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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16장1~20절
제목 :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십니다.
이른 아침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고난을 받고 수치를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길이요 구원의 길임을 또한 말씀하셨습니다(10:45).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보면서 도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일어났던 특별한 일들을 보면서 변화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그 전에는 소극적으로 남몰래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타난 특별한 일들을 보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사회적 특권과 지위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용기 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기에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귀하고 좋은 매장지조차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이틀 뒤,
여인들이 향료를 준비해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시신은 보이지 않고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려주며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도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생각지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만났다고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헛되이 주님을 따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처럼 십자가나 부활과는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생활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진리에 감격하고 부활의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진정한 헌신이 가능하고, 우리의 삶도 주님께 합당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들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을 꾸중하시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을 맡기십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1~8절)
1) 무덤에 간 여인들(1~4절)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말씀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곧 토요일 자정이 지나고 유대인의 새 날인 일요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했습니다.
향료는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서 시신 위에 뿌려졌고, 이는 사랑의 헌신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열 만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3절입니다.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태복음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시체의 도난을 우려하여 군사들을 배치하도록 요구해서 군인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도 모른 채 막연히 슬픔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슬픔이 너무 크면 구체적인 계획 없이 어떤 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돌이 이미 굴려져서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4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마태복음을 보면 지진이 나며 천사가 돌을 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아주 자유스러운 몸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주님은 문을 닫고 여는 일 없이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시고, 홀연히 어디로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무덤 문이 열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덤 문이 열린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제자들에게 확실히 하기 위한 하나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청년의 모습을 한 천사가 있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린 천사(5~7절)
(1)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갔습니다(5절)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여인들은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자 깜짝 놀랐습니다.
(2) 천사는 주님께서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 줍니다(6~7절).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 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 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인들은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예수님의 몸이 없었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며 동일한 역사적 한 인물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또한 빈 무덤이 그것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하나님께 받아 천사가 전해 준 이 증언에 근거하며,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결단 앞에 서게 합니다.
여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말은 베드로를 구별하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마가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베드로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영합니다.
베드로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아 열 한 제자의 무리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신빙성이 있는 증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3) 놀란 여인들(8절)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접한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여인들은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알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는 심정으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고 다시 갈릴리롤 돌아가리라고 하면서 무덤을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허탈감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2.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9~14절)
1)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9~11절)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예수님께서는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 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즉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부활 상태의 예수님을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들이 처음에는 두려워 떨었지만,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기쁨으로 뛰어가서 제자들에게 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10~11절입니다.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12~13절)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12~13절은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처음에는 믿지 못했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부활을 믿고 기쁨으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지만 그들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환영을 본 것으로 여겼습니다.
3)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심(14절)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요한복음20장17절 도마에게 나타 나시고,
5) 고린도전서15장5~6절에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3.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15~20절)
1) 복음을 전파하라(15~16절)
(1)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절)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복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잘 모르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하면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살아 있고 영원한 소망을 주신 것이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범위와 대상은 온 천하요 만민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위대한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2)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절).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는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멸망이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보통 믿는 자와 세례 받는 자를 동일시 하지만 세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 후반부는 복음을 믿는 자와는 대조적으로 믿지 않는 자는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 정죄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믿는 자들에게 있을 다섯 가지 표적(17~18절).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구절은 믿는 자에게 따르는 다섯 가지 표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란 사도들의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초자연적 사건들입니다.
표적들은 초대 교인들이 선포한 그 신앙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그들 중의 누가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할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1)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많은 분들은 귀신을 정신적으로 이상한 일을 하게 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할때는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입니다.
성경에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아름답고 그럴듯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죄를 짓게 하는 죄의 세력을 주님의 능력으로 쫓아내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얽매였던 세상의 것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새 방언을 말한다고 합니다.
방언에 대한 논란은 많습니다.
하나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과 함께 임했던 방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은밀하고 깊게 기도할 수 있는 방언입니다.
새 방언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능력으로서 외국어를 말한 것 같습니다.
