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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말씀(70) : 작은자 한 사람이라도
마태복음 18:8 - 14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영상 하나 잠시 보시겠습니다.
(어버이날을 기리는 주일학교 어린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SY2RwIM6EQ
[아이들의 이야기; 사랑해 주시고 절 지켜 주시고, 먹고 싶은 걸 잘 해주시고, 기독교의 배경 궁금할 때 마다 잘 설명해 주시고, 가장 고마운건 태어나게 해 준 거예요, 내가 친구들과 싸우거나 친구들에게 슬픈 마음이 들었을 때 엄마 아빠가 위로해줘서 고맙고 감사합니다.사랑해주고 키워주고 막 해 준 것입니다. 엄마는 내가 짜증내고 화내고 그러는데 같이 살아 주고 키워줘서 엄마 아빠가 항상 사랑으로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가 장난감 사주고 맛있는 것도 주고 먹을꺼 줬어요. 하나님 말씀 속에서 키워주신게 제일 고마워요.]
부모님을 위해 박수 한번 하시겠습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생각하는 거 보니까 아이들을 위해서 친 거 같습니다. 감사는 감동이 되지요. 오늘 어버이 주일입니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그 사랑으로 저희들이 감사하는 주일을 지키게 됐다 라고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연동교회 어버이와 같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며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전 같으면 우리 교회 어르신들 오늘 예배 드리는 모든 우리 부모님 되신 분들께 카네이션 하나씩 달아드려야 되는데, 오늘 저는 우리 자녀들이 준 이 나무로 된 카네이션을 달았지만 여러분께는 이 코로나 상황에 달아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너무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작은 선물 준비했고요, 여러분 주보에 보시면 간지로 제가 우리 어르신들 있는 모습들도 그런 사진으로 이렇게 찍어서 또 편지 한장 썼습니다. 그렇게 작은 거지만 그렇게 부모님의 감사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세상의 모든 우리 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말씀 일흔 번째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우리 몸의 기관 가운데 맹장 편도선 사랑니 꼬리뼈 뭐 이런 거는 필요 없는 기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화론적인 과학적인 관점에서 맹장은 자신이 초식동물일 때 필요한 기관이라 해서 인간이 예전에 진화가 되기 전에 초식 동물이었을 때 있었던 건데 지금 좀 퇴화가 됐다 라고 얘기하고요.
사랑니는 육식을 할 때 유용한 치아인데 이제는 육식을 많이 하지 않으니 이젠 사랑니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퇴화된 것이라고 얘기하고요.
편도선은 갑상선의 기능을 가진 것이 일부가 외부로 나온 것인데 다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 편도선이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아 이런 것들은 다 사실 퇴화되어서 없어져도 필요없는 것들이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진화되어서 단계 별로 퇴화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여러분 생각 한번 해보십시오.
어 그러면 이 맹장이 괜찮은 사람도 일부분 있어야 될거고 사랑니가 좋아서 아프지 않고 잘 나는 사람도 한 3분의 1쯤 되야 할거고 편도선도 괜찮은 사람들이 일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보면 대부분이 맹장 편도선 사랑니 같은 것은 과학이나 진화론적으로 보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 때문에 고통을 겪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인류 전체가 그렇게 고통을 겪고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보면 사실은 우리가 지금 막 말씀드렸던 사랑니 맹장 편도선 이건 사실은 그냥 완전히 필요 없는 거고 퇴화되는 거라고만 말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아마 인류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사랑니 맹장 편도선은 계속 우리와 함께 했던 것이죠. 편도선이 일부 면역 기능을 담당하고 있지요. 그런데 때로는 염증이 생겨서 고열이 생기면 우리 몸을 아프게 하니까 제거해도 되겠다 라고 생각한 것 뿐입니다.
사랑니가 육식을 잘 먹도록 도와는 줬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류와 함께 고통을 계속 줬던 것이 사랑니이죠. 하지만 그 사랑니를 통해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아주 어린 아이는 사랑니가 나지 않거든요. 사랑니 편도선 맹장은요 진화 전에는 괜찮은 기능을 가진 기관이었지만 인간이 진화되면서 점점 퇴하 기관이 되었다 라든지, 이제 다 제거해도 되고 없어도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창조될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때부터 사랑니를 만드셨고요 맹장을 만드셨고 편도선을 만드셨어요. 과학이 발달되면서 한동안 맹장 편도선 그 사랑니가 필요 없는 것이다 다 제거해야 된다 퇴화되었으니 모든 거 없어도 괜찮다 하고 얘기해왔지만 좀 달라졌습니다.
