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무상사(學無常師) 비전의 스승은 없다
백과사전 : 「위(衛)나라 공손조(公孫朝)가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중니(仲尼, 공자(孔子))는 어디에서 배웠소?” 자공이 말했다.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남아 있소. 현능한 사람은 그 근본을 이해하고, 현능하지 않은 사람은 지엽만을 이해할 뿐이오. 문왕과 무왕의 도가 없는 곳이 없으니 우리 선생님께서 어디선들 배우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소?”(衛公孫朝問於子貢曰, 仲尼焉學. 子貢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논어(論語) 〈자장(子張)〉》)
‘어찌 고정된 스승이 있겠냐.’는 자공의 말에서 ‘학무상사’가 유래했다.
용례
배우는 자세가 된 사람은 ‘학무상사’라는 생각으로 의문이 생기면 누구에게든지 묻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모든 걸 가르쳐주는 절대적인 스승은 없다.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다.
배우기는 ‘나’ 밖에 있는 것을 ‘나’ 안으로 가져오는 정신적 활동이다. 배움은 다른 어떤 정신적 활동보다 어렵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의미를 깨치고 완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려면 실패와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거나 생각을 깊이 하는 등의 배움과 연관된 활동을 학교를 떠난 후엔 “먹고살기 바빠서 그만두었다”라고들 말한다.
배움이 학교 안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학교를 떠난 뒤에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언행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배울 수 있고 인문학을 접하며 ‘아직도 만나지 못한 나’를 찾을 수 있다. 학교 졸업 이후에 배움을 관두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고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공자도 학교만을 다니고 졸업 이후에 배우지 않았다면 동아시아 문명에서 ‘최초의 스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논어> 자장(子張)편 22장
— 501번째 원문
위(衛)나라 공손 조(朝)가 자공에게 물었다.
“당신의 스승 중니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자공이 대꾸했다.
“주(周)나라의 건국 영웅 문(文)임금과 무(武)임금이 걸으신 길이 아직 땅에 떨어져 없어지지 않았고, 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현인이라면 그 문화의 핵심을 기억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이라도 문화의 자잘한 조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문임금과 무 임금이 걸으신 길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어디인들 배우지 않았겠습니까. 또 어떻게 영원한 스승이 따로 있었겠습니까.“
衛公孫朝問於子貢曰:仲尼焉學(위공손조문어자공왈:중니언학)
子貢曰 :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자공왈 : 문무지도, 미추어지, 재인)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현자식기대자, 불현자식기소자)
莫不有文武之道焉(막불유문무지도언)
夫子焉不學 而亦何常之有(부자언불학 이역하상지유)
公孫朝 : 공손조(公孫朝)는 위(衛)나라의 고위 공직자에 해당되는 대부(大夫) 신분이다.
文 : 문(文)은 주나라 건국의 기틀을 닦은 문(文)임금을 가리킨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창(昌)이다. 그는 당시 은나라에 상응하는 군사력과 정치력을 지녔지만 은나라와의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다.
武 : 무(武)는 주나라의 왕업을 이룩한 무(武)임금을 가리킨다.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그는 동쪽 강태공과 연합하여 당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은나라를 목야(牧野)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墜 : 추(墜)는 떨어지다, 영향력이 없다의 뜻이다.
於 : 어(於)는 어조사로 뜻이 없는데, 장소 앞에 쓰이면 ~에서, 비교 앞에 쓰이면 ~보다를 나타낸다.
識 : 識은 알다, 기억하다의 뜻이면 ‘식’으로 읽고, 기록하다, 적다의 뜻이면 ‘지’로 읽는다.
