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나들이 하는 간송미술관 소장..
'서울촌놈' 이란 말이 실감나는 날이었습니다. 청계천을 정비하면서 옛날 동대문구장 자리에 명칭과 모양이 특이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란 게 들어섰는데, 그 모양이 비행접시 비슷해 보입니다. 주변도 온통 빠뀌어 옛 모양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하늘에서 본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암튼 이곳에 나들이 전시되고 있는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들을 보려고 우리 중늙은이들도 노구(?)를 이끌고 나들이 나왔습니다. 지하 2층이라는 '어울림광장'은 층수를 분간키 어려워 몇몇 회원들은 헷가리기도 했지만 제시간(3:20)에 모두 집합하네요. M1(뭔 소총 이름인가^^) 이란 곳에서 거금(8,000)의 입장료를 내고 티켓을 사서 지상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갑니다(국가 유공자증이 있는 김수*회원 덕분에 2명이 무료).
정확히 3시 30분에 여성 큐레이터(우리야 좋지만, 왜 큐레이터는 모두 여성인거야 -_-;;)가 간송(澗松) 선생의 일대기를 필두로 작품설명에 들어갑니다. 유창한 해설까지는 좋았는데, 굳이 흠이라면 가끔 오바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간송선생의 우리 문화에 공헌한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하고, 작품 두어가지만 골라 큐레이터의 해설을 참고하고 인터넷 양(?)의 도움으로 약술코자 하오니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우리 문화의 거목 澗松 전형필 (1906~1962)
간송(澗松) 전형필은 1906년 서울 구한말 중추원의관을 지낸 최고의 갑부 전영기의 차남으로 태어나 숙부 전명기의 양자가 된다. 증조부 전계훈은 정3품 궁내부 참사관으로 종로 일원 상권을 장악하고 중부권 일대 대농장을 소유한 대지주다. 이를 물려받은 조부 전창엽과 부친도 더욱 확장해 대부호가 된다. 유년시절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간송은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 법학과를 졸업한다. 1919년 숙부가 사망하고 이어서 친형인 전형설이 요절했으며, 1929년에는 친부마저 작고하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된다.
1930년 와세다 졸업 후 귀국하면서 휘문고 은사이며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인 고희동을 찾는다. 그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한학자요 서예가였던 오세창을 만나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받고 서화·골동품을 비롯한 문화재를 본격 수집하게 된다. 간송은 문화재 국외 유출을 막으려고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해 충직한 거간인 이순황에게 맡겨 고서적·서화·화첩·도자기·불상 등을 사들이기 시작한다.1934년엔 성북동에 토지를 매입하고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해 수집한 문화재를 보관하고 연구할 터전을 마련한다. 간송은 국내 거간인과 소장가들에게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인 ‘경교명승첩’과 ‘해악전신첩’, 심사정의 ‘촉잔도권’, 단원 김홍도의 화훼영모도인 ‘모구양자’와 ‘황묘농접’ 등 고서화를 구매한다. 또 일본의 수장가를 찾거나 경매를 통해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 ‘혜원전신첩’(국보 135호) 등 국보급 문화재를 고가로 매입했다. 1938년에는 국내 최초의 사설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건립해 문화재 수집을 활성화한다.1937년 일본에서 영국인 변호사인 존 개스비(John Gadsby)가 25년간 모은 수십 점의 국보급 고려자기인 ‘청자기린형향로’(국보 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66호), ‘청자압형연적’(국보 74호), ‘청자원형연적’(국보 270호) 등을 경매로 매입했다.
