2.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 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
로 기록한 책이며 총1,893권 888책으로 돼있어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3.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이 1372년(고려 공민왕 21)에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ㅜ상· 하 2권으로 엮은 것으로, 역대 고
승들 간의 문답과 경전을 엮어 학승 (學僧)들이 최고 과정에서 배우던 교재 였다.
4.승정원일기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일기 형식으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됐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으로
대부분 소실됐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다.
5.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6.조선왕조의궤
의궤는 국가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작성한 조선왕조의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않았다
조선왕조 의궤는 600여년 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친(1392-1910) 왕실의 주요한 의식
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및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 영상자료처럼 당시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
동 감 있게 보여준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7.동의보감
1613년 한국에서 집필된 의학적인 지식과 치료기술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왕의 지시 하에 여러 의학 전문가들과 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줬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은 동양의학의 총체적 접근법을 담은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들어, 19세기까지는 유래가 없었던 예방 의학과 함께 국가적으로 이뤄지는 공공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
을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
8.날씨부터 국사까지 임금이 손수 쓴 일기장 - 일성록
국보 153호 일성록(2329책) 정조는 조선의 국왕 중 여러 면에서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써 온 일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83년(정조 7) 이후에는 신하들이 기록
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지만, 이후의 왕들 역시 정조를 모범 삼아 국정 일기를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책이 '일성록(日省錄)'이다.
하루에 세 번 살핀다는 '논어'의 글귀에서 그 제목을 따 왔다.
일성록은 정조부터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간에 걸쳐 기록된 2327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보 153-현재 규장각 국보 서고에 보관된 '일성록' - 기록 문화의 또 다른 면모들을 만나보기로 하자.
*일성록'을 만들기까지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쓴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五身·나는 매일 나를 세 번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정조가 '일성록' 편찬을 명하면서 증자의 이 글귀를 인용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785년(정조 9) 정조는 그가 탄생한 후부터 '존현각일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과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 자료로 하여 중요 사항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규장각의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1760년(영조 36)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의 기록이 정리되었다.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에서 따와 '일성록'으로 정해졌고, 조선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151년간에 걸쳐 '일성록' 편찬은 이어졌다.
이처럼 '일성록'은 정조의 세손 시절의 일기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국정의 주요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하는 '승정원일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의 편찬을 지시했고, 결국 '일성록'은 주요 현안을 강과 목으로 나누어 국정에 필요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802년(순조2) 10월에 있었던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혼례식 의궤이다.
[정조대왕의 업적]
1.규장각 설치
기존의 여러학문 연구소의 기능을 병합하여 일원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왕실도서관으로 창덕궁에 설치하였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출신들을 검서관에 등용하였다(1779)
2.초계문신제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하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당하관 이하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켜, 등용하였다.
통상 37세 이하 과거급제자가 선발되었으며 초계문신은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한 제도가 되었다.
3.수원 화성 축조
정조 13년 수원 화산 아래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세우도록 하여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4.수령의 권한 확대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5.대전통편 편찬
1785년 법전 재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집권체제를 확림합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6.신해통공
영의정 채제공의 건의에 의해 신해통공을 실시함으로써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고, 이로써 사상의 자유로운 시장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7.저수지 축조
저수지 축조와 관련된 제언절목을 반포하였고, 수원화성을 개발하면서 대유둔(국영시범 농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만석거. 축만제 등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8.활자의 주조(임진자.정유자.한구자.생생자.정리자)
도합 80여만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배치하여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9.천주교에 관대
정학인 성리학이 제 기능을 다하면, 서학은 저절로 없어질꺼라 보고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산사건이 일어났을때에도 사건을 크게 확대하지 않았다.
10.남인의 중용
사도세자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벽파를 배제하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계열의 시파등을 중용하였따. 시파들의 대부분은 영조대에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이었다.
말 잘하는 50가지 비결
1.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라. - 그 곳에서는 히트곡이 여기서는 소음이 된다.
2.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 말에도 온도가 있으니 썰렁한 말 대신 화끈한 말을 써라.
3. 내가 하고 싶은 말에 열올리지 말고 그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라. - 나 이외에는 모두가 우수고객이다.
4.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지말라. - 체로 거르듯 곱게 말해도 불량률은 생기게 마련이다.
