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년이면 열렸던 곳간에서 살맛나는 세상을 엿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주여행/ 최부자댁]
살맛나는 세상에는 "나눔의 실천"이 있었고, "국가 없이는 부자도 없다"는 투철한 국가관이 있었습니다.
최부자의 마지막 후손인 문파 최준 선생은
동아일보 주주로서 현재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 설립및 계림학숙 설립때 두차례에 걸쳐 전재산을 기증하였고
독립운동에도 기여를 하여 한 때 가산이 크게 기울어져 파산지경에 이르기도 했었으며,
독립자금제공이 탄로나서 옥살이도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도 "최부자 아카데미"를 짓고 있는 중인데
최부자의 가훈은 기업경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청소년은 물론 CEO를 대상으로 교육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만의 특별한 노하우는
인간의 본질인 욕망으 절제하고 겸손과 나눔을 실천하였기에
올곧은 참부자의 맥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경주 최부자댁의 6가지 가훈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말라: 양반자격유지를 위해 벼슬은 하고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리려는 과욕은 삼가하기위해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만석을 초과할 경우 초과된 소작료를 돌려주었다.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상대방의 어려움을 자신의 부의 증식에 이용하지 않는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역활의 과객을 통해 지식정보를 습득했다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어려운 이웃에 베품으로서 이웃의 인심을 얻고 가문의 덕을 쌓았다.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집안의 전통인 부지런함과 절약정신을 가르치기 위하여~~
100리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도록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만석의 재산이 넘을시에는 모두 사회에 환원함을 솔선수범하였습니다.
해방이후에는 부자를 잇지 못하였는데 이유는
사립학교설립에 지원을하고
독립자금에 사용하였으며
토지개혁때 모든 지주들은 소작인들에게 쌀 1되만 받고 나눠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집온 며느리가 3년동안 무명옷을 입으며 근검절약을 먼저 배워서
쓸 수는 있지만 낭비를 하지않는 습관을 지니게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찾아오는 외부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며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곡식 수확량의 1/3을 과객의 접대에 사용하며 정보의 장, 교류의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솟을대문의 형식이지만 화려하지않고, 일반적인 솟을대문보다 낮게 지었다고 합니다.
한 껏 멋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작은 사랑채터는
현재는 불에 탄 작은 사랑채터 주춧돌만 남아 있지만
손님이 많아서 작은 사랑채까지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12대동안 만석지기 재산의 터전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서 9명의 생원진사도 배출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