요즘의 과학에서 조차도 물론 그것이 간이나 신장처럼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10개 손가락을 한번 보십시오. 밥 먹을 때 쓰는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글을 쓸 때 쓰는 손가락, 운동할 때 필요한 손가락, 그렇게 따지면 열 손가락 다 필요없는 거 같습니다.
이런 얘기 했더니 나이드신 집사님께서 본인은 컴퓨터 타이핑을 할 때 검지 손가락만 쓰는 독수리 타법을 쓰니깐 이 손가락만 필요합니다 라는 농담을 하십니다. 그런데 잘 따지고 보면 자주 쓰는 손가락은 있지만 필요없는 손가락은 없습니다.
다 필요한 손가락이지요. 제가 새끼 발가락을 다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끼 발가락 만큼 못생긴 게 없죠. 엉뚱하고 조그마하고 발톱 위에 달린지 만지 잘 모르는 것이어서 그래서 새끼 발가락이 별로 이쁘지 않아서 여름에 샌들을 씻는 게 참 불편합니다. 없었으면 하는 새끼발가락인데 이 새끼 발가락이 아파서 다쳤더니 그날 저는 밤에 잘 때 새끼 발가락이 아파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운동할 때 다친 발가락 때문에 착지할 때마다 계속 넘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파서 의사되신 성도님께 발가락 하나가 아픈데 허리 아프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발가락 하나가 아프면 균형잡기가 어려워서 허리도 아프게 되있다고 하십니다.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 새끼 발가락 하나가 아픈 건 온 몸이 다 아프게 되더라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 몸에 붙어 있는 것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구나 다 소중한 것이구나. 맹장도 새끼발가락도 그 나름의 역할과 기능이 내 안에 다 있구나.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사실 우리 기독교 안에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12장 12절과 21절에서 23절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길지만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몸인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줍니다'
그러면서 26절에 이렇게 얘기하지요.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진화론적인 관점 과학적인 관점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말씀이지만 이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어떤 지체도 그가 연약하고 모자라고 그가 나약해 보일지라도 그가 우리와 함께 있어야만 한 몸되신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하나 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핵심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장에 고린도전서 13장이 무슨 장입니까? 사랑 장입니다. 그 앞에 어떠한 지체라도 우리가 함께 해야만 그리스도 가운데 한 몸이 될 수 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그 다음 장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지체도 어떤 작은 자라도 우리 신앙과 교회 안에서는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바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살피고 사랑하는 기독교의 핵심 신앙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10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사랑하고 그들을 보살피며 그들을 향한 마음을 품는 것이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라고 증거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12절 이하에서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합니다.
100마리의 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아흔아홉마리가 있으니까 그냥 가자고요, 아니요. 우리 기독교 우리 신앙의 핵심은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처럼 우리 기독교 신앙은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영혼을 다해 그들을 대하고 그들을 품어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신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웬만하면 세상 정치 이야기는 설교 시간에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이야기는 해야지요. 교회와 신앙과 정치는 사실은 굉장히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근 정부와 이 권력자들이 불신을 받고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 정치 사회적인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권력자들이 이 땅의 이 나라의 지극히 작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신음 소리를 듣지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와 권력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이번 코로나를 지나면서 코로나 이전에도 불신을 많이 받았지만 코로나를 통해서 더 큰 불신의 단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외부의 시선을 인정은 하되 우리는 반드시 회복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 회복의 방법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신앙의 본질을 찾아내면 우리는 다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를 보살피고 그들을 위해 신앙을 지키는 교회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때 우리 교회는 코로나로 잃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말씀에 무엇이라 적혀져 있느냐? 지극히 작은 자를 하나님 보듯, 주께 하듯 하라.
그러면 그 말씀을 지켜내면 우리는 세상을 향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사명 믿는 자들의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지요.
복음과 예수는 좋습니다. 기쁜 소식을 세상 사람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받지 않습니다. 믿지 않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와 복음은 좋은데 그것을 전하는 도구인 저와 교회가 지금 잘못되어 있는거죠.
불신을 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그 불신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교회가 오늘 본문 말씀대로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신앙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0절의 말씀대로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듯 한다면 다시 그들을 향한 신뢰 선교와 전도를 위한 믿음을 그들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에 한 제자가 영적 스승을 찾아와 따져 묻습니다. 스승님 예전에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소명과 사명을 듣고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영적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함께 하신다. 단지 우리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보기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아니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다고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요? 아니요! 저와 여러분이 우리 한국교회가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 낮은 곳에 오신 그 지극히 작은자에게 오신 예수처럼 그들을 보기위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하는데 우리는 교만해 있습니다. 고개가 뻣뻣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데 그 낮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하며 교만하게 외치고 있는 거지요.
