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6일 월요일
지리산
김미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급히 식구들을 챙겨 하동으로 갔다. 수원역에서 동생 영진이 식구들과 만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영진이는 의사라 그런지 나보다 훨씬 침착하고 담담하였다.
어머니가 왼 다리에 약간의 관절염이 생겼는데 그게 죽음의 원인이 아닐거라 진단했다. 장례식장에 가면 알거라 가늠하였다. 막내의 전화는 끊겨 있었다. 어머니 사망소식도 옆집 정씨 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 아저씨, 우리 영숙이는 어디 갔어요."
"영숙이는 며칠 전부터 안 보이던뎨 ㆍㆍㆍ 아마 산에 갔을거야"
나는 영숙이가 한 달 넘게 걸리는 히말라야에 간 건 아니겠지, 영숙의 산악회 회원들에게 전화했다. 같은 동네 친구 원정메게 전화했다.
" 영숙이요. 산악회 모임이 없어서 혼자 가까운 지리산에 갔어요. 하루에도 갔다올 수 있는데 이틀이나 안 왔다면 어디 다쳤을까요?"
" 글쎄 너희가 한번 올라갔다 올래?"
"그럴께요"
출상이 끝났을 때도 영숙의 소식은 없었다. 친구들도 영숙의 소식을 갖교 오지 않았다.
나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직장에 사직서를 냈다. 중소기업이라 명에퇴직을 권하기도 했고, 어머니의 식당을 넘길 수도 없었다.제첩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이라 전국에서 단골도 한 둘이 아니었다. 아들과 아내는 서울에 남고 나 혼자 귀촌을 했다. 같은 고향 친구들도 무척 반기고 어머니야 세월 따라 돌아가시니 너라도 어머니 손맛 이어가라고 위로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장마자 영숙이의 방에 들어갔다. 식당 2층에 어머니와 영숙이의 살림집이 있었다. 영숙이는 공부를 잘하여 인문계를 가도 되는데 특별히 뜻이 있다고 실업계를 갔다. 사실 나와 동생의 학비 때문에 어머니는 허리가 휘고 다리가 구부러질 지경이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마음이 따뜻한 영숙이가 어머니늘 돕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겠자ㆍㆍ
책상 속에서 큰 공책이 하나 있었다. 일기장일까?
첫 장에 이원규 시인의 시가 적혀 있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적신한사라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모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시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해여 반야봉저녁 노을을 푸으려연
여인의 두부를 스치는 유정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푸유 만지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저므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울을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 눈 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 붓ㆍ러시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 꿈을 따라
온 몸불사르는 혁며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성계곡에는
아무것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 모래일처럼 경허하게 오고
연화봉 벼랑과고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시지 미시라
몇 년 전 이원규 시인이 우리 마을로 와서 시도 쓰고 사람들과 주변 산과 들을 감상해서 전국방송에 방영되기도 했다. 나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사이카를 타고 섬진강가를 타는 모습을 보고 나도 언젠가 그러리라 다짐했다.
일기장이었다.
영숙이의 중학교 때 속마음이 아주 꼼꼼히 표현되었다.
1학년 때에는 같은 반 친구들에 대해서 많이 써져 있었다. 단짝이 드디어 만들어졌다는것이었다. 지금도 산악회 회원인 원정이, 함께 같이 살자는 약속을 했다.그 다음엔 어머니에 대한 얘기였다. 서울로 대학을 간 나, 등록금을 마런하려고 정씨 아저씨한테 어머니가 모은 돈에 백만원을 보탠거다.
2학년 때는 주로 같은 반 친구 정식이에 대한 이야기다. 공부도 잘하고 다른 친구들한테 싹싹한데 집이 가난하다는 것, 그래서 무리 집에 아르바이트를 시킬 건지 어머니한테 여쭐 건지 고민한 얘기가 많았다. 그리고 마음 속에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원정이와 함께 살자고 약속했으니 어쩔까 고민했다.
3학년 때는 고등학교를 결정하는 거로 네 장이나 길게 썼다. 어머니에 대한 게 제일 많았다. 영숙이가 세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세하게 썼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특히 의대를 가겠다는 영진의 고집을 꺾지 못하여 저녁 내 속울음을 삼키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영숙이는 평생 어머니 곁에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는 어머니 식당에서 서빙하며 지냈다. 어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옷도 사고 팥빙수도 사먹고 박경리 문학관에서 기념품도 샀다. 친구들과 다른 식당에서 재첩 수제비를 사 먹기도 했다.