學無常師 : 학무상사(學無常師)는 원문에 없지만 제일 마지막 구절을 새롭게 조합해서 널리는 쓰이게 된 말이다. 배움의 길에는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언제나 이끌어주는 절대적 선생은 없다는 말이다. 원효와 지눌 등 독창적인 세계를 개척한 사람들의 학문을 상징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자유로운 교육과 출세의 도구
공자는 교육과 관련해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공자 이전에 교육은 왕실에서 왕족과 귀족 자제들을 대상으로 품위를 유지하고 세계를 관리하는 일종의 제왕학(帝王學)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오경(五經) 중 하나인 <역경(易經)>은 바로 이러한 제왕 교육을 위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과거로부터 집성된 기성의 지혜를 특별히 제왕의 후보자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공개되지 않는 지혜를 비밀리에 전수하는 형태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오경(五經)이 인도의 초기 철학을 담은 문헌으로 널리 알려진 우파니샤드(Upanisad)와 상통하는 지점이다. 우파니샤드는 대부분 스승과 제자의 문답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사제 간에 무릎을 맞대고 가까이 앉음’이란 뜻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은 학생이 스승이 앉은 자리에 가까이 앉아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는 신비한 지식을 뜻하게 되었다.
공자는 관료의 길이 확정되지 않은 민간의 젊은이를 상대로 질문과 탐구를 통해 진리를 찾아갔다. 이런 측면에서 공자의 교육은 이전 오경(五經)과 우파니샤드의 교육과는 다른 질적 차이를 갖는 반면 플라톤의 교육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 중에는 관직 진출을 위해 전문 능력과 경력을 쌓기 위해 공자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론 관직 진출을 아예 접고 학문 자체를 위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공자는 학문과 정치의 선순환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학문 자체의 즐거움에 매료된 제자를 바라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공자는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는 민간인 중의 지자(智者)였다. 아울러 공자 학교는 플라톤이 그리스 아테네에 세웠던 아카데메이아(Acadēmeia)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공자의 교육과 학문이 후대의 그것과 달라지는 측면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교육에서 자유로운 학문 탐구를 중시했다. 반면 그의 학문이 한 제국에서 관료 진출을 위한 지침서가 되고 송(宋) 제국 이후의 과거 시험에서 필수 교재로 되면서 자유로운 특성을 잃게 되었다. 학자보다 관료의 특성이 부각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현실 정치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지만 학문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현실의 정치가 학문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으면 두 세계의 긴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국이 수립된 뒤로 공자의 학문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했던 유자(儒者)들은 현실 정치의 참여를 지상 목표로 설정하면서 정치에 의한 학문의 종속을 가져왔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자들은 과거 합격을 위한 학문과 성인(聖人)되기를 위한 학문을 엄격하게 구분하고서 ‘현실 정치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그들은 거리를 확보하는 논리를 <논어>에서 찾았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려고 했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돌보려고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 <논어> ‘헌문’편 25장
얼핏 생각하면 남을 위한 공부가 뭐가 그리 나쁘냐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다. 여기서 초점은 배워서 남을 돕느냐 돕지 않느냐에 있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공자는 학문이 이해와 욕망 등의 세속적 가치로만 환원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으로 회귀하여 심신을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올바름을 옮겨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학문관은 송나라 이후 과거제가 실시되면서 다소 흔들리기도 했다. 예컨대 주희(朱熹, 1130-1200)나 이황(李滉, 1501-1571)과 같은 바로 공자의 후배들도 과거 공부가 출세의 수단이며 당파의 이익을 지키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과거가 더 이상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니라 위인지학(爲人之學)에 불과하다며 출사를 포기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조식은 관직이 유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회가 아니라 사화(士禍)처럼 정쟁으로 변해버린 것에 실망했다. 아울러 그는 관직에 있지 않기 때문에 현실 정치가 유교의 이상과 어긋날 때 과감하게 상소를 올려 시정을 요구했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조식은 문정왕후를 ‘과부’라 부르며 현실 정치를 강하게 비판했다.(‘단성소(丹城疏)’)
경상남도 산청군에 자리한 덕천서원. 1576년 조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자와 노자의 만남
공자는 신도 아니고 신의 대리인(사자)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무엇을 배워서 고대 사회에 면면히 내려오던 지식의 물길을 통합해낼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은 오늘날 사람도 묻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당시 사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위나라의 공손조는 그렇게 궁금해하던 사람을 대표해서 질문을 던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나온다. 노자는 주(周)나라 왕실도서관을 관리하던 사관으로 재직했다. 공자는 주나라 뤄양(洛陽)으로 가서 노자를 만나 예(禮)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시대 중기 노숙한 이황과 신예 이이의 만남처럼 많은 관심과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공자가 예(禮)에 대해 질문하자 노자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한 수 지도를 하듯이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성현이란 이미 죽어서 몸과 뼈가 썩어버렸고 단지 말만 전해질 뿐이다. … 그대는 교만과 탐욕, 허세와 탐욕을 버리도록 하시오. 이러한 욕망은 모두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줄 말은 다만 이것뿐이오.”