5. 상대방을 보며 말하라. - 눈이 맞아야 마음도 맞게 된다.
6. 풍부한 예화를 들어가며 말하라. - 예화는 말의 맛을 내는 훌륭한 천연 조미료이다.
7. 한 번 한 말을 두번 다시 하지를 말라. - 듣는 사람을 지겹게 하려면 그렇게 하라.
8. 일관성있게 말하라. - 믿음을 잃으면 진실도 거짓이 되어 버린다.
9. 말을 독점 말고 상대방에게도 기회를 주어라. -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교류다.
10.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줘라. - 말을 자꾸 가로채면 돈 빼앗긴 것보다 더 기분 나쁘다.
11. 내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 상대방의 의견도 옳다고 받아들여라.
12. 죽는 소리를 하지 말라. - 죽는 소리를 하면 천하장사도 살아 남지 못한다.
13. 상대방이 말할 때는 열심히 경청하라. - 지방방송은 자신의 무식함을 나타내는 신호다.
14. 불평불만을 입에서 꺼내지 말라. - 불평불만은 불운의 동업자다.
15. 재판관이 아니라면 시시비비를 가리려 말라. - 옳고 그름은 시간이 판결한다.
16.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표정으로도 말을 하라.
17. 조리있게 말하라. - 전개가 잘못되면 동쪽이 서쪽된다.
18. 결코 남을 비판하지 말라. - 남을 감싸주는 것이 덕망있는 사람의 태도다.
19. 편집하며 말하라. - 분위기에 맞게 넣고 빼면 차원높은 예술이 된다.
20. 미운 사람에게는 각별히 대하여라. - 각별하게 대해주면 적군도 아군이 된다.
21. 남을 비판하지 말라. - 남을 향해 쏘아올린 화살이 자신의 가슴에 명중된다.
22. 재미있게 말하라. - 사람들이 돈내고 극장가는 것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23. 누구에게나 선한 말로 기분좋게 해주어라. - 그래야 좋은 기의 파장이 주위를 둘러싼다.
24.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말라. - 듣고 싶어하는 얘기하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25. 말에도 맛이 있다. - 입맛 떨어지는 말을 하지 말고 감칠 맛나는 말을 하라.
26. 또박또박 알아듣도록 말하라. - 속으로 웅얼거리면 염불하는지 욕하는지 남들은 모른다.
27.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과는 가까이 말라. -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맞는다.
28.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라. - 올바른 생각을 많이 하면 올바른 말이 나오게 된다.
29. 부정적인 말은 하지도 듣지도 전하지도 말라. - 부정적인 말은 부정타는 말이다.
30. 모르면 이해될 때까지 열번이라도 물어라. - 묻는 것은 결례가 아니다.
31. 밝은 음색을 만들어 말하라. - 듣기좋은 소리는 음악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32. 상대방을 높여서 말하라. - 말의 예절은 몸으로 하는 예절보다 윗자리에 있다.
33. 칭찬 감사 사랑의 말을 많이 사용하라. - 그렇게 하면 사람이 따른다.
34. 공통화제를 선택하라. - 화제가 잘못되면 남의 다리를 긁는 셈이 된다.
35.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하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다. -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라.
36. 대상에 맞는 말을 하라. -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듯 좋아하는 말도 다르게 마련이다.
37. 말로 입은 상처는 평생 간다. - 말에는 지우개가 없으니 조심해서 말하라.
39. 품위있는 말을 사용하라. - 자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인격을 나타낸다.
40. 자만 교만 거만은 적을 만드는 언어다. - 자신을 낮춰 겸손하게 말하라.
41.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지 말라. - 그것은 임종할 때 쓰는 말이다.
42. 표정을 지으며 온 몸으로 말하라. - 드라마 이상의 효과가 나타난다.
43. 활기있게 말하라. - 생동감은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원동력이다.
44. 솔직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하라. - 그것이 승리자의 길이다.
45. 말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말라.
46. 실언이 나쁜 것이 아니라 변명이 나쁘다. - 실언을 했을 때는 곧바로 사과하라.
47. 말에는 메아리의 효과가 있다. - 자신이 한말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48. 말이 씨가 된다 -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
49. 말하는 방법을 전문가에게 배워라. - 스스로는 잘하는지 못하는지 판단하지 못한다.
5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 그래야 넉넉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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