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의 의미
최명임
“서답은 땟자국 없이 빨아서 항상 정갈하게 간수를 해야 하는기라.”
애꿎은 방망이질과 비누의 거품이 어우러져 어머니는 당신의 삶 한 자락이 눈물겹게 씻기어 나가던 빨래터를 잊지 못하셨을까. 세탁기를 두고 고집스레 손빨래를 하셨다.
어머니가 하시는 서답에는 방망이질과 매운 손끝에서 땟자국 한점도 놓치지 않는 정성과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가슴이 없는 기계보다 우월했다. 어쩌다 오시면 어수선한 내 장롱과 서랍 속에 무심함을 들추어 보셨는데 바쁜 처지를 핑계 대면서도 무안했다. 계시는 동안 빨래거리는 정성스런 손에서 환탈하는 서답이 되었다. 어머니는 빨래의 진정한 환탈換奪을 알고 계셨다.
한 살배기 손자의 옷을 빨았다. 옅은 땟자국과 젖 냄새와 아기 냄새가 달다. 아기의 단내를 기계에 맡기기엔 마음이 허락지 않아 조물조물 비벼 널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비로소 헤아릴 것 같다.
알라딘이 지니를 부르듯 집집마다 지니를 부르는 소리 요란하다. 여기저기서 툭툭, 삐삐 “주인님, 부르셨나요?”
문명의 혜택은 인간의 노동을 절반으로 줄였다. 아니 그 이상이다. 손품에서부터 발품에 이르기까지 버튼 하나로 이루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알라딘의 요술램프 하나쯤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인공지능에 길들여진 나는 그 편리함에 만성이 되었는데 지난번 알파고의 위협에는 은근히 두려움을 느꼈다. 어느 날 영혼까지도 저당 잡힐 것 같은 두려움이다. 알파고에 진 것은 바둑기사 이세돌이라 했으니 인간의 두뇌는 여지없이 알파고를 위협할 묘수가 나오리라 믿는다.
다시 빨래터를 찾거나 무쇠솥에 밥을 안칠 용기는 없다. 장문의 손 편지를 쓸 여유는 더더구나 없다. 마음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간이 그때를 그리는 이유는 내 안에 녹아있는 무엇으로 인해 잊혀져가는 정서를 맛보고 싶은 것이리라.
바쁜 하루를 벗어놓은 가장의 옷 냄새가 역하고 강하다. 번잡한 때와 노동의 애로와 술 한잔에 풀고 온 회포가 뭉글뭉글 배어있다. 짠하고도 애정이 간다. 세탁기에 넣고 묘약 두 숟갈도 함께 넣었다. 하나는 정화작용을 하고 다른 하나는 향기를 품어 격을 높이려한다. 담백하게 버튼을 눌러놓고 나는 능력자가 된 느낌이다.
혼란 속을 들여다보았다. 깊은 뜻을 모르는 군상들이 아연하다. 묘약은 슬금슬금 스며들고 취한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 들자 예고도 없이 태풍이 휘몰아쳤다. 한점 흠도 용납할 수 없는 영약은 깊이 파고들어 하얀 거품을 일으킨다. 숨이 턱에 닿도록 몰아치다 물세례로 뒷수습을 한다. 다시 반복하기를 여러 차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의 묘수처럼 현란眩亂하다.
진액까지도 짜버렸나. 기절한 듯 쓰러져 누운 빨래를 꺼내는데 품은 향기가 은은하다. 툭툭 털어 구겨진 부분을 반듯하게 펴고 일그러진 표정을 만져서 달래었다. 눈부신 볕과 청정한 바람에 널었더니 상쾌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탄다. 본래의 저는 있으되 거듭난 모습이 영락없는 환탈이다.
그끄제 방앗간에 갔을 때 기름을 짜내던 모습과 흡사하다. 들깨를 물에 일어서 말렸더니 뽀송뽀송한 것이 알차다. 건네받은 주인은 능숙하게 버튼을 누르고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난亂이다. 들여다보던 나도 현기증을 느낀다. 감당하자고 내맡긴 몸이 불덩이가 되었다. 질기게 덮고 있던 허물이 벗겨지자 진액이 흘러나왔다. 참이요, 본질이다. 향기가 진동을 한다. 하물며 사람이야, 우러나는 향기가 얼마나 진하고 달콤하겠는가. 본질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갑각류의 등짝보다 단단하고 업장같이 질긴 허물을 몇 겹이나 벗겨내어야 할지 몰라서 진흙탕 속을 헤매기도 한다.
문제의 사람이 거듭났을 때 우리는 환골탈태했다고 박수를 보냈다. 그 사람 또한 저라고 여겼던 저를 버리는 고뇌와 쓰라린 인내가 있었을 게다. 환골탈태는 번뜩이는 신의 메시지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천지개벽이다.
햇볕이 좋아 잘 마른 빨래를 걷었다. 빨래가 기계의 힘을 빌려 환탈을 했다면 손으로 개는 일은 확신이다. 빨래를 개고 앉았으려니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친구의 남편이 혈기왕성한 20대에 해인사에 여러 날을 머문 적이 있었단다. 해인사를 이웃하고 살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노스님이 그의 방에 들렀다가 이불과 빨래를 갠 모양새를 보고 “고놈, 쓸 만한 놈이로세. 됐다.”하고 가셨단다. 빨래를 개놓은 모양새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과 됨됨을 알아보셨을까. 그만하면 제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쓸 만한 놈이라는 스님의 안목인 게다. 이불도 빨래한 옷도 각을 잡아서 반듯하게 접어놓았다던 그는 빨래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빨래의 최종목표는 옷으로 거듭나 주인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옷의 임자가 앞태 뒤태 돌아본 뒤 만족할 때 환탈의 미는 정점을 찍는다.
빨래는 매일 내 손에서 환탈을 한다. 아침 댓바람부터 지니를 불러내고 부랴부랴 나서는 식구의 입성을 앞태 뒤태 돌아본다. 빨래를 걷어 들이고 전쟁터로 나가는 투사의 옷을 정성으로 다림질을 한다.
나도 매일 거듭난다. 육신은 어제의 내가 아니고 내일의 내가 아닐 테니 거듭남은 분명하다. 나는 거듭나 본 적이 있던가. 환탈이 아니어도 나인 척 내안에서 행세하는 모순덩어리 하나쯤 버리는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내게서도 향기가 나려나.
* 서답 : 빨래의 경상도 방언
첫댓글 서답이 빨래이군요. 잘 읽고 갑니다.
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말과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오선생님 좋은글 저도 가슴으로 읽었답니다.
잘 읽었습니다. 샘
샘, 많이 바쁘시지요. 와중에도 제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 꼭 챙겨 가며 일하셔요. 행복한 전원생활이 부럽습니다.
선생님, 빨래를 두고 한 인간이 환골탈태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군요. 빨래 과정의 묘사가 참으로 재미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때를 벗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기계의 힘을 빌리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밴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많은 것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지도 편달에 제가 성장해가는 느낌입나다.
아직 길은 멀지만 10년후를 바라보며 열심히 가려합니다.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일상,
빨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깊게 이끌어내셨네요.
서답이라는 사투리도 정겹게 들리네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납니다.
제게는 모지 인 수필과비평에 계제된 작품이었는데 지금에야 봤습니다. 여성들에게는 일상인 빨래를 조근조근 일괄성있게 작가의 철학을 담아 풀어내셨습니다. 한국산문에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변선생님, 지금에야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말씀에 더할나위없이 용기를 얻습니다.
더 많이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