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현대문명의 폐허 속에서 꽃을 발견하는 시편들
박원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방아쇠증후군』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박원희 시인은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 속에서 오히려 피폐해지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문명이 발전하고 각종 삶의 이기가 만들어지고 우리의 삶이 편리해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 폐허가 된다. 우리의 욕망은 더욱 커지고 욕망이 채워야 할 결핍은 더 늘어나고 그만큼 없는 것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먹을수록 더 허기가 지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문명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런 허기가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고 폐허로 만든다. 하지만 박원희 시인은 이 폐허 속에서 꽃을 발견하는 심정으로 시를 쓴다.
빈 길에서 나를 생각한다/이미 없어져버린/시간의 흐름은/내가 안고 온 모든 과거/개인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남아 있는 것은 오직 시간이 지배하지 않는 빈 길//아무것도 없이 바람만 지나가는 언덕/시선이 머물다 갈 뿐/아무것도 가지지 못한/길에서 있을 뿐//빈 길에서/기다림은/시간 아니면/공간//말없이 바라보는/언덕을 넘어오는 바람/빈 길
-「빈 길」 전문
출판사 서평
시인은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삶 모두를 텅 빈 “빈 길”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길에는 아무것도 없고 바람만이 그곳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자신이 살아온 길, 지금 자기 앞에 놓인 길이 “빈 길”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그것은 자신이 진정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일을 하며 돈을 벌며 무엇인가를 만들며 살고 있다. 그 채우기 위한 무엇을 흔히 욕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뭔가를 해서 채우더라도 항상 뭔가 더 부족하다는 결핍감을 메꿀 수 없다. 그리고 이 욕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다. 남들이 또는 사회가 나에게 강요하는 욕망일 뿐이다. 시인은 이 모든 가짜의 욕망을 지우고 세상을 보고 있다. 그럴 때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기다림만이 채우고 있는 “빈 길”이 된다. 기다림은 없는 것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결국, 이 “빈 길”은 없는 것들이 차지하는 공간이다. 시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빈 공간, 즉 “빈 길” 위에 서 있다.
이름은 생각나는데/성은 기억이 안나//성은 기억나는데/이름이 기억이 안나//이름 성 모두가 기억나는데/얼굴이//푸른 것은 풀이고/노란 건 모두 애기똥풀이 된//뉴런이 뒤엉켜/나의 미도콘드리아가 유전을 멈추기를/디엔에이가 뭉쳐 다니면서/퍼트리고 싶은 욕구/사랑해//나는 울고 있는데/웃고 있네//사랑하고 있는데/어느새 증오하고//이름이 기억이 안나/성이 얼굴이/나를 가만히 있게 내버려둬//그런데/불투명하게 바라보는/ 너는 누구냐
-「거울 속의 망각」 전문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성과 이름과 얼굴이 따로 놀고 “울고 있는데/웃고 있”다. 나를 부정해서 유전을 멈추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 나를 퍼뜨리고 싶은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시인은 결국 “너는 누구냐”고 묻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거울 속의 나이다. 내가 누구인지 사실은 알 수 없고 거울에 비추어야만 자신을 볼 수 있다. 이 거울은 도처에 있다. 거울은 사회적 요구가 되어 나를 비추고 타인의 욕망이 되어 나를 몰고 간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나를 잃고 나마저도 사라져 거울 속에 비치는 허상으로만 나는 존재한다. 나를 볼수록 나를 지키려 할수록 진정한 내가 사라져 버리는 아이러니를 시인은 확인하고 있다.
이사를 하면 영혼은 어이할까/집 없이 떠돌이로 살다간/영혼은 찾아올 수 있을까/한때는 누군가의 무남독녀로 애지중지/커다란 집에 부러울 것 없이/살던 영혼/이삿짐을 싸면서/생각난다/아버지, 어머니/산다면 살고 있다면/영혼이 살고 있다면/이사는 어이하는 것일까/찾아올 수 있을까/바람을 일으키며 가는 길에서/문패도 없는 집
-「문패 없는 집」 전문
시인은 영혼마저 찾아올 수 없이 떠돌이로 살고자 이삿짐을 싼다. “문패도 없는 집”은 내가 살고 있으면서도 내 영토가 아닌 집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영혼이 살고 있다면” “찾아올 수 있을까” 하고 시인이 걱정하는 것은 사실 아무런 영혼도 머물 수 없는 완전한 노마드의 삶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박원희 시인의 시에서 현실은 폐허이고 사막이다. 하지만 세상이 없는 것들만 존재하는 사막이라는 인식은 그 안에 없는 것들을 소망하고 꿈꾸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없다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의 결핍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더욱 갈망하게 된다. 이 갈망이 우리를 기대와 희망으로 이끈다.
나를 포기한 밤이 지나야 새벽은 온다//폐플라스틱 사이에서/폐플라스틱을 가르며/물고기의 배를 가르면 배 속 가득 담고 있었던/폐플라스틱//할머니, 할아버지가/하나둘 고물상으로 들어와 꿈을 꾼다/새것이 되는 꿈//(중략)//폐지를 잔뜩 안고/폐플라스틱처럼 구부정한 삶이/들어와//폐플라스틱처럼/꿈꾼다/허망하지 않은 꿈/새롭게 태어나는 꿈/한 번은 뒤집혀야 새롭게 일어나는 꿈/맞고, 부서지고, 분해되고/한 번은 죽어야 다시 사는 꿈/나눠지고, 흩어지고/다시 뭉쳐 일어서는 꿈//어디선가 다시/분해되고 모여/잘게 부셔져/뜨거운 곳에서 다시 부활하는 몸//다시/ 무엇이 되는
-「부활」 부분
시인은 “나를 포기한 밤이 지나야 새벽은 온다”고 첫 연에서부터 분명하게 주제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시를 통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주제에 도달하는 시인의 성찰 과정이다. 폐플라스틱이라는 사물을 통해 시인은 이 성찰을 보여준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우리 모두는 늙어간다. 그런데 고물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것이 결코 죽음과 소멸로 가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폐플라스틱이 잘게 “부서지고, 분해되고” 결국 “다시 부활하는 몸”이 되듯이 우리가 겪게 될 우리의 늙은 몸도 우리를 분해하여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의 일부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결국, 늙어 죽어가는 것은 그냥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뭉쳐 일어서는 꿈”을 꾸는 행위인 것이다. 폐허가 생명으로, 없음이 있음을 위한 희망의 힘으로 전화하는 마술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고, 박원희 시인의 시적 성과이기도 하다.