성인이 되었을 때는 산악회에 가입한다. 산악대장이 되는 걸 목표로 매주 토요일마다 백두대간 산을 올랐다. 설악산부터 한라신까지 피땀 흘리며 등산 실력을 높혀 나갔다. 명절 때 고햐메 오면 어머니가
"아야, 영숙이 좀 말려라. 저렇개 산에만 다니니 다리가 성하겠냐"
"오빠, 엄청 산이 좋아. 사람들도 좋고 몸도 좋아져"
영숙이는 삶의 이유가 산이라고 애걸복걸했다. 사실 나도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으나 먼저 살아야 해서 미루어두어었다. 그나저나 영숙이는머디로간거야
실종신고를 했다. 정식 탐방로는다치 거나 죽는다면 금새 찾아진다. 혹시 길이 아니거나 가파른 길이나 깊은 곳이라 무서운 짐승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을까. 경찰서 경위,국랍공원찍원이랑 며칠을 찾아 다녔다. 오전 장사를 마치고 초등학교 동창인 한수에게 매장을 맡기고 한 봉우리씩 헤맺다.국립공원사무소에서 나온 나이 많은 직원이
" 아이고, 그 베태랑이 무슨 일인기요. ?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진 않았을텐데, 한 걸음이면 대피소인데 ㆍㆍㆍ 직원은 안타깝다는 듯 넋둔라를다.
성삼재에 갔다. 그곳에서 비빔밥을 파는 어머니 친구에게 영숙이의 비보를 알렸다. 그 이모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주 성삼재에서 비빔밥을 먹곤 했단다. 시집갈 채비를 하라고 하도 많이 하니까 짜증부린다고 서운해 했다.
노고단으로 갔다. 온갖 꽃들이 나를 반겼다. 잠시 영숙이를 잊고, 지난 여름 원추리가 나를 반기며 웃었을 것 같은 상상에 빠졌다. 워낙 터진 공간이라 영숙이의 자취는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피아골에 갔다.붉은 단풍잎들이 정점에 이르러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했다. 마음만 먹으면 며칠이라도 지낼 수 있겠다 싶었다. 사람찾는다는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이장 집에서 백숙을 먹었다. 같이 간 사람들도 단풍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벌써 허탕을 한지 닷새가 지났다.
그 다음은 쌍계사였다. 중산리를 가는데 빠른 곳이라고 해서 갔다. 간 김에 졸졸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잠시 예날 추억을 떠올렸다. 소풍 때 옆반 여자 아이가 시냇물 위에 별의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반 담임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애는 무용반이라 머리를 길었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반쯤 구부린 허리에 감고 서 있었다
"잘했어, 다시 이번엔 왼 쪽으로 다리를 반쯤 구부려"
우리는 영화를 찍는 것 처럼 한바탕 부러움과 질투에 잠겨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 댔다. 그래서 그 애는 단발로 해야 했다.
불일폭포에 갔다 사람들이 물방망이에 등을 때리고 있었다. 영숙이도 근육을 펴느라 등을 대고 있었을까? 그러다 물의 기세에 휩쓸렸을까, 그날은 너무 늦어 돌아서야 했다.
그 다음날은 손님이 너무 많아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전단지를 보자마자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아주 잘 이른 처녀라고 했다. 젊은 처녀가 왜 산에서 길을 잃었냐는 거냐고 이상하다는 것이다. 한참을 그 얘기로 자리를 시끄럽게 들썩였다. 혹시 비슷한 사람이라도 봤다는 말은 한 건도 없었다.
영진이 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리산에서 추락사고가 나서 비행기로 젊은 여자가 자기병원으로 왔다는 것이다. 신원을 안 수가 없고 너무 급한 수술을 해서 온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다는 것이다. 눈만 살아있다는 것이다.
혹시, 나는 수원 영진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영진이는 내과라 직접 수술에 참여한건 이니었다.
그 사람은 온 몸에 붕대를 두르고 눈과 입만 보였다. 나는 혹시 영숙이냐고 물었다. 눈이 가만 있었다.목을 움직잏 수 없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모든 건 영진이한테 맡기고 막차로 내려왔다.
국립공원 직원에게 물었더니 영숙이는 아니었다. 다른 산악회 회원인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 급하게 혼자 갔다고 하였다.
거의 일주일만에 다시 등산을 햇다. 자살을 많이 한다는 연화봉에도 영숙이의 자취는없었다. 칠성계곡, 벽소령, 세석평전, 촛대봉을 더듬어 갔다. 이십여일이 지나니 차츰 이미 죽은 동생에게 미안해서 체면치례 하는 건 아닌지, 나 땨문에 고생시킨 것이 미안해서 그러는 게 아닌지~~
나는 일요일 날 혼자 천황봉을 향해 갔다. 새변 일찍 성삼재까지 자가용을 가지고 갔다. 워낙 일찍이라 주차장에 서너 대만 지키고 있었다. 그동안 내 등산 실력도 수준급이라 속도가 빨랐다. 장터목에 도착하니 뿌였게 날이 봙아오고 있었다. 더 속도를 높이니 일출이 시작되었다. 야호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 나도 덩달아 말을 잃고 한참을 서서 해를 보고 있었다.
"아니, 큰오빠"
"아니 영숙아"
나는 영숙이를 안고 엉엉 울었다.
영숙이는 무려 이십 이일 동안 장터목에서 기상이 좋아지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구름이 많이 끼거나 비가 내리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애타게 해서 몇몇 사람들과 거의 식구처럼 ㅈ냈다고 한다.게다가 마음 터놀 남자친구도 사귀었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