1942년 국문학자 김태준이 소개한 경북 안동의 이용준이 몰래 소장해온 ‘훈민정음 해례본’(1446)을 고가에 사들여 연구용 영인본을 비밀리에 배포한다. 이 원본은 간송이 서거한 1962년 국보 70호로 지정되고, 1997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간송은 1962년 급성신우염으로 작고해 서울 방학동의 선친 묘역에 묻혔고, 민족문화재를 보존한 공로로 대한민국문화포장(1962)과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1964)이 추서된다. 그의 자제와 후학들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1966)를 개설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1971)으로 개칭했으며, 간송미술문화재단(2013)을 설립해 국내 최대의 간송 콜렉션을 융통합적으로 운영하면서 민족문화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훈민정음
훈민정음은 크게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언해본’, ‘훈민정음예의본’으로 나눈다. 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 목적을 밝힌 세종어제서문과 훈민정음의 음가와 문자 운용법을 밝히고 있는 예의, 정인지가 쓴 서문 등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을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창제하고 세종 28년(1446)에 공식적으로 반포되었다. 1940년 이 책이 발견됨으로써 한글 창제의 원리와 창제 당시의 우리말의 구조와 형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표지 두 장이 없어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소장자에 의하면, 연산군이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없앤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얻게 된 간송 전형필은 한국전쟁 중에 이 책 한권을 들고 피난을 떠났으며, 잘 때에도 베개삼아 자면서 한시도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李漢杰)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주쌍변(四周雙邊 : 네 테두리가 2줄로 됨)에 유계(有界 : 책의 행간에 경계선이 있음)이고, 소흑구(小黑口 : 책의 중간인 판심의 위아래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있음)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책의 처음 2장이 빠진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을 때 실수하여 '세종어제서문'의 끝자인 '耳'자가 '矣'자로 바뀐 듯하다(〈세종실록〉에는 '耳'자로 기록됨). 이밖에 주해본 〈훈민정음〉으로는 희방사본(喜方寺本)·박씨본과 일본의 궁내성본(宮內省本)·가나자와본[金澤本] 등이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윤복의 미인도 - 그 알 수 없는 표정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영조 34)∼?]는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후기 풍속화가이며, 부친 한평(漢枰)과 같이 회화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의 벼슬을 하다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는 것(가족이 같은 부서에서 벼슬을 할 수 없다는 조선시대 룰에 따라 나왔다고도 함) 이외는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그의 작품은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산수, 인물, 동물 등 여러 분야에 두루 능한 직업화가였으며, 시문에도 조예가 있고 서예에도 뛰어 났다고 한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 전해지는데. 모두 30여 점으로 이루어 진 이 화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 전시를 통해 외국에도 잘 알려진 그림이다
미인도는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 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에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조선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준다.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기(年記)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 여인의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는 막 옷고름을 풀려고 한 손을 대고 있으며, 다른 손으로는 보석(마노?)이 떨어지지 않도록 잡고 있는 데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는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의 동국진경풍속화(東國眞景風俗畵)를 계승하여 이를 기교적으로 변모시켰던 화원화가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성격이 호방 활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신선중의 사람으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수려한 미남자였던 모양. 그래서인지 이 그림속의 말 탄 양반(다리는 좀 짧지만)이나 하인이 모두 멋쟁이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 앞발을 모아 세우고 다소곳이 서 있는 적황색 말과. 노변의 버드나무까지도 호리호리한 미태(美態)를 발산하고 있다. 그림속의 인물이 항용 그린 사람을 닮게 마련인 것을 생각하면. 말 탄 사람은 바로 김홍도 자신이라고 하여도 좋을 듯 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나른한 늦은 봄날. 복건에 갓 쓰고 도포는 술띠를 늘여 차려입은. 멋장이 양반이 한 손에 쥘부채 들고. 한손에는 고삐를 잡은채. 길가 버드나무 아래 위에서 화답하는. 노란 봄 꾀꼬리 한 쌍의 흐드러진 교성에. 가는 길도 잊은 듯 넋을 잃고 멈춰 서 있다. 모춘여정(暮春旅情)의 시취(詩趣)가 뿌듯이 느껴지는 분위기 이다. 공백을 한껏 강조한 시정(詩情) 넘치는 일각(一角) 구도뿐만 아니라. 적황색 말과 푸릇푸릇한 연초록의 봄버들잎. 등황빛 꾀꼬리의 색조는, 노변과 버드나무 둥치에 찍어낸 청묵빛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져서, 춘정을 한층 자극하고 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길 윗쪽은 빈 공간으로 되어 있어 그곳이 어디(강? 하늘?)인지 상상력을 자극케 만든다. (출처 : 노을, 옛그림과 놀다)
국보급 불상, 청자와 백자

첫댓글 늦더위를 이기려고 노구(?)를 이끌고 장충동 뚱보할매(모두가 원조라는)집에서 족발을 즐겼읍니다.
뚱보할매- 아마 함경도 할마이집은 고, 김 용길의 단골집이 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