오늘 마지막 항존직 선거입니다. 유례없이 2차 선거에서 많은 주의 일꾼들을 주님의 뜻가운데 세워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아임스틸 헝그리(I'm still hungry.)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여전히 주의 일꾼이 필요하다. 주님의 사람이 채워지길 원한다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선거 첫 주일에 '참된 권위가 필요한 시대' 라는 제목으로 제가 말씀을 전하면서 말의 권위가 있는 자. 행동의 권위가 있는 자. 믿음의 권위가 있는 자를 세워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또한 두 번째 주일 지난 주일에는 어린이 주일로 어린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접하는 자를 세워달라고 말씀드렸죠? 오늘은 마지막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작은 자를 누구보다 더 귀하고 소중히 대하는 자를 여러분 뽑아주십시오.
어떤 성도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겸손한 태도를 그 성도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자를 교회를 위해 여러분 기도를 통해 뽑아 주십시오.
그런데 저는 오늘 뭐 이 날을 맞이하여 특별히 우리 교회 어르신들을 잘 모실 수 있는 분을 선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05년도 통계 자료를 보면 개신교와 타종교의 세대별 인구증감에 대한 표가 나옵니다. 그것을 비교해 보면 특별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우리 개신교 우리 개혁교회 개신교의 고령화가 아주 높게 나타나고 있죠. 좋게 얘기하면 우리 어르신들이 교회 많이 나오시는 거고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조금 부정적으로 보면 어르신들이 많아지는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개신교회 6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2005년도에서 십년이 지난 2015년도에 인구증감률 보다 두 배나 더 많습니다. 더 많아졌습니다. 타종교에 비하면 세 배가 더 넘습니다.
그런데요 이 통계를 가지고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이렇게 증가하는 노인복지 관련해서 예산이 계속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프처럼 갑자기 급속하게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신문 기사에 보면 이 가파르게 올라가는 노인복지 예산이 매번 올라갈 순 없다. 어느 순간에는 정체가 될 텐데 그럼 노인의 숫자도 정체가 될 거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계속 늘어난다 그러면 어느 시점에는 노인복지에 사각지대가 만들어질 것이다 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세상에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앞에서 보셨던 그래프처럼 지금 우리 개신교는 우리가 고령화가 되고 어르신들이 더 많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고 있지요. 그러다 보면 세상의 이런 분석이 우리 교회도 똑같이 적용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고령화된 성도님들이 점점 증가하고 신체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실 교회 어르신들이 더 많아지는 것에 대해 준비해야 합니다. 고령화된 교회를 목회하는 그런 계획이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는 연동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제가 미국에서 신학 공부하면서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신학교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건을 통해서 교회 현장에 목양을 하는 목회자 되어야 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나이가 좀 많으신 분들이 노인 아파트에 가십니다. 단독으로 혼자 그곳에 계시는데 그 아파트에 계셔서 노인 아파트 계신 분들은 거동이 불편해 해서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교회 오기가 힘드십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많아 그곳에 심방을 자주 갔습니다. 하루는 그곳에 심방을 가서 심방 대원들과 함께 로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로비 옆의 한 집에 창문에 우리 권사님 같은 한 여자분이 창문 밖을 쳐다 보시는데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밖을 쳐다보고 계시는 겁니다.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채 자다가 바로 일어나서 그냥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시는 거죠.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제가 심방하러 가려 했던 그 권사님 댁에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뭐 예배만 드리고 올 수 없습니다.
가서 예배드리고 찬송도 한 다서여섯 곡을 부릅니다. 계속 추천 받아가지고 찬송 다서여섯 곡 부르고 또 저희는 나가서 식사하겠다 하여 다 준비해서 식사도 하고 커피 마시고 한 세네 시간 심방하고 나오면서 혹시 그분이 거기 또 계실까 하고 살짝 돌아봤는데 똑같은 차림새로 똑같은 모양으로 그대로 서 계신 겁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눈빛으로 제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저에게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저도 외로워요 저도 쓸쓸합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목사님. 저도 심방해주세요 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그 어르신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외롭고 고독하게 서계신 모습을 생각하면서 저분도 어느 교회 권사님 집사님이셨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책에서 나오는 하나님 책에서 나오는 교회 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필요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눠야 겠다 결심하고 교회 현장에 목회자로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어르신들을 다 영적으로 케어 Care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맡은 교회 현장의 어르신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하고 그분들을 영적으로 돌봐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주 말씀드렸던대로 우리 주일학교에 어린 자녀들이 교회에서 지극히 작은 자이지요. 더불어 이제 곧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교회 어르신들도 지극히 작은 자 입니다.