(3)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을 받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질서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복음을 전파하거나 믿음의 생활에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경험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바울이 멜리데라는 섬에서 무서운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그 섬의 토인들이 즉시 바울이 죽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바울은 아무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의 일행이 토인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게 되었고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하나님께 특별한 보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4) 손을 얹은즉 아픈 사람들이 낫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너무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압니다.
이 모든 표적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또는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시는 능력들입니다.
20절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3) 승천(19~20절)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 구절은 두 개의 상호 밀접히 관련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스데반이 본 환상에 의해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증명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은 끝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다른 의미에서 이 땅 위에서의 지상적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나가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되었습니다.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힘주고 그의 말씀에 수반하는 표적들을 통하여 자기의 말씀을 확증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종교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병 고침도 요술로 취급되었을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하나의 비극적인 순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속하는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죄 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인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죄 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청산되고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고전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므로, 일반 신자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벌써 된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성을 입으셨던 이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므로, 모든 다른 인간성의 소유자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모든 인간은 부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여러분도 부활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차 다가올 부활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소망이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요, 우리 죄 속함의 보증이 되며,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확증이 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삶.
신앙생활이란 막연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과 삶에 활기를 넘치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물론 십자가 없는 부활도 큰 의미가 없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고 십자가에 감격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예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먼저 우리의 신앙이 분명해집니다.
신앙생활이란 막연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우리도 오늘 본문의 여인들처럼 복음의 확신 없이 인간적인 신실함과 사람들의 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으면 극한 상황에서 우리의 인격적인 신실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으며, 또한 아무리 기적을 많이 체험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 했습니까?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과 삶에 활기를 넘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첫 열매라는 것은 다음에도 같은 열매가 맺힐 것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나아가 우리도 나중에 부활할 것이라는 살아 있는 소망을 줍니다(벧전1:3).
그리고 그 산 소망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진정한 기쁨과 생동감을 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진정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인간적인 열심과 헌신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떻게 제자들처럼 우리의 소망과 바람이 무너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부활을 믿으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특별히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이 뜨거워졌을 때부터 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성공과 명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주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헌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됩니다.
분명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나쁜 짓 하지 말아라’, ‘정의롭게 살아라’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윤리만을 위한다면 반드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정직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권력과 재물, 그리고 어떤 세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의롭게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6.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다.
주님은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만큼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 놀라운 사실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표적 또는 기적이 당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비스럽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경험한 기적들을 기록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아브라함, 광야생활, 오병이어,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등).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지금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순간순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는 신앙입니다.
어떤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가?
그러면 믿는 자가 어떤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1) 우리는 마귀에게 해방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해방되는 것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얽매인 것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뱀을 집으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치의 병에서 치료를 받고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해결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자동차 사고를 당해도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요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기도할 때 기적적인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3) 봉사하며 전도할 때 기적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주시는 것은 기적 자체에 목적이 있거나 사람들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고 복음이 더욱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나태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기적적인 일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전도하는 사람들이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성경에 있는 놀라운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많이 경험하려면 기도하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들 도망했고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음에 그들의 신앙과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 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만남이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지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소망할 때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고 우리의 매일의 삶도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해야 할 태도와 당연히 경험할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을 믿는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전도와 봉사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적적인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묵상 Point
1) 말할 수 없는 부활
예수의 죽음과 매장의 증인이 되었던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난 후 향품을 사서 예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다음 날 일찍 무덤을 찾는다.
그들이 향한 것은 예수의 시신이었고, 그들이 근심한 것은 무덤을 막은 큰 돌이었다.
그것은 죽은 스승에 대한 값진 예의였지만, 아무 위로도 받지 못할 공허한 의식이요, 자신들의 무력함만 확인하는 애처로운 열정일 뿐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우려와 달리 무덤의 돌은 옯겨져 있었고, 무덤 안에는 예수의 시신 대신 한 청년이 있었다.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놀라고 떨고 무서워 한다.