압축적으로 말하므로 말의 양은 작지만 뜻은 깊다. 공자가 말하는 성현은 이미 죽고 말만 남았다는 것은 애지중지 여길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아울러 공자가 자신의 가치를 믿고 세상을 구하겠다고 덤비는 것도 어리석다는 말이다. 공자는 노자의 말을 듣고서 풀이 죽거나 기가 꺾이지 않았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듯이 담담하게 만남의 결과를 제자들에게 전했다.
“달리는 동물은 그물로 잡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잡고, 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 있다. 용은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니 나는 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구나!”
공자가 노자를 만났느냐를 둘러싸고 믿을 수 있다 없다는 논란이 있다. 설혹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하더라도 공자는 노자에게서 무엇을 배웠다고 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의 가치와 방향이 워낙 달랐던 터라 공자는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더욱 단단하게 벼릴 수 있을지언정 새로운 것을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자는 젊어서부터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을 찾아가 물었다. 또 그는 “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 속에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말하듯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공자의 스승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제자들이 공자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어떤 시점과 수준에 이르면 더 나아가지 않고 답보 상태를 보인다. 좋은 질문은 지적 자극을 주기에 충분한 요소이다. 적절한 질문을 받으면 그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기존의 지식에서 답을 찾으면 질문은 그 자체로 해결되지만 답을 찾지 못하면 기존의 지식을 철저하게 재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재검토는 공자로 하여금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다.
그래서 가르치기와 배우기가 완전히 다른 별도의 과정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시경(詩經)> ‘열명(說命’에서 “효학반(斅學半)”이라고 하고, <예기(禮記)> ‘학기(學記)’에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 다 가르치기와 배우기가 서로 맞물려 있고 선생과 학생이 모두 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 중 ‘문례노담(問禮老聃)’.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문물제도를 보고, 또 노자에게 예문의 절차를 물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후생가외(後生可畏), 편집을 넘어 창조로
오늘날 우리는 분명히 전인교육이나 인성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실에서는 내신, 수능 등에서 좋은 성적을 얻게 하는 선생님이 가장 좋은 선생님일 것이다. 내신에 필요하다고 하면 단시간 안에 뜀틀, 줄넘기, 공놀이까지 배우느라 과외 선생님을 찾는다. 이 때문에 학교 선생님보다 학원 선생님의 말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가 ‘교육’의 영역을 오직 성적이라는 좁은 방식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오늘날 우리와 달리 교육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만큼 넓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육 영역’에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거나 고전을 읽어낼 수 있는 학습 능력을 기르는 것만을 포함하지 않았다. 공자는 사람이 개인과 공동체의 범위에서 올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것도 ‘교육 영역’에 포함했다. 이처럼 교육의 영역이 넓다보니 학교라는 교육이 특정한 공간, 생업에 종사하기 이전의 특정한 시간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내가 온전한 인격을 가꾸는 존재로 살아가려면 자연히 평생교육을 해야 하고, 내가 겪는 모든 상황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나를 가르쳐주는 외부의 선생만이 아니라 나의 갈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내부의 선생을 만나게 된다. 내부의 선생은 지금까지 있었던 선배들의 성과와 정보를 암송하거나 편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상황을 개척하려면 분류와 편집이 아니라 파괴와 창조의 작업이 필요하다.
아울러 후배는 선배가 걸어간 삶을 밑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선배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후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후생가외(後生可畏)인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후배들에 의해 다음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글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