교회 밖에 이웃들 가난한 자들 많지요. 교회 밖에 지극히 작은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잘하지 못하면 교회 밖에서 하는 구제 봉사, 의미 없습니다.
먼저 우리 안에서 그렇게 작은 자를 주님 모시듯 할 수 있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개척하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어르신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개척하고 첫 번째 당회 때 첫 번째 안건으로 내 놓은 게 제가 한 달에 한번 어르신들 모시고 사랑방 모임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허락 안해줘도 저 할 겁니다. 예산책정 해주시고요 우리 장로님 한 분씩 점심값 내십시오. 장로님들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방 모임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어르신들과 함께 모여서 같이 예배드리고 찬양부르고 성경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했습니다.
이분들이 그렇게만 하기 싫다고 자원봉사도 저희들 떠나서 자원봉사도 하고 만들기도 하고 소풍도 가고 또 점심때는 맛집 찾아서 맛집 찾아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끝나고 이분들 가시면 노인 아파트에서 또 한 달 동안 홀로 계셔야 하니 그 날만큼은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것을 반나절 동안 했습니다. 15분, 많을 땐 20분이 함께 하는데 이 분들이 일제시대 때부터 계신 분들이라 일제 시대부터 얘기하기 시작하십니다.
미찌꼬 세이꼬 아시죠? 미자 성자 영자 서로 얘기하면서 일본 말로도 하시고 저는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625 사변 가면 일사후퇴 얘기 나오면 이제 그때부터 뭐 그거 책으로 쓰려고 하다가 제가 왔습니다.
그 날 점심에 그렇게 저희가 대접하는데 하루는 한 권사님이 이제 점심 내가 대접하겠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서로 아니다 내가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예산 저희들 그냥 다 아끼고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하는데 하루는 한 권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여러분 한테 20분 정도되는 점심식사 준비하려고 자녀들이 준 용돈을 모으는 데 그 용돈 모으는 재미가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대접할 수 있는게 나이가 들었는데 누군가를 대접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그러면서 정말 천국과 같은 그런 모임을 계속 가졌습니다.
제가 연동교회 온다고 했을 때 가장 심하게 반대하셨던 분들이 그분들이셨습니다. 저 여기 못올뻔 했습니다. 어르신들 고집 쎄시거든요. 절대 안된다고 그런데 마음을 바꾸시더니 저를 가장 축복해주시면서 보내주시고 지금도 저와 여러분 우리 연동교회를 위해서 지구 반대편에서 그분들이 기도해주고 계십니다.
그랬던 제가 연동교회 왔습니다. 뭐 교회의 사이즈가 커졌다고 달라지겠습니까? 아니요. 저는 똑같습니다. 우리 교회 어르신들과 제가 미국에서 했던 그런 나눔과 교재를 너무나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재작년에 우리 제 1 여전도회에서 우리 소풍을 가기로 했습니다 강화도의 우리 수양관에서 예배드리고 강화도에 있는 좋은 꽃도 구경하고 또 교회도 구경하는 곳을 갔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고 싶었는데, 제가 저 가고 싶어요 얘기하면 너무 연동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하시면 안되지요 그럴까봐 말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원 분들이 오셔서 목사님 같이 가시죠, 하시니 예 가고 싶습니다 말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갔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입니다. 어르신들이 다들 얼굴이 작으셔서 동안이셔서 제가 맨 앞에 있으니까 몸이 너무 크게 나왔죠? 이 사진만 바라보면서 지금 코로나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고 싶은데 제가 이 때 예배드릴 때 이렇게 설교했거든요. 지금 오신 분들 제가 은퇴할 때까지 장례 하나도 안 치를 겁니다 라고 제가 그렇게 설교하는데 기억나십니까? 그런데 몇 분 장례를 치뤘습니다.
이렇게 어르신들 모시는게 행복이구요. 그게 천국 아니겠습니까? 다시 코로나가 끝나면 어르신들과 함께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 구경 갈 그날만 소망하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작은자 하나라도 우리는 허투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도리어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 대하듯 그들을 모셔야 합니다.
특별히 어버이 주일입니다. 교회 어르신들의 생각하며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고 더욱 우리 부모님들을 축복하고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하는 이 계명을 지키는 그 가정들을 보면 모두가 주위에 축복과 은혜를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과 또한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나누어 더욱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저와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 우리 연동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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