즉시 그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음이 생명으로 대체된 이 부활은 여인들의 모든 상식과 전통과 통념을 깨뜨린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생명의 현시에 대한 인간의 최고의 찬양의 찬양은 ‘침묵’이 아닐까.
그 침묵의 찬양으로부터 목숨을 건 증인의 삶이 창조되는 것은 아닐까.
2) 믿기지 않는 부활
예수는 죽음과 함께 부활도 이미 예고하신 바 있다.
예수의 죽음을 믿지 않았던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을 리 없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슬피 우는 제자들에게 부활이 선포되었지만 믿지 않았다.
시골로 가는 두 제자도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 증인이 되었지만 다른 제자들 역시 믿지 않았다.
제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만든 메시아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믿음 없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준엄한 꾸짖음이 내려진다.
그들이 완악함을 폭로하고 헛된 끔을 산산조각 내는 책망이다.
그리고 나서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온 천하에 다니며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그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사탄의 나라가 물러가는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볼 것이다.
3) 믿음으로 감당한 사명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자 사명을 받은 제자들만 남았다.
부활을 믿은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여 울고 있던 제자들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이 그들을 변화시켰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의 증거 사역에 함께해주셨다.
숱한 표적이 예수님의 부활과 복음의 확실성을 증명해주었다.
말씀 가이드
십자가 여정은 죽음을 위한 시간이면서 모두의 부활을 위한 시간이다.
꽃가지에 다린 꽃을 보며 꽃대가 길면 벚꽃을, 꽃받침이 젖혀지면 살구꽃을 연상하며 대략 짐작한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해 여러 차례 이야기하셨지만,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무덤은 열렸고 부러진 모든 것들 사이로 예수는 부활하셨다.
죽음이 사라진 무덤. -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향료를 바르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다시 오신다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슬픔을 준비한 여인들에게 첫 부활의 소식을 듣게 하신다.
다시 만난 예수. - 불신의 먹구름은 좀처럼 제자들의 가슴에서 걷히지 않았다.
마리아와 여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여전히 제자들은 불신의 철책을 뛰어넘지 못했다.
적어도 주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지 말이다.
주님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 간절히 찾아라.
새로 받은 사명. -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이후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새로운 사역의 전환점을 마련하셨다.
마치 부활을 통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의 주로 승리를 선포하신 것처럼, 다시금 부활의 능력으로 제자들을 견고히 세우셔서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이어가게 하신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셨다.
모두가 확신한 죽음을 뚫고, 목련꽃 아래로 찾아와 부활 소식을 듣게 하신다.
그리고 또 다른 부활의 꽃을 피우라 하신다.
죽음의 사월이 아닌 주께서 주신 새로운 사월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11절 주님의 곁을 끝까지 지켰던 여인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십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난 후에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다가 맨 먼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접합니다.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무덤을 찾지 않을 때,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는 맨 처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합니다.
주님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따른 자들을 사용하셔서 부활을 첫 목격자, 첫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2-6,19절 빈 무덤은 주님의 부재가 아니라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상 왕은 화려하고 위용 있는 무덤과 그들이 남긴 유산을 자랑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죽음을 증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한 사건입니다(고전 15:20).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온 세상의 왕이 되셔서 모든 택한 백성이 그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십니다.
7절 주님의 체포 후에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초청하십니다.
처음 그들을 부르신 곳에서 다시 참 제자로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주님을 부인하고, 반복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다시 부르셔서 회복하시고 더 단단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11-20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십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들의 말에 표적을 더하여 그들이 전한 복음을 확증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더 이상 주저하거나 도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주의 부활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적의 종류와 내용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우리가 증거하는 주님은 변치 않으시고, 복음을 들은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할 이는 누구입니까?
[기도]
공동체-부활의 주님을 증언하는 제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힘과 지혜를 주소서.
열방-에티오피아에서 종교와 인종간 갈등으로 3백만 명이 피신하고, 수십 명이 사망하였다.
에티오피아에 폭력 사태가 그치고 평화가 정착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